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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의 역사 (한모니까, 돌베개, 20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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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의 역사 (한모니까, 돌베개, 2023.)

Dog君 2024. 3. 26. 09:53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를 물리치고 미궁을 도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리아드네의 실 덕분이었습니다. 미궁 속으로 들어가면서 풀어둔 실타래를 다시 거꾸로 밟아나오면서 미궁을 탈출한 것이지요. 들어간 길을 그대로 복기할 수만 있다면, 제아무리 복잡한 미궁도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모니까의 『DMZ의 역사』는 말 그대로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의 역사를 다룹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영국이 남북 양측의 완충지대를 설정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는 것으로 비무장지대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한국전쟁에서 영국은 일단 확전만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전략적 가치가 낮은 한반도 때문에 굳이 전력을 소모할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오히려 영국의 이해관계는 홍콩이나 동남아에 더 치우쳐 있었죠.)

 

  그렇게 해서 시작된 비무장지대의 역사는, 안타깝게도 한반도의 평화 가능성이 점점 좁아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비무장지대를 관리해야 하고 휴전 상황을 감시해야 할 조직체계는 휴전 후 불과 몇 년 만에 유명무실해졌고, 양측의 완충지대로 구상된 비무장지대는 그 이름과 달리 점점 '무장화'되면서 군사적 긴장으로 가득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 종종 (명절만 되면 비무장지대 장병들 뉴스가 무조건 한 꼭지는 나오죠? ㅋ) 확인하는 비무장지대의 모습은 그러한 수십 년간의 갈등이 만들어온 모습입니다. 양측의 출입이 제한되기에 한편으로는 생태환경이 잘 보존된 곳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군사적 목적에 따라 초목이 통제되고 생태학적 연구가 수행되기도 하는 공간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군사적 행위에 따라 형성된 자연환경을 저자는 '군사 생태(military ecology)'라는 개념으로 정리합니다.)

 

  물론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평화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휴전협정과 그에 따른 후속 협의를 비롯해 1970년대의 7.4 남북공동성명, 그리고 뒤이은 몇 차례의 남북화해무드는 비무장지대를 명실상부하게 비무장화된 지대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익히 짐작하실 수 있는대로) 극한까지 치달은 냉전과, 냉전 이후에도 계속된 관성 때문에 그런 모색들은 그저 가능성에서 그쳤을 뿐입니다. 그러니 'DMZ의 역사'란 결국 한반도 평화 모색이 좌절된 과정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조금은 맥빠지는 결론입니다만 독자를 그렇게 힘빠지게 하는 것이 저자의 목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자가 좀 더 무게를 싣는 것은 '좌절'보다는 '모색'인 것 같거든요. 한반도의 평화 모색이 좌절된 것을 재삼재사 확인하며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색들이 왜 좌절되었고 어떻게 꼬여서 지금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냉정하고 꼼꼼하게 복기하는 것이 저자의 진짜 목표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DMZ의 역사』가 아리아드네의 실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남북관계는 꼬이고 꼬인 끝에 최악으로 치달아서, 라비린토스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 미궁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이르기까지 길바닥에 놓아온 실가닥을 차분히 되밟아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비무장지대라는 미궁으로 들어오는 과정과도 같은 이 책이, 어쩌면 역설적으로 이 미궁을 탈출할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다이달로스의 탈출 이야기하면 반.사.)

 

  '한반도 비무장지대'라는 아이디어가 처음 나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정전회담 때 군사분계선 협상 과정에서 처음 제시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이 군사적 승리를 기대하고 있던 때, 그러나 중국이 개입하면서 전황의 전개를 예측하기 어려워졌을 때였다. 비무장지대에 관한 첫 제안은 군사적 승리를 장담하던 유엔군이나 미국 측 혹은 전세의 역전을 필요로 하던 북한이나 공산 진영이 아니라, 확전을 우려하던 영국에서 나왔다.
  영국은 11월 4일 중국이 참전을 공식화한 후, 확전을 막을 방안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영국 참모위원회와 내각은 한국(Korea) 상황, 중국의 개입, 확전 가능성, 완충지대 설치 등을 논의했다. 먼저, 11월 7일 참모위원회에서 육군참모총장 슬림(William Slim)이 중국이 완충지대 설치를 목적으로 참전했으며, 중국군이 유엔군보다 우세하여 유엔군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적당한 방어선과 협상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 의견은 11월 13일, 참모위원회 회의로 이어졌는데, 슬림은 유엔군이 도달한 '현재의 전선'에서 진격을 중지하고 40도선 정도부터 중국 국경까지의 지역을 완충지대로 남겨두어야 하며, 이 지역에 공산군이 재침략을 위해 집결할 경우 공중폭격으로 이를 분쇄해야 한다고 보았다. 영국 내각도 이러한 인식에 동의했다. 영국 내각은 한국(Korea)의 유럽에서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있었기에, 완충지대안이 미국과 중국의 강경 정책을 중재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했다. 특히 완충지대안이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는 지역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군사 개입을 조기 종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유일한 방법이라 보았다. (48~49쪽.)

 

  하지만, 막상 1950년 10월 이후 유엔군이 북한 지역을 점령했을 때, 유엔은 이승만 정부의 예상과 달리 북한 지역에 대한 한국 정부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프랑스 등의 유엔 내 서방국은 이승만 정부의 주장과 달리 1948년 5·10선거와 유엔 결의안(1948. 12. 12)을 근거로 대한민국 정부의 권한은 북한 지역을 점령해도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통일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미국도 북한 지역에 대한 한국 정부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대신 유엔군사령관의 관할 아래 군정이 실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나아가 북한 지역 총선거 후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단계를 구상하고 있었다. 1950년 10월 12일 유엔 소총회 결의안도 한국 정부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남한 지역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이 승인한 합법 정부이지만, 북한 지역에는 유엔이 승인한 정부가 없으므로, 통합군사령부가 북한 지역에 대한 임시 행정조치를 담당한다는 것이 결의안의 핵심이었다. 이후 북한 점령 지역에는 유엔군사령부의 주도로 북한 현지인을 등용한 군정(軍政, Military Government)이 실시되었다. (73~74쪽.)

 

  또한, 미국은 캔자스 라인이 38선 인근에서는 방어 활용성이 가장 높은 지점이라고 보고 있었다. 캔자스 라인은 서에서 동으로, '임진강 하구-38선 북쪽 10km 지점까지 이어지는 임진강 줄기-화천-화천 저수지 남쪽 경계-동해안 양양 방면 도로'에 이른다. 미국의 판단에 이곳은 임진강 굽이가 제공하는 확실한 방어, 전략적인 삼각지대의 중립화, 동부 지방의 몇몇 천연 장애지대의 활용이라는 세 가지 면에서 뛰어난 군사적 장점을 갖고 있었다. (...) (107쪽.)

 

  엄밀히 말하면, 오울렛 초소 사건은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남북의 언론은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보도했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한 차례 첨예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 거의 전부였다. 양측은 재발 방지를 위한 논의도 약속도 하지 않았고, 군정위 회의를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상대를 비난하는 데만 활용했다. 그리고 사건은 잊혔다.
  (...)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이 명확했기 때문에, 북한이 이 사건을 기억하고 지속적으로 활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유엔사도 자기 구역의 오울렛 초소 혹은 바로 아래에서 자신이 먼저 총격을 시작하여 북한군을 사망에 이르게 한 이 사건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유엔사가 비무장지대 위반의 책임자로 거명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 '판문점 도끼 사건'(1976)으로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Mark Thomas Barrett) 중위가 사망했다는 사실은 지속해서 기억하고 되살렸던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
  대신 1990년대 이후에는 미국 현직 대통령들의 방문으로 오울렛 초소에 이목이 쏠리곤 했다. 이곳은 "자유의 최전선"으로 호명되었다. 미국 대통령들은 군정위 본부 구역의 유엔사 GP이자 군사분계선과 불과 약 50m 거리에 있는 이 초소에 올라서 북쪽을 내려다보며 북한을 압박하고 남북한의 체제를 비교했다. 그들은 자유주의의 우월성과 주한미군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등 끊임없이 냉전을 소환하고, 유지했다.
  (...)
  오울렛 초소 사건은 사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들과 맞닿아 있었다. 비무장지대의 무장화라는 문제가 구조적인 원인이었고, 이는 군정위의 정전협정 후속 합의에서 비롯되었다. 군정위는 군인 경찰을 민정 경찰로 사용할 것과 그들의 무기 휴대에 합의했다. 군사분계선에 인접하여 구축된 양측의 경계초소는 서로의 물리적 거리를 더욱더 가깝게 했고 충돌의 가능성을 높였다. 양측은 정전협정 지도도, 군사분계선 표식물도, 민정 경찰의 휴대 무기 제한 규정도, 군사 시설 구축 불가라는 정전협정 조항도 준수하지 않았다. 더구나 1960년대의 한반도 정세는 비무장지대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있었다. 베트남전에 대한 북한의 지원과 대남 공세,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과 존슨 대통령의 방한 등은 비무장지대 군사충돌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67년 4월 5일 군사분계선 표지판 0109호 부근에서 벌어진 오울렛 초소 사건은 그로 인한 결과였다.
  오울렛 초소 사건 처리는 군사정전위원회와 그 산하 조직인 공동감시소조 등 정전 관리 기구의 한계 등으로 인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군정위는 산하 기구이자 비무장지대를 자유롭게 조사하고 보고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였던 공동감시소조의 조직 및 역할을 정전 직후부터 축소해왔다. 비무장지대 위반사건에 대해서는 북한과 유엔사 양측간 합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데 비해, 비무장 상태를 유지하고 조사할 핵심적인 기구의 축소에 대해서는 합의에 망설임이 없었다. 더구나 어렵게 공동감시소조의 활동이 시행되어도, 보고서는 합의되지 못한 채 두 개로 제출되었다. 양측은 자신들의 논리와 주장을 뒷받침하는 보고서를 각각 작성하고 제출했다. 따라서 군정위는 '대화 창구'로서 사태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사태를 반복하고 악화시키는 역할도 했다. 정전 관리 기구의 이러한 한계는 비무장지대와 한반도의 정전이 '불안정하게' 유지되는 주요한 원인이었다. 1967년 비무장지대 충돌은 결국 1968년 1월 '푸에블로호 사건'이나 '청와대 기습 사건'(1·21사태)과 같은 전쟁 위기 상황으로 치달았다. (268~270쪽.)

 

  1960년대는 비무장지대 자연생태의 형성에 있어 결정적인 시기였다. 비무장지대 군사충돌이 격화되던 때이자, 지뢰 매설과 남방한계선 전체에 대한 철책 구축, 초목 통제 작전 등 대침투체계가 구축되던 때로, 이때 자연의 파괴와 회복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렇게 모순적인 상호작용의 결과가 오늘날 비무장지대의 '경이로운' 자연경관을 이룬 것이다. 이 절에서 논하고자 하는 비무장지대의 군사 생태(military ecology)란, 군사작전이라는 인간의 행위와 자연의 훼손과 회복이라는 상호작용 및 그 결과로 이루어진 생태를 말한다.
  1960년대에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생태학적 관심과 뒤이어 진행된 연구도 순전한 '자연생태' 연구가 아니라 군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비무장지대 인근 남쪽 지역에 대한 생태학적 연구, 전염병의 매개가 되는 조류와 설치류 연구, 초목 통제 실험과 프로그램 시행 등은 각각의 연구 목적이나 미 국방부의 참여 방식에 차이가 있었지만, 모두 미 공군이나 육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생태학적 연구에 대해서는 미 공군의 연구비 지원이 있었고, 조류와 설치류를 통한 전염병 전파 연구와 시야 확보를 위한 초목 통제 프로그램 등은 미 육군이 연구비를 지원하거나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직접 시행하기도 했다. 때문에, 한편으로는 비무장지대 자연의 가치와 보호에 대한 중요성이 논의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작전을 위한 초목 통제가 이루어지면서 자연 훼손이 진행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296~297쪽.)

 

  1970년대에 군사정전위원회에서나 남·북·미 간에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와 평화적 이용에 대한 상호 논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비무장지대의 '무장화'를 통해 현상을 유지하고 억제력을 발휘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 안전하게 생각되었다. 철책은 요새의 전초선 역할을 하게 되어 군사분계선에 더욱 다가갔고, 철책 뒤로는 진지가 구축되어 사실상 군사분계선 양쪽에서 남북의 물리적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군정위에서는 이를 둘러싸고 양측의 설전이 오갔다. 상대를 향한 비난과 자기 과시가 과잉되게 담긴 전단 살포와 확성기 방송을 통한 심리전도 치열해졌다.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와 평화적 이용에 대한 다양한 구상과 제안서는 어딘가의 책장에 들어가버렸다.
  그럼에도 1970년대 초반에 나온 비무장지대 평화 이용 구상의 의미는 절대 작지 않다. 아무도 적극적인 실현 의지를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남·북·미 간에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와 평화 이용에 관한 흥미로운 방안들이 제기되었다. 유엔사가 선구적으로 제시하고, 북한이 일부 호응했으며, 남한은 가장 다양한 교류 방안들을 찾아냈다. 모든 사안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당시 부딪혔던 문제와 한계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지만, 삼자 간에는 비무장지대 평화지대화를 둘러싼 제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비무장지대 평화지대화 방안의 씨앗은 이때 심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410~411쪽.)

 

  대성동과 '기정동' 두 마을을 통한 남북한의 체제 선전과 경쟁은 1950년대 후반, 더 이르게는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북한은 전쟁 과정에서 점령한 38선 이남 지역에서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정전회담장 인근 마을을 '평화리'라고 명명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평화리가 속한 판문·연백·개풍·개성 일대를 '(신)해방지구'라고 명명한 것과 같다. 북한은 이곳에서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면서 민심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는 전후, 북한 전역에서 진행되던 복구사업 및 사회주의로의 전환과 연계되어 더 신속하게 추진되었다.
  대성동이 '자유의 마을'로 개발된 것은 분명 '평화리'의 영향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평화리의 복구 진척에 대비되는 "버림받은 무릉도원"의 상황은 '이상촌' 개발과 민심 안정을 위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대성동을 관리하던 유엔사와 한국 정부는 대성동을 '자유의 마을'이라고 명명하고 공회당과 문화주택을 건립했다. 그러나 이 '쇼윈도'는 효과적이지 않았다.
  1970년대 초, 대성동 새마을사업이 진행되면서, 본격적으로 쇼윈도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대성동 주민이 북한의 "대남선전에 현혹되지 않도록" 반공사상 양양과 애국심 고취를 위한 특수활동이 실시되었고, 대성동에는 북한보다 월등히 앞서가는 남한을 보여주고 "공산주의 제도보다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경관이 조성되었다. 이렇게 '자유의 마을'과 '평화의 마을'을 통한 선전과 경쟁은 서로 닮아갔다. 두 마을을 각각 자기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전시장을 넘어, 대조를 통해 상대가 '어두운', '빈', '허위의' 것인 반면에, '사람들이 흥에 겨워'하는 '진정한' 자유와 낙원은 자기에게 있음을 과시하게 되었다. (493쪽.)

 

  이 책에서 살펴본 비무장지대의 역사는 비무장지대와 한반도의 탈냉전이 어떤 하나의 완결된 제도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다양한 행위자들의 역학관계와 지혜, 실천에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준다. 또한 비무장지대는 강고한 냉전과 분단에 갇혀 있음과 동시에 그곳에 탈냉전에 다다를 수 있는 다양한 길과 시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존의 제도와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던 점을 성찰할 것을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에서 살펴보았듯, 1950년대에 시작된 정전협정과 후속 합의, 1970년대 초에 있었던 7·4남북공동성명, 비무장지대와 한반도의 평화지대화 관련 구상 등을 비롯하여 2010년대까지도 의미 있는 '합의'와 '선언', '약속'이 있었다. 정전협정이 만들어진 후에도 협정의 이행을 둘러싸고 수많은 변화가 있었듯, 평화협정은 체결도 어렵지만, 그것의 이행이 더 중요할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자신감 회복과 실천, 서로를 향한 신뢰가 남았다. (506~507쪽.)

 

교정. 초판 1쇄

116쪽 소제목 : 1953년 → 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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