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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최태성, 다산초당, 20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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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최태성, 다산초당, 2019.)

Dog君 2024. 3. 10. 22:05

 

  연구자 열 중 아홉은 '역사의 쓸모'라는 제목에 위화감을 느낄 겁니다. '역사'와 '쓸모'를 연결시키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쓸모'라는 말은 '시장에서의 가치'라는 의미로 통용되기 마련인데, 역사학을 논할 때 시장가치라는 잣대는 썩 좋은 도구가 아닙니다. 역사학(을 비롯한 기초학문들)이 겪고 있는 작금의 위기가 학문에 대한 시장화 압력에서 시작된 측면도 있거든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역사'와 '쓸모'가 완전히 별개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쓸모도 없는 학문을 왜 공부하냐' 같은 질문에 대한 답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구요.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또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말하지 못하는 학문이라면, 그게 취미생활과 뭐가 다를까요. 대학원 다닐 적에 자조적으로 했던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자들의 지적 유희'라는 말이 그저 농담일 뿐이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역사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저자에게는 이런 고민이 특히 더 절실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 책이 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겠죠. 저 역시도 비슷한 일을 직업의 일부로 삼았기에 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중이고, 또 그래서 이 책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저자에게 역사란 인간의 경험이 축적된 DB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했던가요,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은 틀림없이 역사 속 누군가도 한번쯤은 했던 것이죠. 그러니 과거의 경험은 지금의 내가 더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훌륭한 근거가 됩니다. 게다가 그에 대한 평가까지 쌓여 있으니 어떤 선택이 좋은 선택이 될지도 내다볼 수 있죠.

 

  역사는 열린 생각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과거 모습을 통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거든요. 지금의 현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필연적이어서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던 과거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흡족치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인용하는 역사란 하나같이 과거 상태 그대로 박제된 것이라는 점이 영 불만족스럽습니다. 과거의 특정한 상황을 그대로 떼어와서 지금과 비교하는 것은 그다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흔히들 지금의 젠더 상황을 논할 때 여말선초만 해도 남녀의 지위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들 합니다. 그러니 지금의 젠더 차이도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고 다른 질서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거죠. 하지만 이 논리는 조금만 비틀어도 매우 위험한 논리가 됩니다. 이 말은 여말선초 이후 남녀의 사회적 지위 차이가 점점 벌어졌다는 뜻이 될 수 있고, 그러면 지금의 지위 차이는 역사적으로 타당하고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결과로 설명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말선초의 상황을 똑 떼어다가 지금 우리 앞에 내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보다는 여말선초 이후의 사회적 변화가 어떤 연유로 젠더 간의 사회적 지위 차이로 이어졌는지를 따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어떤 사회적 변화가 왜 젠더 간의 사회적 지위 차이를 벌리는 쪽으로 이어졌는지를 알아야 다시 그 차이를 좁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테니까요. 정리하자면, 젠더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면 과거의 한 '장면'보다는 이후의 '과정'을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저자의, 역사를 '동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에도 훨씬 더 합치되구요.

 

  역사적 인물로부터 영감을 얻는 방식도 약간 불만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회영을 자주 언급합니다.) 예전에 『우리 안의 친일』에서 본 것처럼, 어떤 역사적 인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는 것은 그를 존경하며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그가 성취한 것과 성취하지 못한 것을 따져물으며 앞으로의 내가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양분으로 삼는 것이 더 생산적이고 건강한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한참 불만을 늘어놨습니다만 저는 이 책에 장점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책이 널리 읽히는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훨씬 더 건강하리라고 생각하구요. 그래서 오히려 저는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저 역시도 정제된 글과 다듬어진 편집으로 저 나름의 대답을 내놓아야겠지요.

 

  역사의 실용적인 측면만 너무 강조하는 것 같아 조금은 조심스럽기도 합니다만 역사 연구를 업으로 삼지 않은 일반인에게 역사를 학문적인 관점으로 대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역사의 '쓸모'보다 역사의 '실제'를 강조하는 접근은 역사로부터 대중을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흘러간 가요의 제목처럼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는 거죠. (8쪽.)

 

  역사는 과거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상상해보고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결과만 놓고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아니라 그 속내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헤아리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이해하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139쪽.)

 

  (...) 제게 질문을 던졌던 분이 제 답변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신라의 사례를 참고해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는 걸까요?"로 말문을 열더니 역사에 빗대서 앞으로의 경영 과제에 대해 쭉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혹시 CEO이신가요? 임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저를 통해서 하신 거죠?"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들 빵 터졌습니다. 역시나 제 예상이 맞았던 거지요.
  그분이 강연을 주최한 이유가 뭘까요? 역사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지만, 강연 시간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사장이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그 앞에 서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어떻겠어요? 사장은 소통을 원해서 마련한 자리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냥 지시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학교 조회시간에 듣는 교장선생님 훈화처럼 지루한 잔소리로 들릴 게 뻔합니다. 그래서 역사 강연을 함께 듣는 시간을 준비했던 겁니다. (...)
  (...) 저는 그 회사의 CEO를 보면서 이분이야말로 역사의 쓸모를 잘 알고 활용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159~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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