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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발견 (타라 웨스트오버, 열린책들, 2020.)

Dog君 2023. 9. 10. 21:03

 

  '배운다educated'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지식을 많이 외우는 것일까요, 아니면 몰랐던 공식을 배우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 같은 범인凡人에게는 배움에 대한 진지하고 객관적인 접근... 뭐 그런게 애시당초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초중고 12년 내내 재미없는 것만 꾸역꾸역 배우다 지쳐 버렸거든요. 그러니 우리에게 배움이란 곧 트라우마...

 

  이 책의 저자인 타라 웨스트오버의 이야기는 꽤 놀랍습니다. 세상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아버지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저자는 조현병 때문일 거라고 의심합니다) 정규교육은커녕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았고, 큰 외상을 입어도 민간요법에나 의지했으며, 극단적인 종교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던 저자의 어릴적 이야기는, 이게 불과 20여년 전의 일이 맞나 맞나 싶습니다. 그러다 그는 우연히 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대학과 교환학생, 대학원생을 거쳐 결국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마케팅에서는 그가 역사학 박사학위를, 무려 20대에, 무려 취득했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만 설마 그게 이 책의 핵심은 아니겠죠. 이 책에서 정말 중요한 건 아마도 배움이란 과연 무슨 의미인가 하는 물음이겠죠.

 

  타라 웨스트오버에게 배움이란, 한 발짝 떨어져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도구인 동시에 자기의 삶에서 자기자신이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입니다. 그에게 배움이 없었다면 그는 여전히도 아버지의 폐철 처리장에서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며 다친 상처에는 정체불명의 오일이나 바르는 삶을 살고 있었겠죠. 그의 연구분야가 모르몬교에 대한 지성사적 접근인 것도 결국은 그에게 배움이 자기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기억하겠다고 결심했든지 간에 그 사건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이제 그때를 돌이켜 보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때문이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내가 기록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약해 빠진 껍질 속 어디엔가, 천하무적이라는 허구로 속을 모두 비워내 버린 그 소녀 안 어디엔가 아직 불꽃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두 번째 기록이 첫 번째 기록을 덮을 수는 없었다. 두 일기 모두 보존될 것이다. 나의 기억과 오빠의 기억이 나란히 공존할 것이다. 앞뒤 말을 맞추기 위해 한쪽을 수정하지 않은 것은 대담한 행동이었다. 두 페이지 중 하나를 찢어 내버릴 수도 있었지 않은가.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은 약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행동이다. 나약하지만 그 나약함 안에 힘이 들어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살겠다는 확신. 그날 밤 내가 쓴 단어들 중 가장 강한 단어는 분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의혹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라고 쓴 부분 말이다.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휩쓸리길 거부한 것은 내가 그때까지 한 번도 나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특권이었다. 그때까지의 내 삶은 늘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서술되어져 왔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강하고, 단호하고, 절대적이었다. 내 목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만큼 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311~312쪽.)

 

  책의 후반부에 가면 어떤 계기로 인해 가족에게 돌아갈 강력한 유인동기(혹은 핑계)가 생깁니다. 하지만 저자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가족에게 돌아가는 대신 저자 스스로 문을 열어젖힌 새로운 세계, 배움의educated 세계에 남는 것을 택합니다. 저자는 배움 덕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다만 이러한 잔잔한 감동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저에게는 이 이야기가 썩 좋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전형적인 미국 사회의 성공 스토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정 폭력과 가부장제에 시달리던 한 아이가 우여곡절 끝에 제도권으로 들어오고 주변(과 사회)의 도움으로 주류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이야기니까요. 얼마 전에 '서울리뷰오브북스'의 독후감에서 인용했던, '아주 잘 쓰인' 책의 전형이죠. 이 책에 대한 저의 불만(혹은 냉소)은 그 부분을 인용하면 충분히 표현될 것 같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책은 어느 정도 사회적 성취를 이룬 중년 세대가 특히 좋아한다. 자신의 삶을 신화로 만드는 힘이 있다. 유년기의 어려움을 겪은 주인공이 뜻밖의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모험을 겪으며 수많은 역경을 물리친다. 종종 인간적 실수도 저지르지만, 후회하며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비로소 삶의 행복과 영적 성취를 이루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평화로운 시대를 만든다. 노래방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를 부르며.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호메로스(Homer)의 『오디세이아』에서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의 〈인터스텔라〉에 이르기까지 반복된 플롯이다. 만약 작가를 꿈꾸고 있다면, 그래서 대중적인 빅히스토리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면, 이 도식을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 수천 년간 반복적으로 흥행이 보장된 '잘 만들어진' 구성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사실 『오디세이아』의 인류학적 변주인데, 이에 더해 인지혁명과 행복, 자본주의와 과학혁명 등 새로운 세대에 알맞은 에피소드를 더하며 크게 성공한 대중서다. 아귀가 딱딱 맞도록 수많은 이야기를 잘 전개해 낸, '아주 잘 쓰인' 책이다. (박한선, 「아주 잘 쓰인, 그러나 '생각'해야 할 - 『사피엔스』」,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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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에 등장하는 목소리들은 엄마가 내 생일을 확실히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항상 기다리라고 하고, 상관에게 전화를 넘기곤 했다. 그들은 마치 내가 태어난 날을 정확히 모르면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받으려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생일을 모르면 사람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내 출생 신고를 하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만 해도 생일을 정확히 모른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9월 말쯤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매년 적당한 날짜를 생일로 골랐다. 생일날을 교회에서 보내는 건 재미가 없었기 때문에 늘 일요일이 아닌 날을 고르곤 했다. 가끔은 엄마가 내게 전화를 바꿔 주면 내가 직접 설명할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도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생일이 있어요.〉 나는 전화 속의 목소리에게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내 생일은 해마다 바뀐다는 것만 달라요. 아저씨는 생일을 바꾸고 싶지 않으세요?〉 (45~46쪽.)

 

  아버지의 이런 면을 그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그 후로는 내가 노래를 할 때마다 여러 번 보게 되었다. 폐철 처리장에서 아무리 오래 일을 한 후라도 아버지는 내 노래를 듣기 위해서라면 계곡 건너까지 운전을 해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파파 제이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아무리 미운 감정이 커도, 그 사람들이 내 노래를 칭찬하면 〈네, 주님의 은총을 받은 것이지요.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고 말하며 일루미나티와의 전투를 잠시 접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노래를 할 때면 아버지는 세상이 무서운 곳이고, 나를 부패시키는 곳이며, 내게 안전한 곳은 집뿐이라는 사실을 잊는 듯했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다.

  근처 도시에 있는 극장에서 뮤지컬 「애니」를 기획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감독이 내 목소리를 들으면 내게 주연 역할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내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충고했다. 연습을 하기 위해 일주일에 네 번씩 20킬로미터나 운전을 해서 다닐 여유가 없고,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는 내가 혼자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하고 시간을 보내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래도 나는 노래들이 좋아서 그냥 연습을 했다. 어느 날 저녁 내가 방에서 「내일을 해가 뜰 거야」라는 노래를 연습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저녁 식사를 하러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조용히 미트로프를 씹으면서 내 노래를 들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아버지가 엄마에게 말했다. 「내가 돈은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 타라를 오디션에 데리고 가봐.」 (138~139쪽.)

 

  나는 이 강의를 듣기 위해 구입한 그림책을 펴서 그 이미지를 더 자세히 살펴봤다. 사진 밑에 이탤릭체로 뭐라고 씌어 있었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른 단어들을 모두 집어삼켜 버리는 블랙홀 단어가 떡 한중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질문하는 것을 본 게 기억나서 손을 들었다.

  교수가 나를 부르자 나는 그 문장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블랙홀 단어에 이르자 나는 읽던 것을 멈추고 말했다. 「이 단어를 모르겠어요. 무슨 뜻이에요?」

  침묵이 흘렀다. 수군거림도, 부스럭거림도 없는 완벽한, 거의 폭력적이다시피 한 침묵이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도, 연필을 사각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교수가 입에 힘을 꽉 줬다. 「질문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하던 강의로 돌아갔다.

  그 강의의 나머지 시간 동안 나는 거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 신발만 내려다보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눈을 들 때마다 내가 무슨 괴물이나 되는 것처럼 나를 노려보는 누군가의 눈과 마주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나는 괴물이었고, 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됐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종이 울리자 바네사는 자기 공책을 가방에 서둘러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잠시 손을 멈추더니 말했다. 「그런 걸 가지고 농담하면 안 돼. 농담할 주제가 아니잖아.」 그리고 그녀는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가버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교실에서 나갈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 코트의 지퍼가 고장 난 척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그러고는 바로 컴퓨터실로 가서 내가 질문한 그 단어를 검색했다. 그 단어는 바로 〈홀로코스트〉였다. (251~252쪽.)

 

  조울증이라는 용어를 처음 들은 것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였다. 심리학 개론 수업 중에 교수가 영사기 스크린에 나열된 조울증 증상을 큰 소리로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우울증, 조증, 편집증, 희열, 과대망상, 피해망상. 나는 절박한 망므으로 교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아버지다.〉 나는 공책에 그렇게 적었다. 〈아버지를 묘사하고 있다.〉 (327쪽.)

 

교정. 초판 19쇄

262쪽 2줄 : 머리를 찌어 댔다 -> 머리를 찧어 댔다

291쪽 밑에서 10줄 : 열쇠도 꼽혀 있는 -> 열쇠도 꽂혀 있는

487쪽 2줄 : 사라 미셸 켈러 -> 사라 미셸 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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