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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마지막 33년 (정아은, 사이드웨이,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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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마지막 33년 (정아은, 사이드웨이, 2023.)

Dog君 2023. 9. 10. 20:46

 

  이 책은 크게 두 개의 질문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는 '왜 우리는 전두환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도 33년동안 그를 제대로 단죄하지 못했는가'이고, 두 번째는 '전두환은 과연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이죠.

 

  가만가만 따져보면 두 질문 모두 저의 평소 관점과 어긋납니다. 첫 번째부터 볼까요. 다른 모든 과거사 문제와 마찬가지로, 전두환에 대한 법적·제도적 단죄는 그저 최소한의 조건일 뿐 그것만으로 과거사에 대한 모든 고민과 논의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전두환을 단죄하는 것만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겠죠. 반대로 그가 죽는 바람에 그를 단죄하지 못했다고 너무 억울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전두환에 대한 단죄 여부를 중심에 놓은 이 책의 첫 번째 질문은 좀 마뜩잖은 구석이 있죠.

 

  두 번째 질문도 비슷합니다. 이 질문은 저희가 예전에 읽었던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이 취했던 태도와 비슷합니다. 독재란 본디 권력 행사의 최정점에 있는 독재자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측면이 강하기에 독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재자 개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일전에 저희가 다뤘던 '대중독재'를 염두에 두면 다른 이야기도 가능하겠습니다만, 일단 여기서는 논외로 합시다.) 이 역시도 다소 마뜩잖게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에서 내리는 결론 대부분이 짐작과 추측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책이 그렇게까지 단순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래서 이 책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를 바랍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저는 이 질문이 가진 약점을 저자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안타까워 하는 것이 전두환을 단죄하지 못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저자가 정말로 안타까워하는 것은, '전두환에 대한 법적·제도적 단죄'라는 최소한의 조건조차 충족시키지 못했기에 전두환과 그의 시대를 차분하게 돌아보고 복잡한 인간을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313~314쪽.) 그런 즉슨, 전두환에 대한 사법적 단죄 이상의 무언가를 그 누구보다 바라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저자 스스로겠지요.

 

  두 번째 질문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두환의 내면을 파고드는 이 책의 시도는, 사실 전두환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악인이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야 다시 그런 악인이 다시 등장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평범한 원칙을 만족시키기 위함이겠죠. 물론 그 과정이 약간 덜 객관적으로 보이기에 저 역시도 아주 흡족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두환과 그의 시대에 대해 총체적으로 조망하려는 시도가 아직은 부족한 상황에서, 우선 화두를 던진다는 면에서 일단은 긍정적으로 봐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전두환은 죽고 없습니다. 살아 생전에 그를 좀 더 엄격히 단죄하지 못한 것은 아쉬울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성찰과 고민이 중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두환의 시대가 다시 오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더더욱 전두환의 시대를 냉정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어쩌다 그런 자가 나타났고, 권좌에 올라서, 권세를 누리다가, 온전히 단죄받지 않을 수 있었는지를, '역사화'시켜서 냉정하게 따져 물어야 합니다. 역사책을 읽는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바로 그런 것이겠지요.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 대륙의 다시 지역은 지금도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이에게 통치받거나 정통성 없는 신생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쿠데타로 집권했던 독재자들은 정권을 연장하여 종신 집권을 도모하거나 퇴임한 뒤에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일신의 안전을 확보했다. 개중에는 퇴임 뒤 국민이 내릴 처벌이 두려워 외국으로 도망친 이들도 있었다. 쿠데타로 집권했던 태국의 쁠랙 피분송크람은 퇴임 뒤 일본으로 도피해고,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하와이로 망명했다.
  퇴임한 전두환이 걸었던 길은 그런 독재자들 중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장기 집권은커녕 반대 세력의 잦은 시위에 시달리다가 임기를 겨우 채운 뒤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왔고, 퇴임 뒤 대한민국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며, 일반 시민의 상태로 국내에서 33년을 살았다. 퇴임 8년 뒤에 단죄되어 감옥에 들어간 적이 있지만 2년 만에 풀려나왔고, 그 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죽 감옥이 아닌 바깥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았다. 4개 필지, 3개 건물로 이루어진 총 1,652㎡(약 500평) 규모의 집에 살며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았고 간간이 '전직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초청받아 다른 전임 대통령들과 어울리며 '조국의 미래', '국가의 안위'를 운운했으며, 측근들과 골프를 치고 고급 식당을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91세 되던 해 지병으로 삶을 마감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국민을 살상하고 불법적으로 집권한 전두환이 어떻게 7년 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권좌에서 내려온 뒤에도 제대로 된 단죄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까? (12~13쪽.)

 

  한 가지 유념해서 볼 것은 그의 성장 과정에서 접했던 사람이나 기관, 활동들이 모두 실용성과 현실적 기능을 위한 범주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
  한국의 육군사관학교는 미국 육사의 '테이어 제도(Thayer system)'를 근간으로 삼아, 공병 기술 교육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이 경쟁의 대상이 되도록 학과 제도를 편성한 교육기관이었다. 신입생 선발 단계부터 정규 인원의 10% 이상을 선발해 경쟁을 통해 탈락시키는 구도였고, 육사생도들은 매일 실시되는 시험을 치르며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기를 써야 했다.
  처음 들어갔던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전두환은 가난과 전쟁(대구공고 입학과 동시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뒤늦게 시작한 탓에 남들보다 기본 지식이 부족하다는 약점과 싸우며 교육 과정을 밟아나갔다. 그런 절박함 탓인지, 전두환에 관한 기록에는 그가 기능 중심으로 설계된 공고와 육사 같은 정규코스 외의 취미나 종교 활동을 가진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
  교회나 악단은 개인과 국가의 중간 지대에 존재하며 공동체적 소양을 길러주는 중간 결사체다. 사람들은 종교단체나 지역단체, 취미를 매개로 모인 그룹에서 활동하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넘어선 타인들을 만난다. 제 핏줄이 아닌 '남'과 화합하거나 갈등하며 내가 속한 지극히 작은 공동체인 가족을 넘어선 차원의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낌다. 이를 통해 '국가'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거대 공동체가 줄 수 없는 다양한 가치와 만나고, 동시에 창출해 낸다.
  (...)
  돈이 되거나 출세에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하고 나면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얻는 활동들, 증 종교 활동이나 취미 활동, 창작 활동은 한 인간의 영혼을 풍성하게 만든다. 그런 활동을 통해 사람은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 활동'을 할 대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고, 인간의 다양한 결과 층위를 체험하게 된다. 또렷한 선악 구도나 흑백 구도에서 벗어나 사람의 내면에 수많은 자질의 스펙트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언뜻 닮아 보이지만 파고들어 가보면 매우 다른 인간상이었다. (...)
  이런 차이는 전두환이 31세가 되던 해에 만났던 박정희를 청년기와 중년기의 모델로 삼아 모방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단순화하고 왜곡하면서 생겨났을 것이다. 타인을 본받았을 때 사람이 채택할 수 있는 잣대는 오롯이 제 내면에서 나오는 법이다. 전두환은 박정희라는 다양한 결을 가진 문제적 인간을 관철하고 학습하면서 제 내면에 없는 특성은 보지도,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저 제 안에 있었던 열망, 즉 열심히 움직여 권력을 움켜쥐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겠다는 강력한 바람을 필터 삼아, 박정희라는 복잡한 인간이 함유한 다양한 특성 중에 가장 잔인하고, 가장 권위적인 것만을 취사선택해 제몸에 갖다 붙였다. (...) (45~49쪽.)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킨 뒤 그들을 인간 말종으로 타자화하고 그를 통해 자신을 영웅시한 '괴물 전두환'은 세 가지 종류의 토양에서 잉태되었다. 1) 타고난 적극성, 2) 가난이라는 결핍, 3) 군인으로서 받았던 교육, 이 세 요인은 상황에 따라 위인을 탄생시킬 수도 있는 비옥한 토양이다. 적극적인 성향은 적시에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성찰 능력이 가미되기만 하면 훌륭한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 요인이 되고, 가난이라는 결핍은 작은 풍요에 기뻐할 줄 아는 긍정적인 성정과 약자의 입장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감 능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군인으로서 받은 교육은 앞장서서 솔선수범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디딤돌이 되어줄 수 있다.
  전두환에게 내재해 있던 장점들이 기형적으로 변형되어 희대의 악으로 연결되는 데는 4) 시대적인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격동의 현대사를 겪는 동안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했던 국민은 살아남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가족 단위로 똘똘 뭉쳐 억척스럽게 투쟁해 나갔다. 먹고살 거리를 마련할 수 있다면 불법과 거짓 앞에 눈감아 버리는 문화가 자리잡았던 배경이다. 여기에 민주주의가 안착하지 못한 정치 문화, 그리고 박정희라는 강력한 인물의 영향이 덧입혀지면서, 자기를 성찰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정치군인 전두환은 제 야망이 가리키는 길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리고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표 악인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59~60쪽.)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전두환은 1980년 11대 대통령 취임 이후 모두 18차례 광주를 찾은 것으로 나타난다. 전두환은 임기 동안 매년 1~4차례 광주를 찾았다. 삼청교육대와 학원안정법 제정 기도, 건대 항쟁 과잉 진압은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증언과 무서가 수없이 남아 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하면, 양쪽 모두 사실이었떤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은 재임 당시 광주에 나름대로 (비본질적이고 즉흥적인 방식이었지만) 신경을 썼고, 동시에 삼청교육대와 같은 무도한 일 또한 끊임없이 시도했던 것이다.
  공존하기 어려운 상반된 특성을 동시에 내보이는 이런 인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키워드는 '가벼움'이다. 그의 90년 인생을 뒤쫓다 보면, 전두환의 내면에 어떤 막이 존재했으리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내면의 일정 깊이 이하로 내려갈 수 없도록 만드는 단단한 막이 존재해, 그 내면의 소유자가 언제나 의식의 표면과 그 언저리에서만 맴돌게 했으리라는 상상을. 이 막의 기능으로, 특정 사건과 마주쳤을 때 전두환은 그 사건을 깊이 파고들지 않을 수 있었다. 핵심을 파고들어가 진상과 대면하며 괴로워하는 대신, 현상에 표면에 머물다가 내상을 입기 전에 철수할 수 있었다.
  (...)
  보통 사람이라면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당기는 묵직한 덩어리 때문에 차마 하지 못할 일을 부담 없이 저지르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의 모든 것을 긍정하며 화통하게 웃을 수 있었던 그의 특별한 기질은, 그의 인생에 양날의 칼로 작동했다. 앞으로도 살펴보겠지만, 그는 상대가 '내 호의를 반기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고 누구에게든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고, 화끈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며, 그 덕에 소속된 조직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
  그러니 이렇게 말해두기로 하자.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던 그의 인생 전반기의 세속적 영광, 정통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냈던 대통령 재임 기간의 모순적인 상황, 사과하지 않은 채 끊없이 국민에게 지탄받았던 33년간의 길고 기나긴 몰락은 모두 그의 일정한 기질에서 연유했다고. 전두환의 생애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은 그 특별한 가벼움이라고. (99~101쪽.)

 

  (...) 5공화국은 근대국가가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인 '국민의 동의'를 결여하고 있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통금을 해제하고, 컬러TV를 보급했으며, 프로야구를 창단했다. 해외여행 자유화도 실시했다. '자유'롭게 보일 만한 조치들을 선심 쓰듯 뭉텅이로 나누어 주었다. 그것은 국민의동의를 얻지 않고 권좌에 오른 리더가 허용할 수 있는 자유의 최대치였다.
  5공화국을 살았던 국민이 만끽했던 것은 어떠한 자유였는가? 배도픔에 포박된 상태로부터의 자유였다. 두둑해진 지갑을 들고 밤새 돌아다니며 유흥을 즐길 자유였다. 색채로 가득 찬 자국적인 스크린과 브라운관 화면을 보고, 외국에 나가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낯선 공간의 공기와 음식을 맛볼 자유였다. 한 마디로, '몸' 혹은 '감각'과 관련된 자유였다.
  (...)
  그러나 허용된 자유는 정확히 그 선까지였다. 감각에서 뇌로 넘어가고, 뇌에서 조금 더 고차원적인 자유를 요구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차단막이 내려와 자유의 공기가 차단되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가진 자원을 배분하는 데 의견을 낼 자유, 공동체를 대표할 사람을 뽑을 자유, 공동체가 가진 문제점에 대해 발언할 자유는, 눈에 보이지만 손댈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
  (...)
  요약하자면 1980년대는 물질적 풍요로움과 감각적 자유가 넘치던 시절, 경제적 성과와 제한된 자유라는 두 요소를 통해 독재자가 제 존속을 추구했던 시절이었다. 80년대 이전까지 부분적 혹은 암묵적으로 횡행하던 폭려고가 독단이 노골적으로 형태를 드러냈고, 그 노골성이 국민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저항과 각성을 자극해 양 극단의 힘이 수면 위로 떠올라 치열하게 격전을 벌이도록 추동한 모순과 격정의 시절이었다.
  (...)
  2023년 현재, 우리에게 당연한 일상으로 자리 잡은 개인주의와 감각적 자유는 모두 1980년대에 싹을 틔워 성장한 것이고, 이 싹을 틔운 양대 공신은 독재자의 의지(부분적인 자유를 허용해서라도 재임 기간을 채우리라는)가 낳은 예기치 않은 결과와 온전한 자유를 향한 국민의 간절한 열망이었다. (113~117쪽.)

 

  전두환이 정통성 없는 지도자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입은 손해에는 민생과 치안에 관한 것도 있었다. 과거 미국은 범죄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피하는 우리나라 국민의 숫자가 가장 많은 나라였다. 미국이 한국의 인권 문제 등을 이유로 한미 범죄인인도조약 체결을 해주지 않았기에, 범죄를 저지른 한국 국적 범죄자가 미국으로 도피하면 잡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한국의 인권 문제 등을 이유로 조약을 체결해 주지 않던 미국은 1998년 2월,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범죄인인도조약에 서명하자고 먼저 연락을 해왔고, 그해 6월 김대중이 미국 국빈 방문 때 조약이 체결되었다. 오랜 기간 군부 출신 지도자들이 시스템과 법을 지도자 개인의 정적 제거에 이용하는 바람에, 대한민국은 국민의 돈을 갈취하거나 신체에 위해를 가한 이들이 외국으로 도피하는데도 검찰과 경찰이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158~159쪽.)

 

  퇴임 뒤 전두환은 집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현금이 든 봉투를 건넸다. 백만 원에서 천만 원 단위까지, 사람에 따라 다른 액수가 든 봉투를 건넸다고 한다. (...) 때론 '통 크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는 호평을 받게 만든 전두환의 이런 행위에는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 집대성되어 있는 듯한 상징성이 있다.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돈을 건넸다니.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오지 않는가. 돈을 주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어린아이가, 훔친 돈을 집 안에 몰래 숨겨놓고 만나는 사람마다 뭉텅이로 건넨 격인 것이다. '돈'은 타인의 시간과 노력, 자유를 수여자의 의지에 복속시킬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물건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돈을 주고받는 행위에 섬세하게 대처한다.
  (...)
  그러나 우리의 전직 대통령, '전두환'이라 불리는 이 무지막지한 사내에게는 그런 '마음'이나 '감성'이 없었다. 그는 그저 '돈'이라는 힘센 물건을 건넴으로써 사람들에게 지지받고, 그로 인해 제 안위를 지켜나가겠다는 단순한 열망에만 집중했다. 글자 그대로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샀던' 것이다. (159~160쪽.)

 

  (...) 자신과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가까운 이들에게는 지극정성을 다했지만, 얼굴을 본 적이 없는 타인에게는 공감하거나 연민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전두환이 자신과 관련된 이들에게 아낌없이 베풀며 잘해주었던 정도는 자신과 관련 없는 이들에 대해 보였던 무관심과 무지, 잔인함과 정확히 반비례한다. 근본적으로, 자신과 가까운 이들에게 공감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무관심한 것은 '인간'이라는 종에 보편적으로 내재된 성향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극단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성향이 강했다.
  (...)
  이런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보통 사람이 아니고 '지도자'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
  이 문제는 상상력의 차원에서 답을 찾으면 한결 이해하기 수월해진다. 전두환은 상상력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 그래서 내가 잘해주면 결국 그 결과가 내게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닌 '진정한' 타인을, 얼굴 한번 본적 없는 낯선 생명체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인지하고 그의 희로애락을 떠올려 공명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
  그러면 이제 이런 질문을 던질 차례다. 유난히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만 충실한 사람들, 생면부지의 타인에겐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거나 무자비힌 사람들은 왜 그런 성향을 띠게 되는 것일까. (...) 나는 그 원인을 후천적인 요인인 '자기 성찰'의 습관에서 찾으려 한다. 이는 (...) 전두환의 성격적 특성, 즉 특정 사건의 발생 요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 성향과 연결된다.
  낙천적이고 강인하며 시작한 일을 결기 있게 밀고 나가는 특성은 인간으로서 갖추면 좋은, 바람직한 특성이다. (...) 그러나 그런 특성이 그 사람이 가진 유일한 특성이자 기질이 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람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제 과오를 돌아보고 반성해야 향후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게 되는데, 돌아보고 잘못을 성찰해야 하는 순간에조차 '난 잘한 거야!' '괜히 기죽을 필요 없어!'라고 외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 사람은 이후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부끄러움을 통해 나의 유한함과 타인의 유한함을 나란히 놓고 연대감을 느끼는 인간종 특유의 특별한 화학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유한함을 직시한 사람만이 타인의 유한함을 알아보고 연민할 수 있는데, 자신의 결함과 마주 서서 정면으로 대결한 적이 없는 사람은 관성적으로, 그저 내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주게 되는 것이다. (170~172쪽.)

 

  대개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나'를 못 본 척하고 그건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와 만나야 한다. 정면으로 마주 서 그것이 나를 이루는 수만 개의 자아 중 하나임을 인정하고, 그런 '나'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래야 나의 다른 자아들과 그 자아들이 행한 일들을 이해할 수 있다. 내 일부 자아의 잘못을 인정하고 성찰해야 '나'라는 복합적인 생명체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이 과정을 잘 해낸 사람이, 타인과도 잘 만난다. 나의 못남을 직시하고 손으로 주물럭거려 본 사람만이, 못난 타인을 포용할 수 있다. 적대시하거나 악마화하지 않고 '결함이 있지만 그래도 존엄한 한 명의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전두환은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제 몸 바깥에 있는 수많은 사물, 사람, 환경과 접하고 교류했지만, 제 몸 안쪽에 있는 자신의 영혼과는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다. 자신과 만나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자기 내면 깊숙한 곳으로 침잠해 들어가야 하는데, 그가 가진 특유의 '가벼움'은 그런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수많은 자아 중 비교적 심각한 자아가 내면의 상층에서 일정 부분 내려갈라치면 중간에 쳐진 거대한 막에 부딪혀 다시 올라오기 일쑤였고, 그럴 때면 내면의 상층부에 감돌던 '가벼움'이 그의 '비교적 심각한 자아'를 붙잡아 '쓸데없는 생각 집어치우고 어서 앞으로 달려가라'고 다그쳤다. (174~175쪽.)

 

  전두환이 퇴임 후 맞게 될 상황은 그런 것이었다. (...) 피 묻은 손으로 권좌를 훔친 육군 소장이 평화로운 외양으로 권좌에서 내려왔을 때 우리 사회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의 문제도 완전한 백지상태에 놓여 있었다.
  (...) 1987년 6월, 들불처럼 일었던 민주화 항쟁의 여파로 대한민국 사회가 합의한 것은 주로 권력 교체에 관한 것이었고,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는다는 한 가지 규칙을 성립시킨 것 외의 다른 사안들은 손대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 심지어 국가원로자문회의에 관한 법조차 존속시킨 채, 여차하면 손에 피를 묻힐 준비가 되어 있는 서슬 퍼런 무인 대통령을 일단 자리에서 내려가게 하는 데 급급했다.
  그러니 전두환의 퇴임 이후에 펼쳐진 상황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주춧돌을 놓았지만 나머지 영역들은 애매하게 기득권과 관례의 영역에 고스란히 놓인 채 변화를 기다리고 있는 무정형의 상태, 박정희 사후 상황과 비교하면 '절반의 제헌 상황'이라 정의할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 상황의 한가운데에 시뻘겋게 도사리고 있는 것이 내란을 일으켜 최고 권력자 자리를 꿰찬 '전임 대통령'의 처리 문제였으며,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그 문제에 대해 당면한 정치적 사오항에 의해 즉흥적으로 대처하며 33년의 세월을 흘려보내다가 그 전임 대통령이 자유로운 상태로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장면과 맞닥뜨리게 된다.
  (...) 이 문제 인물이 놓인 맥락은 아마도, 유산상속을 두고 펼쳐지는 자식들의 싸움과 동일선상에 놓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많은 재산을 소유했던 부모가 유명을 달리하면, 자식들 사이에 유산분할에 대한 분쟁이 벌어진다. (...)
  이는 부모가 소유했던 부가 근본적으로 부모 자신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자식들은 재산 형성에 특별히 기여한 바가 없는데도 그저 핏줄이라는 이유로 재산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불로소득의 전형인 그 유산을 어떤 성별을 가진 몇 번째 자식이 얼마만큼 받는 게 정당한지를 가려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 본래의 정당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규칙과 제한요건이 없었기에, 어떤 결정이 나도 구성원 모두가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전두환이라는 인물의 퇴임 후 33년이 이와 같았다. 형법상 가장 큰 범죄를 저질렀기에 당연히 법정 최고형을 받아야 했지만, 그는 이미 8년 동안 한 국가의 최고 결정권자로 군림하며 곳곳에 제 세력을 형성해 놓았던 터였다. 그 때문에 대한민국 사회가 그를 최고형을 받도록 하기가 어려웠고, 받게 한다 해도 그대로 형을 다 살게 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204~207쪽.)

 

  탁월한 식견과 현실에서 사람들을 모아내는 저력이 있었던 정치인 김대중은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장면을 연출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현직 대통령이던 김영삼을 설득해 전두환을 특별사면하도록 한 것이다.
  (...)
  김대중이 그런 선택을 한 근본적인 원인은 1987년의 야권 대선 후보 단일화 실패에서 찾아야 한다. 국민이 피를 흘려가며 획득한 값진 열매인 직선제에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각자 따로 임했다는 것은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거물 정치인이 저지른 씻을 수 없는 원죄였다.
  이후 두 사람은 이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
  김대중의 정치 역정에서 과오로 기록될 만한 일들은 대부분 '1987년 단일화 실패' 이후에 일어났다. (...) 김영삼과 단일화를 이루지 않았던 한순간의 선택이, 이후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그동안 비판해 왔던 편법을 사용하도록 추동하는 강력한 불씨가 된 것이다.
  (...) 두 명의 독재자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빨갱이' 이미지나 '독한 사람'이라는 평판, '전라도만 편애하는 지역주의자'라는 편견이 두터운 막으로 둘러싸 그의 운신의 폭을 좁혔다.
  (...)
  바로 이 '지역주의자 이미지'가, 김대중이 전두환 사면을 선택하게 만든 두 번째 요인이다. 오랜 기간 지역주의자라는 선입견에 시달려온 김대중에게 전두환을 사면하는 행위는 커다란 반전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정적을 용서하고 그 용서를 통해 지역 간 화합을 추구하는 정치인. 그에게는 오랜 기간 쌓여온 강성 이미지를 뒤집을 드라마틱한 장면이 절실했고, 전두환 사면은 그에 딱 맞는 구도를 제공할 것이었다.
  세 번째 요인은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인격적 성숙이다. (...)
  김대중은 (...) 엄청난 강도의 시련을 연이어 겪으면서 그에게는 기존의 자신을 뛰어넘을 인격적 성숙의 기회가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전두환이라는 무지막지한 어린아이를 진심으로 용서하게 되었을 것이다. 강인한 외피를 두른 악인의 내부에 웅크린 작고 쭈글쭈글한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도량을 갖게 된 자는 더 이상 상대를 미워할 수 없게 되는 법이므로.
  네 번째 요인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이해득실이다. (...) 오랜 기간 집권의 꿈을 키워온 김대중은 "영·호남의 해묵은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지름길은 전·노 사면을 통해 5·18 민중항쟁 문제를 깔끔하게 매듭짓는 것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은 모두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 의지를 내비쳤다. 득표를 위해, 혹은 당선 뒤 국정 운영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천편일률적인 선심성 공약을 내걸었던 것이다. (254~258쪽.)

 

  만일 '한국 정치판'이라는 게임을 설계한 프로그래머가 있다면, 그는 전두환이라는 플레이어를 고안할 때부터 노무현이라는 플레이어의 밑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전두환과 노무현은 양극단을 데칼코마니의 대칭으로 뽑아낸 것처럼 정확하게 반대되는 인물들이었다.
  기득권 세력과 적극적으로 영합하고 권력 유지를 위해 국가가 보유한 폭력을 행사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전두환은 표면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물질적인 세계를 중시했다. 그동안 해온 관례라는 이유로 행해지는 부당한 모든 일에 반기를 들고 거대한 기득권의 카르텔을 깨는 데 전력을 기울였던 노무현은 물질너머에 놓인 세계,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정신'의 세계를 중시했다. 전두환이 물질적 풍요로 정신을 다스리고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노무현은 정신적인 세계를 온전히 바로잡아야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물질적 풍요를 이루어내리라 믿었다.
  (...)
  전두환과 노무현은 '자기성찰'이라는 프리즘을 투과했을 때 극과 극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전두환이 내면 깊은 곳의 자신과 대면하지 못한 채 자꾸만 외부 세계로만 나가려 했던 무지한 리더였다면, 노무현은 자신을 지나치게 들여다보았던, 그래서 외부 세계를 입체적으로 통찰하고 냉철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불운한 리더였다. 전두환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논리(힘의 논리)를 순수하게 내면화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에도 그 논리에 머물며 힘으로 세상을 변화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에도 그 논리에 머물며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려 했듯, 인권변호사이자 민주화 운동가였던 노무현도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원래 속했던 집단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저항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다.
  (...)
  노무현은 모든 문제의 출발점을 자신에게서 찾으려 했던 인물이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자신과 외부 환경을 나란히 놓고 저울질하며 입체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균형감 있게 자신과 외부 요인을 같이 들여다보며 자신이 선 자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 과한 자기성찰은 '나만 바뀌면 다 된다'는 착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제를 자기 자신에게서만 찾기에, 자신만 바뀌면 다 해결될 거라고 믿게 된다. 달리 말하면,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종종, 현실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방안을 내놓은 뒤, 그에 동의하지 않은 이들을 옳지 못하다고 몰아세우며 홀로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한다. (266~269쪽.)

 

  반성 없이 살다 간 전두환의 33년이 남긴 후과는 그러나 후손에게만 돌아간 것이 아니다. 임기를 무사히 마친 전두환이 반성하지 않은 채 삼십여 년을 살다 갔기에, 국가 공동체 곳곳에 그의 흔적이 강력하게 남았다. 그의 흔적은 구성원 각자가 저질렀을 잘못을 덮어서 보이지 않게 만드는 거대한 검은 천이 되었다. 범죄자가 받아 마땅한 죄과를 받았다면 걷혀서 사라졌을 검은 천이 사회 전체에 묵직하게 드리워져, 신군부에 가담했던 이들이 여전히 누리고 있는 물질적·사회적 혜택을 찾아내고 회수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물론, 반대편에서도 부작용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정치에는 선악의 문제와 능력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섞여 소용돌이치게 마련인데, 한쪽 진영에서는 선악을 따지며 윤리의 잣대만 들이대고, 한쪽 진영에서는 유능·무능을 논하며 성과의 잣대만 들이대는, 그리하여 제가 속한 진영을 옹호하는 데 핏대를 올리는 행태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도록 만들었다. 제대로 단죄되지 않은 악은 결국 사회에 유령처럼 맴돌며 양극단에서 강력한 흑백논리가 먹히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쓸쓸한 예시들이다.
  전두환이 자신에게, 후손들에게, 국가 공동체 전체에게 끼친 세 가지 불행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단여코 마지막 요소, 국가 공동체 전체에게 끼친 영향이다. 뉘우치지 않고 간 거악(巨惡)의 존재 때문에 우리 사회는 상황을 있었던 그대로 들여다보고 정확하고도 면밀하게 각각에 대한 책임을 묻는 법, 과거와 현재를 구분해 과거를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나갈 토대로 삼을 수 있게끔 방향을 설정하는 법, 이상과 현실 간의 간극을 파악하고 현실에 적합한 선에서 이상을 지혜롭게 실현하는 법, 누군가를 '절대 악'으로 설정해 희생양으로 삼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냉정하게 사태를 직시하는 법과 같은,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로 가기 위해 반드시 보유해야 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313~314쪽.)

 

  전두환을 그리워하고 낭만화하는 이들의 심리는 이러한 사회적·문화적 상황 변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먹고살 길을 도모하며 1인분의 책임을 해내기도 벅찬 시절을 사는 원자화된 개인들이, 표면에 맺히는 현상들을 비교하며, 지나가 버린 시절의 향기를 그 시절의 지도자였던 한 인물에게서 기원한 것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피상적인 감정은 그 시절의 사회상과 전두환이라는 개인에 대해 총체적이고 복합적으로 이해할 기회가 없는 이들에게서 주로 피어난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잡혀 들어가 뼈가 으스러지도록 고문받거나 아무도 모르는 새에 죽임을 당할 수 잇는 체제에서 벗어난 것은 커다란 진전이다. 야만 세계에서 문명 세계로 건너온 것과 같은 확연한 진보이고 축복이다. 당연히, 그 시절로 되돌아가 전두환과 같은 무도한 리더를 다시 맞아들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시대의 흐름상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그 이후에 우리가 맞은 시대는, 아직 민주주의에 포함되어야 할 다양한 요소들이 채워지지 않은 채 물질 만능주의와 승자 독식주의가 횡행하는 황량함으로 가득 차 있다. 아직 갈 길이 먼 것이다.
  사회가 치밀하게 설계한 교육과 정책을 통해 가까운 시절의 역사, 즉 근·현대사에 대한 체계적이고 정교한 설명과 지향점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또한 지금 우리가 통과 중인 시대의 명과 암이 무엇인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사람을 천장에 매달아 '통닭구이'를 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시절의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현상은 갈수록 증폭되며 변종을 낳을 것이다. (336~337쪽.)

 

  확실한 것은 전우원이 목소리를 냄으로써 한국 사회라는 거대한 강에 새로운 미생물이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가 그가 내디딘 어려운 발걸음을 뒷받침해 줄지는 미지수다. 혹자는 전우원에게는 사과할 자격이 없으며, 사과해야 할 사람은 당사자인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전우원의 행보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다. (...)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전우원의 고백은 그것과 조금 다른 문제다. 시스템과 법치로써 전우원의 행보를 뒷받침하는 것, 그렇게 해서 남은 신군부 세력이 죗값을 받게 만드는 것은 당연히,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전두환 손자의 행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전두환의 눈을 한 청년이 광주로 가 무릎을 꿇는 순간, 5·18로 자식을 잃은 유족이 그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순간, 한국 사회에는 새로운 미생물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전우원은 범죄, 나태함, 이기심, 미움, 적대감이라는 미생물로 가득 차 있던 강에 새로운 미생물을 방생했다.
  (...)
  사회를 강에, 그 안에 사는 우리를 물고기에 비유한다면, 이제 우리가 사는 강에는 새로운 성분이 들어왔다. 강물에 사는 물고기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강물을 먹지 않을 수 없는 법, 전우원을 제외한 전두환을 다른 모든 후손들(수천억대 자산가가 된 전두환의 측근과 그 측근의 후손들을 포함해서)은 전우원이 풀어놓은 이 새로운 성분이 담긴 물을 마시게 될 것이다. 분량의 차이는 있겠지만 극소량이나마 마시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들이켠 물이 그들의 몸속 성분을 바꿔놓을 것이다. 전우원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펼치든, 그가 내디딘 첫 발걸음의 의미는 변치 않을 것이다. 한번 풀린 미생물은 영원히 퍼지며 대한민국에 번식할 것이므로. (347~348쪽.)

 

  공동체 구성원이 다 같이 지켜가겠다고 합의해 일정한 '선'을 만들고 그 선을 지켜나가는 것은 '근대화'에 포함된 여러 요소 중 가장 정신적이고 고급스러운 요소이다. (...)
  1979년 박정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한반도 남쪽 영토에 실현돼 있던 근대화에는 이러한 종류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갑작스레 외국에서 유래한 정치·경제 제대롤 이식해 심어야 했던 한반도 남쪽 구역의 거주민들은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합의한 '선'을 지키기보다, 최고 지도자인 한 개인의 변덕스러운 인격에 충성을 바치며 그 대가로 개개인의 기본적인 '자유'를 지켜내기 바빴다.
  전두환이라는 뱃심 좋은 야심가가 등장했을 때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합의된 '선'을 지키는 데 충실했다면,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우리 역사에 11·12대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쿠데타 발발 소식을 들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이 미군 벙커로 도망가는 대신 자리를 지키고, 대통령 최규하가 육군참모총장 체포 재가 서류에 대한 승인을 끝까지 거부하고, 수경사령관 장태완과 특전사령관 정병주가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군을 진압했다면, 쿠데타는 단번에 진압되었을 것이다. 전두환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승화와 수경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
  (...) 군 내에서 서열을 다투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전두환이 아무리 똑똑하고 배포가 컸다 해도, 고위 지휘관인 이들이 직책상 아래인 대대장·연대장들을 잘 관리하고 조직 관리에 만전을 기했다면, 사전에 쿠데타 계획을 눈치채고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두환이 군 수뇌부를 체포하는 하극상을 벌였을 때, 수경사령관 장태완과 특정사령관 정병주의 '바른' 명령에 목숨을 걸고 따른 대대장이나 연대장은 한 명도 없었다. 전두환의 '바르지 않은' 명령에 목숨을 걸고 따른 이들의 수와 면모에 비교하면, 이 세 장성의 '조직장악능력'과 평소 업무 파악 정도에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퇴임 후 33년 동안 전두환은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는 왜 그를 무릎 꿇게 하지 못했는가? 이에 대한 답도 같은 지점에서 나온다. 전두환이라는 명확한 '악'을 단죄하는 일에, 누구도 사익(私益)을 희생하며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
  (...) 정치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전두환 처벌을 제 정치적 손익에 따라 이용했고, 국회는 전두환에 대한 당시 행정부 수반의 '이용 의지'에 따라 법을 만들거나 만들지 않았으며, 검사 역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불기소처분을 했다가 몇 개월 뒤 행정부 수반의 의지를 따라 다시 기소를 단행하는 촌극을 벌였다. 한국 사회의 결정권을 쥔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의지를 갖고 전두환을 단죄하려 하지 않았다. (...) 군인이 자국 국민을 학살하는 참극이 벌어지게 만든 희대의 무법자가 제대로 단죄받지 않고 남은 생을 풍요롭게 보내다 이승을 하직하는 광경은 이렇듯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소중하게 지켜가는 '일정 선'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데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356~359쪽.)

 

교정. 초판 2쇄

28쪽 밑에서 8줄 : 철삭 -> 절삭

202쪽 5줄 : 집권 기 간 -> 집권 기간

227쪽 6줄 : 포석 -> 포섭

255쪽 밑에서 10줄 : 이들은 -> 일들은

274쪽 8줄 : 팀 이지 -> 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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