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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기술관료주의 (빅터 샤우, 빨간소금, 202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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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기술관료주의 (빅터 샤우, 빨간소금, 2024.)

Dog君 2024. 10. 9. 21:17

 

  이 책의 소재인 푸순 탄광은 아시아 최대의 노천 탄광으로 알려진 거대 광산입니다. 2019년 폐광되기까지 푸순 탄광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추동하는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당장 1930년대에 일본 제국이 그토록 만주를 확보하고 싶어했던 이유 중 하나가, 푸순 탄광으로 대표되는 풍부한 지하자원이었다고 하죠. 그런데 그런 욕망이 일본 제국의 것일리는 없습니다. 탄소 에너지를 기반으로 쌓아올린 것이 곧 근대문명이기에 중국 국민당이건 중국 공산당이건, 막대한 양의 탄소 에너지가 제공할 물질적 풍요에 눈독을 들인 것은 매한가지였을 겁니다.

 

  이들 국가는 더 많은 탄소 에너지를 추출하는 것에 국가적 역량을 동원했습니다. 석탄을 중심으로 한 기계화된 대량 추출(채광) 체계와 이를 통해 획득된 막대한 에너지를 이용한 중공업 우선의 산업개발, 이를 통한 무한한 성장의 전망 등, 20세기의 일본과 중국은 석탄 추출을 중심으로 한 체제(레짐)로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저자인 빅터 샤우는 이러한 체제를 '탄소 기술관료주의carbon technocracy'라고 명명하지요.

 

  그러면 이렇게 만들어진 탄소 기술관료주의 장밋빛 비전은 실현되었을까요?

 

  그럴리가요. 일본 제국이 구축한 탄소 기술관료주의 체제에는 식민주의 지배질서가 거의 그대로 관철되었습니다. 수직으로 파내려가는 탄광처럼, 탄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추출 체계 역시 수직적 위계 그대로였습니다. 푸순 탄광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현장인 동시에 인간이 서로를 불평등하게 지배하는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체제가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고도 말합니다. 대량의 에너지를 추출(채광)하기 위해 그만큼 대량의 에너지를 투입해야만 했다거나, 채굴의 기계화가 생산량을 늘리는 동시에 석탄의 순도를 떨어뜨리기도 했다는 등의 지적은 생각만큼 이 체제가 안정적이거나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음을 암시하지요.

 

  결국 20세기 전반 푸순 탄광에서 구현된 탄소 기술관료주의라는 '장밋빛 전망'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근대국가가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공히 공유했던 개발주의적 환상이 기실은 거대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다른 이름일 뿐 아니라 심지어 지속가능한지도 의심스럽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원서의 부제에는 없던 "종말"이라는 표현이 한국어 부제에 새로이 들어간 것도 이런 내용 때문일까요.)

 

  그렇게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온 독자는 우리의 현실 역시 여전히 탄소 기반의 사회임을 눈치채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역사적 통찰은 지금 당장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물질적 풍요를 자랑하는 지금 우리 사회 역시 거대한 불평등에 기반한 것은 아닌지, 이 체제가 대체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 위에 있는지, 과연 지속가능한 체제인지, 하는 질문들 말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네, 제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푸순과 전 세계의 다른 에너지 추출 현장에서 채굴된 석탄은 독특한 사회기술적 제도를 만들어 냈다. 이는 마치 보편적이고 과학적이며 불가피한 근대성의 정점처럼 보였다. 정치 체제로서 그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시기에 푸순을 지배한 일본제국, 중국국민당, 중국공산당은 탄소 자원과 관련해서는 대단히 기술관료주의적(technocratic)인 비전을 공유했다. 곧 국가주의적 목적을 위해 과학과 기술을 총동원해 화석 연료를 쥐어짰다. 더욱이 이러한 비전은 전형적으로 석탄 중심의 개발을 토용하고 중고업 확장에 집중했으며, 민족국가 단위의 경제자립에 집착하고 인간의 노동을 절감하는 기계화에 눈독 들였으며, 값싼 에너지를 선호하고 경제 성장을 석탄 생산과 소비의 증가로 환원했다. 동시에 일본과 중국의 정권들은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수단으로 탄소 에너지를 보면서, 한편으로 연료 부족이 올 수 있다는 두려움과 다른 한편으로 과학기술을 통해 거의 무한한 연료 공급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믿음이 불러일으키는 모순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와 같은 대단히 근대적인 어너지 추출 레짐을 나는 '탄소 기술관료주의(carbon technocracy)'라고 명명한다. (...) (16쪽.)

 

  만주는 동아시아에서 탄소 기술관료주의가 부상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지역의 막대한 석탄 매장량은 중국과 일본의 개발주의적 꿈에 불을 지폈다. 중화민국한테 만주는 무엇보다도 산업화 드라이브에 투입할 석탄과 여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수복해야 할 영토였다. 일본제국에게 만주란 일종의 제국 실험실이었다. 바로 이 공간에서 역사학자 아론 무어(Aaron Stephen Moore)가 말하는 "기술적 상상(technological imaginary)"―서로 다른 집단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이라는 요엉에 부여되었던 여러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와 비전―을 구체화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과학기술 프로젝트가 펼쳐졌다. 과학자, 엔지니어, 산업가, 군부 인사, 그리고 관료 집단은 푸순 탄광에서 일본제국을 위해 노천광과 셰일오일 증류 기술을 포함한 몇몇 획기적인 과학기술상의 진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기술들을 통해 일본제국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움직일 에너지를 더욱 철저하게 쥐어짤 수 있었다. 에너지 추출을 둘러싼 이러한 실험적 성과들은 진보라는 국가적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동원한 수단 가운데 일부로 계승되었다. 나는 푸순과 만주를 중심으로 석탄 에너지 레짐의 출현 과정을 탐구하면서, 일본이 1949년 이후 중국에서 전면화한 석탄 위주의 산업적 변혁에 중요하게 이바지했음을 강조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과연 이러한 유산이 긍정적이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45~46쪽.)

 

  (...) 뽑아내야 할 광물자원이 존재하는 한, 지구의 깊숙한 내부는 더 이상 죽은 자를 예치하는 공간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53쪽.)

 

  물론 이러한 변화는 푸순에만, 혹은 더욱 일반적으로 화석 연료 추출이라는 맥락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적 광물 채굴의 특징 중 하나는 생산 현장과 그 주변을 대규모로 재편한다는 점이다. 석탄 채굴의 차별성은 이러한 재편 과정에서 물리적 힘과 사회적 힘이 특히 긴밀하게 얽힌다는 데 있다. 탄소 에너지 레짐 아래 산업 사회에 동력을 공급하는 석탄을 캐내기 위해 지하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만철과 다른 여느 지역의 탄광 운영자들은 채굴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사회적 힘의 작동에 크게 의존했다. 푸순에서는 이러한 역학관계가 일본 식민주의 기업과 탄광촌에 거주하며 노동한 중국인 사이에 놓인 위계질서의 축을 따라 펼쳐졌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수직성은 갈등을 일으켰다. 갈등의 해결책 또한 바로 그 수직성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 갈등이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거의 언제나 승자는 만철이었다. 탄소 기술관료주의는 분쟁의 땅 아래로 뿌리를 내렸다. 그 땅은 매우 불평등한 땅이었다. (103~104쪽.)

 

  지상과 지하에서 채굴의 기계화는 푸순이 에너지 추출의 중심지로 전환·확장하는 데 핵심 요소였다. 그러나 이는 그 자체로 상당량의 에너지를 소모함으로써 실현되고 또 유지될 수 있었다. 근대적 기계 설비는 결국 그것을 구동하는 동력과 분리될 수 없었다. (...) 푸순의 첫 번째 발전소는 달랑 두 대의 석탄 기반 500킬로와트급 발전기를 갖춘 채 1908년에 가동을 시작했다. 1915년에 푸순 탄광은 발전소 한 기를 증설했지만, 이 두 번째 발전소는 석탄을 통한 직접 발전이 아닌 몬드 가스―증기로 석탄을 가열하면 연료용 가스가 생산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독일의 화학자 루트비히 몬드(Ludwig Mond)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를 이용한 간접 발전 방식을 채택했다. 이상 두 기의 발전소에 대해 푸순 서부의 다관툰(大官屯)에 세 번째와 네 번째 발전소를 세웠는데, 모두 석탄 화력 발전소였다. 1937년 몬드 가스 발전소는 채굴에 따른 침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폐쇄되었으며, 나머지 화력 발전 시설로 28만 킬로와트의 발전량을 확보했다. 그해 지하 채굴에 쓴 전력은 2억 킬로와트시(kWh)였으며, 그중 60퍼센트 이상이 양수 펌프 설비에 투입되었다. 이는 푸순이라는 공업화한 환경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지 알려주는 지표다. (136~137쪽.)

 

  철학자 앙드레 고르스(André Gorz)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연을 완전히 지배하는 데는 필연적으로 그 지배의 기술들에 의해 인간 또한 지배받는 과정이 수반된다." 일본제국에서 푸순의 노천광이 그토록 찬양받은 이유는 산업 기술을 활용해 광대한 잠재적 자원을 지닌 자연경관을 집중적인 자원 생산 기지로 변모시켰다는 사실 때문이다. 더욱이 이 인공적인 과정이 자연의 힘 자체에 필적할 만한 수준의 규모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자연에 대한 지배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배에는 수만 명의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지배가 동반되었다. 역사학자 티머시 르케인(Timothy LeCain)은 노천 채굴이 지구를 할퀸 상처를 정당하게 비판하면서 이 추출 행위를 "대량 살상"으로 규정했다. (166~167쪽.)

 

  석탄은 연료로 바로 쓰이기도 하지만, 전기와 가스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이 에너지들은 석탄과 마찬가지로 열도의 공업화에 필수적이었다. 일본 최초의 석탄 화력 발전소는 1887년에 가동을 시작했다. 주식회사 도쿄전등(東京電燈)이 소유하고 운영한 이 발전소는 25킬로와트급 일본산 발전기를 갖춘 소박한 시설로서, 수도 도쿄의 백열등에 정기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 뒤 전력 사업의 발전량과 사용량은 차례로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일본은 조명을 밝히는 데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을 누비는 전차를 운행하는 데, 공장의 전기 모터를 구동하는 데, 전기 분해를 통해 구리 등의 금속을 정제하는 전기화학 및 금속공학적 공정을 수행하는 데 막대한 전기를 사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은 석탄 화력 발전보다는 물―'백색 석탄'이라 불렸다―을 이용함으로써 더 많은 전력을 생산하는 데, 최초의 수력 발전소는 1891년에 비와호(琵琶湖)와 제국의 옛 수도 교토 사이를 잇는 막 개통한 운하 위에 설치되었다. 발전 유형별 전력 생산량을 비교해 보면, 1907년 화력 발전량과 수력 발전량이 각각 7만6,000 대 3만8,000킬로와트시, 1912년에는 각각 22만9,0000 대 23만3,000킬로와트시, 1919년에는 각각 42만2,000 대 71만1,000킬로와트시였다. 이러한 추세는 그 뒤로도 수년간 지속되어, 결국 수력 발전량이 화력 발전량을 크게 추월한다. 그럼에도 전력 생산은 계속해서 석탄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계절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주로 겨울에 눈이 녹지 않아 강물의 수위가 충분히 오르지 않거나 간헐적으로 여름에도 수량이 부족해 수력 발전에 지장이 발생할 때, 화력 발전이 부족분을 보충해야 했다. 또한 지리적 문제도 있었다. 일부 지역은 강에서 멀리 떨어지거나 탄광과 인접해 석탄 화력 발전소에 더 많이 의존했다. 1943년은 제국 일본이 가장 많은 전력을 생산한 시기로 기록되었다. 그해의 발전 총량 860만 킬로와스티 가운데 5분의 1 이상을 여전히 화력 발전이 담당했다. (177~178쪽.)

 

  (...) 탄소 에너지 레짐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이렇게 생산의 장소와 소비의 장소 사이의 거리감을 늘리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불편한 사실은 인지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도록 조장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180쪽.)

 

  전쟁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석탄 공급이 줄어들자, 소비 패턴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제국이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었는지 드러낸다. 철강, 화학, 전력 생산을 비롯한 주요 석탄 소비 부문은 1941~1944년에 석탄 사용량을 줄여야 했다. 이 기간에 철도, 기계 제작, 액체 연료 부문만 석탄 소비를 늘릴 수 있었다. 특히 전쟁이 진행될수록 액체 연료가 더욱 귀해졌고, 합성 섬유 생산에 지속해서 석탄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의 효과는 의심스러웠다. (...) (293쪽.)

 

  공산당 정권이 석탄에 기반한 공업화에 집착한 이유는 그들의 미래 비전이 앞선 시기에 등장한 탄소 기술관료주의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당과 국가는 탄소 기술관료주의 체제를 사회주의 실현의 수단으로 여겼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역사학자 모리스 마이스너(Maurice Meisner)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공산당과 국민당은 근대 세계에서 '부와 힘'을 쟁취하겠다는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목표를 공유했다. (...) 그러나 공산당은 국가의 부와 힘을 그 자체로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의 도래라는 최종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패퇴한 국민당 전임자들과 달랐다."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해석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근대 자본주의적 발전을 통해 구축된 물질적 풍요라는 토대 위에 건설되어야 했다. 중국의 문제는 바로 그러한 토대가 결핍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제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혁명을 이끈 정권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바로 소련이 한때 그러한 어려움이 부닥쳤다. 혁명이 일어난 시점에서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던 소련은 그럼에도 자본주의 시장의 메커니즘(mechanisms)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권력의 수완(machinations)을 통해 산업화에 성공했다. 중국 지도자들에게 이는 고무적인 선례였다. 대체로 소련이 택한 "사회주의를 향한 비자본주의적 발전 노선"이란 "급속한 경제 발전, 사회주의 정당의 국가권력 장악, 주요 생산수단의 국유화 등의 요소를 결합한 것"이었다. 더욱이 소련 모델은 전후 재건 과정에서 소련이 거둔 성공 때문에 특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2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은 소련 경제는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었는데, 보통 이는 제4차 5개년 계획에 따라 사회의 전방위적 동원을 통해 가능했다고 설명된다. 중국의 정책결정자들에게는 꽤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는 선례가 존재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거침없이 소련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의 개발주의적 미래 방향성을 설계해 나갔다. (391~392쪽.)

 

  사실 석탄 품질 문제는 사회주의 공업화가 시작된 이래로 국가 정책결정자와 채탄업계 종사자가 모두 염두에 둔 문제였다. 석탄의 품질은 석탄이 연소할 때 얼마나 많은 열 또는 열에너지를 방출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석탄의 품질은 석탄에 회분을 비롯한 여러 불순물이 존재할 때 떨어질 수 있다. 이러한 불순물은 석탄의 형성 과정 자체에서 생성될 수도 있고, 채굴과 운송 과정에서 혼입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석탄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순물은 지하에 묻히기 전에 식물성 물질과 섞이거나, 석탄화 과정에서 나타난 균열 부위로 침전해 들어간 무기 광물들(inorganic minerals)이다. 이때 화학 반응을 거쳐 석탄 내부에 포집될 수 있는 다른 불순물로는 질소와 황을 들 수 있다. 석탄의 채굴과 운송 과정에서 유입되는 불순물로는 질소와 황을 들 수 있다. 석탄의 채굴과 운송 과정에서 유입되는 불순물로는 주로 주변 암석이나 잔해, 심지어 채굴 작업에 이용된 기계나 도구의 파편들이 포함된다.
  (...)
  하지만 석탄의 품질 저하가 단순히 인간의 부주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리어 기술 발전이 초래한 의도치 않은 결과일 수도 있었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 과학기술에 관해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최근 몇 년 동안 사회주의 치하에서 과학기술의 결핍 내지는 실패에 대한 과거의 전제를 뒤집기 시작했다. 여러 연구자는 예컨대, "군중 과학(mass science)"과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보기 낯선 접근법을 통해 중국의 과학기술이 일련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을 입증했다. 그러나 탄광의 기계화는 어쩌면 결핍이나 실패가 아니라, 기술이 지나치게 잘 작동한 것이 문제였던 사례로 볼 수 있다. 석탄공업부는 오랫동안, 기계화를 통해 크게 증산을 달성할 가능성에 천착해 왔다. 기계식 채굴은 실제로 더 많은 양의 석탄을 더 빠르게 생산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동시에, 생산된 석탄에 더 많은 불순물이 섞여 나오게 만들기도 했다. 특히 기계 장비가 장벽식채탄법―수직으로 길쭉한 석탄의 면을 깎기 위해 절단기와 적재기가 결합한 대형 기기를 사용해야 했다―에 접목되었을 때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이 대형 기기의 회전 톱니는 석탄을 깎아 조각낼 뿐만 아니라, 석탄 주변의 다른 암석이나 광물을 파쇄하기도 했다. 이러한 불순물이 석탄 덩어리에 섞여 운반 컨베이어에 실릴 수 있었다. 1952~1956년, 석탄공업부가 관할하는 탄광에 배치된 대형 절단·적재 복합기가 4대에서 88대로 늘어났다. 사회주의 에너지 레짐의 수요를 충당할 수 있도록 생산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기술 개발은 생산이 아닌 다른 영역―열효율이라는 차원―에서 비용을 발생시켰다. (414~417쪽.)

 

  (...) 결국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산업 사회는 지속 불가능한 현재를 위해 과거와 미래를 모두 불사르고 있다. (455쪽.)

 

  (...) 우리가 그들에게 가장 확실하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문제가 있다. 바로 그들이 탄소 에너지 추출을 심화하기 위해 인간의 생명과 안녕을 외면했다는 점이다. 근대적 화석 연료 채굴이란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인 활동으로 볼 수 있는 소지가 크다. 해외 자원을 장악하기 위해 국경 너머로 세력을 팽창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경향이 분명히 확인되지만, 이른바 "내부 식민화(internal colonization)" 작업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정부 관료와 대도시 엘리트가 주도해 미국 남서부 선벨트(sunbelt) 지역 나바호족의 영토에서 석탄 채굴과 에너지 개발 사업을 벌였던 사례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추출 사업들은 무력을 통해 토지를 빼앗기도 했고, 원주민에게 실현되지 못할 번영의 약속을 남발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한 수많은 노동자에게 빈번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무엇보다도 생산을 최우선시한 프레임 속에서 폭력은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규율 수단이었으며, 푸순의 사례가 선명히 보여주듯이 그 자체로 안전이나 지속 가능성보다 생산량을 앞세운 결과였다. 탄광 관리자들은 노동자들을 지배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했다. 또한 파헤쳐진 땅이 가하는 또 다른 폭력에 노동자들을 기꺼이 노출시켰다.
  (...)
  폭력은 또 다른 형태로도 나타났다. (...) 가속화되는 기후 변화와 더불어 환경 폭력(environmental violence)의 파급력이 훨씬 더 광범위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추출 현장이나 도심의 공업 중심지 인근에 거주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이 주로 환경 폭력에 노출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피해가 돌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해수면 상승으로 홍수가 발생했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홍수에 취약한 지역에 거주할 수밖에 없고, 홍수를 견딜 수 없는 값싼 자재로 지은 주택에 살 수밖에 없으며, 홍수가 지나간 뒤로도 생활 환경을 복구할 수단이 거의 없는 취약 집단일 것이다. 권력의 불평등이 근대 화석 연료 경제를 탄생시키고 유지하는 폭력을 가능케 하는 것처럼, 탄소의 대량소비 또한 너무나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해악을 생산한다.
  (각주) 이 대목에서 그리고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나의 분석은 제이슨 무어(Jason Moore)나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 같은 학자들의 분석과 일치하는데, 이들은 기후 위기를 "인류세"라기보다는 "자본세(Capitalocene)"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태도를 취한다. 자본세 개념은 근대 자본주의의 부상과 더불어 화석 연료 사용의 가속화가 진행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또한 어떻게 자본주의적 질서가 일으킨 불평등이 기후 위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한층 더 불평등하게 재생산되는지 조명한다. (...) 내 연구가 무어나 말름과 구별되는 지점은 이토록 환경 파괴적인 자본주의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역사적 역할을 더불어 강조한다는 데 있다. 이 책은 자본세의 핵심에 국가를 위치시켜야 한다는 크리스찬 퍼렌티(Christian Parenti)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 (457~460쪽.)

 

  (각주) (...) 나는 환경 위기의 해결을 전적으로 기술관료주의적 국가의 손에 맡기는 방안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장 메커니즘(국가로부터 독립된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을 통해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에 대해서는 더더욱 회의적이다. 자본(칼로리 개념처럼)은 종종 통약불가능한(incommensurable) 것들 사이에 잘못된 등가성(환경 위기의 경우에는 "상쇄"라는 개념이 활용된다)을 내세우는 근거가 되면서, 동시에 더 많이 축적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멋지게 표현했듯이, "이곳에서 석탄을 태우는 공장 하나가 저곳에서 운영 중인 나무 농장으로 '상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자연'이 대체될 수 있고, 통약가능한 단위들로 굿어되어 있다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이렇게 될 경우, 장소적 특수성, 질적 속성, 저마다 체감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서 무시될 수 있다. (...) 인식론적 추상화를 통해 만들어진 이러한 금융화된 자연(financialized nature) 개념은 그 자체로 자연을 수탈하는 도구가 된다." Fraser and Jaeggi, Capitalism, 100. (462쪽.)

 

  저자는 20세기 초 제국 일본의 만주 침략과 더불어 일본인 기술관료들에 의해 "탄소 기술관료주의"라는 구조가 형성되었으며, 일제 패망 후 만주와 푸순을 뒤이어 차지한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또한 이러한 구조를 비판 없이 답습했다고 주장한다. 샤우에 따르면, 탄소 기술관료주의란 "각종 기계 및 경영관리 수단을 통한 화석 연료의 대규모 활용을 이상화하는 기술정치 체제"를 뜻한다. 더욱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층위에서 탄소 기술관료주의는 석탄 중심의 "에너지 레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본과 중국에서 탄소 기술관료주의가 뿌리내리는 과정은 공교롭게도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과 중첩되었다. 국가는 과학의 힘 및 관료주의적 계획에 대한 맹신과 푸순의 석탄 매장량이 무궁무진하다는 환상을 바탕으로, 최대한 많은 양의 석탄을 최대한 값싸게 채굴해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탄소 기술관료주의는 근대 동아시아의 과학 만능주의, 생산 지상주의, 발전주의와 궤를 함께한다. 저자에게 탄소 기술관료주의와 그 상징인 푸순 탄광은 결코 찬양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수많은 보통 사람의 땀과 피 그리고 환경을 희생시킨 이데올로기였으며, "하늘을 향해 커다란 아가리를 열어젖힌 지상의 괴물"과도 같았다. (이종식, 「옮긴이의 말」, 479~480쪽.)

교정. 1판 1쇄

76쪽 7줄 : 휘발성 -> 휘발분 (꼭 틀렸다는 건 아니고, 원문을 봐야 확실하다. 만약 원문이 'volatile'이라면 문맥상 성질인 '휘발성(性)'보다는 구성성분인 '휘발분(分)'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126쪽 11줄 : 퍼세트 -> 퍼센트

177쪽 8줄 : 1918에 -> 1918년에

229쪽 9줄 : 칼로리 응용(カロリ_應用) -> 칼로리 응용(カロリー應用)

249쪽 각주36번 : Makamura -> Nakamura

347쪽 밑에서 2줄 : 우랄마시(Uralmsh)에서 -> 우랄마시(Uralmash)에서

348쪽 6줄 : 츠출된 -> 차출된

374쪽 9줄 : 외곽  지우빙타이(救兵臺) -> 외곽 지우빙타이(救兵臺) (띄어쓰기 2칸)

391쪽 밑에서 8줄 : 모리스 메이스너(Maurice Meisner) -> 모리스 마이스너(Maurice Meisner) (꼭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책 Mao's China and After의 한국어 번역본에서 '모리스 마이스너'로 표기했고, 한국에서도 주로 이 표기로 통용되기 때문에 표기를 바꾸는 걸 고려해 볼 가치는 있겠다.)

462쪽 각주 94번 : Fraser and Jaeggi (저자 이름인데 글꼴이 이탤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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