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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사상계』 (이상록,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2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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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사상계』 (이상록,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20.)

Dog君 2024. 10. 11. 05:51

 

  민주화진영과 집권세력이 현실에서는 치열하게 대립했지만 인식론적으로는 동일한 기반을 공유하고 있다는 지적은, 사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포스트 어쩌고저쩌고 주의들이 이미 한참 전에 그런 주장을 주구장창 이야기했었다는 사실과, 그런 주장들이 압축적으로 결정화된 '대중독재(mass dictatorship)'의 문제의식에 가장 크게 공명했던 이 중 하나가 저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죠. 더욱이 이 책은 저본인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 나오고 꼬박 10년이 지나서 나왔기 때문에 어떤 독자는 책을 읽기도 전에 벌써 시큰둥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다 아는 얘긴데...)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면, 의외로 익숙한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느낌이 별로 안 듭니다. 오히려 한두 걸음 정도는 더 나아간 것 같다는 인상까지 주죠. 제가 이런 인상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 함석헌 때문입니다. 함석헌은 이 책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도드라지는 인물입니다. 이 책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민주화진영과 집권세력의 공통기반을 지적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면, 장준하나 차기벽, 신상초 등은 여기에 여지없이 꼭 들어맞는 반면 함석헌은 그러한 공통의 기반으로부터 거의 유일하게 독립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책을 읽다가 함석헌만 나오면 갑자기 책의 논지가 흐트러지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의 애초 목표가 한국현대사의 민주화 담론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면, 무리할 정도로 함석헌을 호출하고 그의 성취와 한계를 집요하게 물어늘어지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함석헌의 '민중(씨ᄋᆞᆯ)' 개념은 『사상계』의 필진들이 놓치고 있었던 바를 비교적 정확하게 짚어낸 결과로 보입니다. 기득권에 저항하고 역사의 발전을 추동하는 실질적인 원동력으로서의 집단(계급)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사상계』의 필진 역시 개발이나 성장, 근대 같은 것들을 지향했다는 점만큼은 당시의 지배권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정치적 저항을 말하면서도 정작 '계급' 같은 저항의 집단적 주체를 호명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함석헌이 '민중(씨ᄋᆞᆯ)'의 존재에 주목한 것은 분명한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의 사상이 지금까지도 꽤 많은 이들에게 인용되고, 저항담론으로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며), 역사와 철학을 아우르는 사상체계로까지 완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함석헌의 사상에 대한 이 책의 평가는 엄정합니다. 함석헌 사상의 의의를 충분히 긍정하면서도, 그의 민중 개념이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단성(單聲)적이고 집단적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지요. 그리고 함석헌이 설정한 민중이, 실재로서의 민중이라기보다는 이상화된 개념에 가깝다고도 지적합니다. 즉, 함석헌에게 '민중'이란 실재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추상화된 도덕적 존재에 더 가깝다는 것이죠. 바로 여기서 함석헌의 한계도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그 누구보다 민중의 저력을 믿은 (혹은 신봉한) 함석헌이지만, 실재로서의 민중과 개념으로서의 민중 사이에 간극이 크게 벌어지는 순간, 함석헌은 곧장 계몽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이러한 지적은 함석헌의 사상과 '민중(씨ᄋᆞᆯ)' 개념이 이후 한국의 (일부) 진보 운동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확실히 뼈저린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민주화 담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라는 이 책의 애초 목표에도 한껏 근접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말할 때의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2024년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는 세대, 젠더, 지역 등 다양한 지점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선(戰線)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성취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던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죠. 2024년 지금 이 자리의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데 이 책의 성취가 분명 기여하는 바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민주주의의 정당성이 흔들리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분명 개인의 자유영역은 확장되었고, 폭압적 지배권력은 유순해졌으며,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고, 사회는 더 다원화되었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개별자의 의사는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대표자에게 위임되어 버린다.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개인의 정치적 자유란 자신의 권리를 누군가에게 위임할 자유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만다. 대표자는 분명 인민에 의해 선출되지만, 일단 선출이 되고 나면 인민은 정치적 객체로 대상화되고 대표자가 법이 보장하는 공적 판단과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에서 자유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유순하고 합리적인 지배의 원리였다. 1987년까지 한국에서 저항담론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는 바로 이 지배의 원리로서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정상화' 시켜 달라는 요구였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로 수렴되지 않는 하위 주체들의 욕망이 놓여있기도 했고, 지배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들이 동반되기도 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와 짝을 이루는 지배의 원리였다.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공정한 기반 위에서 최대한 보장되는 것처럼 재현되어 왔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개인 이윤추구의 자유가 정치적 자유와 맞물려 있었고 기회의 평등이라는 수사 아래 자본주의적 구조가 낳는 불평등이 정당화되어 왔다. 자유롭고 주기적인 선거는 지배 권력으로 하여금 인민주의적 요구를 수렴하여 수동혁명적 개혁조치를 단행할 수 있게 하거나 부도덕한 정치세력을 물러나게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이지만, 이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의 온존 위에서 지배세력의 자리바꿈만을 용인하는 기능을 담당해왔다. 특정한 피선거인이 유권자 개개인을 대표할 수 있는가 그 자체로 문제이지만,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인민의 삶을 둘러싼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인민이 직접 개입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며 오직 제한된 정책적 선택권 내에서 개인은 유권자로서 한 표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원천적으로 '인민의 정치'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으며, 정부와 의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해가는데 필요한 방식에 불과하다. 그런데 해방이후 한국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라는 명제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은 채 대의제 민주주의 실현을 한국사회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시켜왔다. (17~19쪽.)

 

  한국의 주류적 자유민주주의 그룹은 기본적으로 전후의 한국사회를 '후진적'으로 인식하면서 서구적 근대성을 내면화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자유민주주의의 한국적 수용을 역설하였다. 이들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과 당대의 국제관계 속에서 미국의 막강한 영향력을 응시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서구문명의 정수로 사고하였고, 대한민국을 '부국강병'의 국가로 만들어 궁극적으로 '선진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을 욕망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한국적 수용을 열망하였다. 이들의 자유민주주의는 서구의 그것과 내용적으로 동일하지 않았고, 이들의 태도가 맹목적으로 서구적인 것을 추종한 것도 아니었으나, 이들이 자유민주주의에의 열정은 근본적으로 서구중심주의적 세계인식과 맞물려 있었다. 이들은 1950년대 후반 이후 미국 사회과학계에서 쏟아져나오던 근대화 이론에 쉽게 매혹되었고, 근대화론에 내정되어 있던 서구중심주의적 세계관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반면 함석헌 등 소수의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서구중심주의적 세계인식 속에서 수용하지 않고, 서구적 근대성을 상대화시키고 비판하면서 자유민주주의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고 있었다. 이들은 서구적 근대성이 구축하는 세계질서는 '타락한 물질만능주의라고 비판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민중의 정신혁명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주류적 자유민주주의 그룹은 한국의 '후진적' 정치현실을 자유민주주의의 정상궤도에서 이탈한 '비정상적' 상태로 끊임없이 상정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서구라는 거울을 통해 한국이라는 자국의 현실을 '비정상'으로 보고 이를 '정상화'시키려는 이들의 욕망은 부조리한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에네르기를 끌어들이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한편, '후진국' 국민으로서의 대중에 대한 계몽과 동원의 새로운 억압기제를 창출하는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59~60쪽.)

 

  (...) 함석헌이 실제로 하나님과 민중을 완전히 동일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구성하고자 했던 '민중' 개념 속에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의 모습, 가치를 투영시켜 민중을 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민중과 하나님을 앞서 설명했던 '전체'라는 개념으로 연결시키고자 했다. 함석헌은 그의 논설들에서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전체가 되어라", "전체를 살려라"라고 말했다. 심지어 "99퍼센트라도 전체가 아닌 담엔 당파"라며 민중이 완전한 일체로서의 전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민중이 하나님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전체'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전체'는 현실 속에서 실재하는 민중의 모습과 함석헌의 머릿속에서 구성된 잇아형으로서의 민중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메우기 위한 일종의 개념적 장치였다.
  현실에 실재하는 민중의 목소리는 단성(單聲)이 아닌 다성(多聲)일 수밖에 없다. 그는 "갈라진 생각"으로서 민중 내부의 여러 의견들이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일단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함석헌은 그런 다양한 목소리들을 '사담(私談)'이라 부르며 '전체'와 대립되는 언어행위로, "양심의 불안을 잊기 위하여 자위(自慰)로 하는 관념의 장난"으로 치부하였다. 함석헌이 의미를 부여하는 '민중의 소리'란 하나님의 진리에 봉사하려는 믿음의 소리를 가리켰으며, 이는 갈라진 생각이 아닌 통일된 생각이어야만 했다. 이처럼 '일체(一體)로서의 민중', '단성(單聲)으로서의 민중의지'를 전제하고 있는 함석헌의 민중론은 그의 민주주의론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104~105쪽.)

 

  4·19 이후의 학원분규나 노동조합운동을 불온시하고 있는 위의 인식은 제도와 법률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중의 직접 행동에 대한 지식인들의 공포를 반영하고 있다. 이들이 보기에 4·19 당시 대중이 표출했던 폭력적 저항은 '국민주권'이 박탈당한 일종의 예외상황이었기 때문에 허용 가능한 것이었지만, 4·26으로 이승만이 물러난 이후 대중의 저항은 법과 제도의 틀 내로 수렴되어야만 했다. 이들이 4·26 이후에도 '혁명'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법과 제도를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바꾸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그러한 혁신의 과정은 반드시 합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이 혁신의 목표는 '자유민주사회의 건설'로 수렴이 되는데, 구체적으로는 자유선거의 보장, 삼권분립의 실제화, 비민주적 관권경제의 타파, 공정한 자유시장질서의 확립, 복지국가 추구 등이었다. (118~119쪽.)

 

  4·19 이후 『사상계』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사회의 건설'을 여전히 반공주의의 자장 아래 남북 간의 체제 대결이라는 맥락 속에서 주장했다. "자유와 민권의 신장"이 공산주의와 맞서 싸울 "우리의 유일한 무기이자 지상과제"라고 장준하가 말한 것이나, "남한에 올바로 민주정치의 궤도에 오르는 것처럼 공산주의에 대해서 치명적인 것은 없다"는 류달영의 지적은 모두 같은 맥락에 있다. 또 한 가지 남북 간 체제 대결에서 중요한 비교지표는 바로 생산력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가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남한의 민중들이 굶주려 있다면, 체제 경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이들은 보았다. 장준하가 '경제적 부흥'을 자유민주주의 존립을 위한 토대로 생각했던 데에는 남북 간의 체제 대결에서 생산력이 갖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남북한의 체제 경쟁 속에서 우위에 서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본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경제부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반공주의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탈후진'에의 강박증과도 관련이 있었다. 독재자를 몰아내는 것은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첫 출발에 불과하며 그것의 완성은 경제발전과 사회제도개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지식인들은 보았다. 장준하가 제2공화국의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으로 들어간 것도 '후진국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는 길이 '국토건설'이라는 근대화에의 모색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을 바로잡지 못하고 빈곤·실업의 홍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후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그것은 곧 언제든지 한국이 열강의 식민지가 될 수 있는 것을 의미했기에 과거 식민지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면서 근대를 욕망했던 것이다. 이들 지식인들이 '탈후진'을 한국사회의 과제로 상정했을 때, 이승만 하야 이후 '4·19항쟁'의 '혁명성'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정상화와 경제부흥을 위한 실천을 통해 획득될 수 있었다. 경제부흥을 위해 『사상계』 지식인들은 위로는 경제개발계획의 수립·시행을, 아래로는 이에 조응하는 '근로체제'의 확립을 촉구했다. (121~123쪽.)

 

  중요한 것은 4·26 이후 자유민주주의적 성향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4·19에서 표출되었던 복잡한 다중의 요구와 목소리들을 '후진성' 극복을 위한 경제건설에의 의제로 전유해가려는 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데 있다. "겨레의 영원한 번영을 바라볼 수 있는 전환기에 생을 얻"었음을 강조한 장준하나 "이번 혁명으로 한국인은 민주제도를 위하여 서구 사람들과 완전히 동등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평한 유진오,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서구적 시민정신'을 소유한 자들로 후진국에서 민중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고 본 김성식, 4·19를 서구의 시민혁명과 대등한 위치에 선 시민혁명으로 규정한 신상초와 안병욱 등은 한결같이 시민혁명·산업화에 기반한 서구의 국민국가 건설 모델을 염두에 두고 4·19의 역사적 의의를 '탈후진'의 계기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물론 '후진성' 극복을 위하여 '시민윤리'를 내면화하고 자본주의의 완성을 지향해야함을 이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강조해왔다. 그러나 1950년대 한국지식인들의 '후진성' 논의는 '서구근대'라는 거울에 비추어 계속 퇴락의 길을 걷는 한국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호소였으나, 4·19를 계기로 '우리도 서구와 같은 역사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획득하며, '후진성' 극복이 한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구체적인 전망으로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4·19를 '탈후진'의 계기로 인식하고 이에 고무된 지식인들은 4·19에서 표출된 다성적 욕구들을 '탈후진 근대화의 길'로 단성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해나갔다. (150~151쪽.)

 

  전 세계적 조류 속에서 후퇴하여 '후진국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국가 단위의 경제발전을 위해 온 국민이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지식인들의 눈에 4·19는 '후진국의 나락'으로 떨어질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한줄기 빛과 같은 시간으로 비춰졌다. 4·19를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정상화시키는 행위는 단순히 정치세력의 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공정하고 합리적인 시장질서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경제혁명의 조치들을 단행하여 자본가들의 자유로운 영리욕구를 고취시키고 경제개발의 지휘관·조정자로 거듭나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이어졌던 것이다. 지식인들은 경제성장·경제번영을 향한 자신들의 욕망을 국민대중의 것으로 동일시하면서 "국민들이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은 경제번영"이며, "경제성장을 위한 사업은 무엇이건 힘껏 협조할 마음의 준비도 다 되어 있다"고 경제제일주의적 사고가 국민 대중에게 이미 내면화되어 있는 것처럼 재현하고 있었다. 4·19 이후 제기되었던 다중의 욕망들은 지식인들이 구사하는 재현의 정치, 담론의 정치에 의해 경제제일주의로 수렴·투영되고 있었다. (159쪽.)

 

  횡단보도 건너는 노인들까지 일일이 지도하도록 하는 군부의 일상정치는 5·16 이전에 등장했던 계몽담론을 군부가 전유하여 자신들이 '질서'와 '도의' 확립을 수행하는 주체임을 과시하는 행위였으며, 군부는 유순한 계몽과 강압적 동원이라는 양날의 칼을 구사하며 전 사회를 일종의 병영 혹은 감옥으로 재구축해나갔다. 그리고 계몽군주이자 건설사령부로서 5·16군부는 경제개발과정에서 스스로 설정해놓은 계몽의 기획과 현실 사이의 모순 속에서 자신이 세워놓은 원칙을 위반해가며 시민사회의 역공을 당하게 되고 '경제개발'이라는 열차를 가속화시키는데 더욱 몰두하는 길로 나아갔다. 4·19항쟁을 전유하고자 했던 제2공화국의 '경제제일주의'는 5·16군부에 의해 사실상 재전유되었던 것이다. (178쪽.)

 

  1963년 3·16 번의 이전까지 대다수의 『사상계』 지식인들이 5·16군사쿠데타에 지지 혹은 묵인의 태도를 취했던 가장 큰 이유는 경제개발 혹은 근대화에 대한 '후진국' 지식인의 강박증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한 한국에서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후진국 콤플렉스의 뿌리는 매우 견고했다. 더욱이 냉전 하 남북 간의 체제 대결 상황은 남한 지식인들의 경제개발에 대한 강박증을 촉발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1950년대 북한의 빠른 전후 복구와 생산력 향상에 자극을 받은 남한 지식인들은 경제개발을 하루 빨리 실현해야 한다는 일종의 초조감에 시달렸다. 특히 민주주의를 공산주의체제의 정치제도와 대립관계에 서 있는 자본주의체제의 정치제도인 '자유민주주의'로만 이해하고 있던 대다수의 『사상계』 지식인들은 북한을 바라보며 남한 경제개발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의든 타의든, 휴전 이후 남북 간의 전장(戰場)은 이제 경제영역으로 옮겨졌던 셈이다. (188~189쪽.)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한일회담 반대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사상계』 지식인들의 민주주의 인식이 과거의 대의제 지상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정이양 정국까지 『사상계』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선거라는 과정에 의해 특정인에게 위임하는 대의제의 원리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사고하였다. (...)
  『사상계』 지식인들의 이같은 민주주의관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제3공화국 수립 이후 박정희 정권의 대일 외교활동은 부분적으로 여론의 압박에 의해 정책방향이 조정될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틀에 의해 보장된 대표자들의 정치활동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한일협정의 겨로가는 국회의 비준만 통과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 『사상계』 지식인들은 기존과 같이 대의제 민주주의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이들이 권력을 위임받지 못한 자들의 '불법적' 저항을 옹호하고 나서기도 하였다.
  (...)
  각종 현안에 대한 정치적 선택의 과정에서 정치적 권리를 위임한 자의 의사와 정치적 권리를 위임받은 자의 의사간의 의견불일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일상적으로 노정할 수밖에 없는 갈등요인이다. 대의제라는 틀은 선거에 의해 인민이 정치적 권리를 특정인에게 위임한 순간부터 위임받은 자의 권한이 위임한 자의 권리보다 우위에 서기 쉽다. 대의제 하에서의 인민은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교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막강한 권한을 한 손에 쥐고 있었지만, 대의제가 추구하는 효율성의 원리와 '위임'의 권력관계로 인해 실상 각종 현안에 대한 인민의 정치적 권한은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장준하는 대의제 하에서 일어나는 권력관계의 역전현상에 반발하여 '국민'의 의사가 대표자의 의사보다 우위에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주장은 대표자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원리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문제는 '대의제' 하에서 위임된 대표자의 권한을 '국민'이 어떤 수단을 통해 통제할 것이냐에 있었다. 여기서 그는 대표자가 법률을 제정한다거나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할 때 '국민' 이 "국민주권사상에 입각하여 국민다수의 뜻을 반영하도록" 강제해야만 '민주적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대표자들을 강제할 수단은 여론의 형성과 집회 및 시위를 통한 저항이었다. 이러한 장준하의 입장에서 보면, 언론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가 대의제 하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220~224쪽.)

 

  '지배계급 대 민중'이라는 단조롭고 본원적인 주체설정은 곧 그의 근대 비판에서도 한계를 드러냈다. 그는 평화를 지향하는 민중이 깨어나 새로운 종교를 신봉하면 전쟁과 폭력을 지향하는 '지배계급'의 근대적 지배를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지배계급'이나 '민중'은 일괴암적인 존재가 결코 될 수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적처럼 근대성의 영구적 특징은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데 있기에 '지배계급'도 민중도 모두 유동적이고 국면적일 수밖에 없는 정치적 존재이다. 정치적 주체의 문제에 대한 함석헌의 문제제기는 소중한 것이었지만, 근대문명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 주체의 문제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근대적 지배방식이 '민중'의 일상 속에 어떤 식의 폭력으로 작동하는가라는 분석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과학과 종교를 '지배계급'이 아닌 '민중'이 전유하기만 하면 근대의 폭력이 해소될 것이라는 함석헌의 전망은 일종의 순진한 낙관론이 아닐 수 없다. (266쪽.)

 

  이 지점에서 '한국적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의 내포를 구성하는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는 실질적으로 대통령의 영도권에 대한 전통의 확증으로 고정되지만, '한국적'이라는 민족담론이 피지배국민에게 수용되고 의미를 발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내러티브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1960년대 '한국적인 것'은 특수성, 전통성, 비합리성 등의 맥락에서 후진국의 근대화를 위해 경계되거나 극복되어야할 요소로 여겨졌지만, 1960년대 후반~1970년대 '한국적인 것'은 새로운 민족사에 적합한 인간형 창조를 위해 역사 속에서 '자기긍정성'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자랑스러운 민족사'로 재창조·재해석 되어야 했다. 조선후기 이래의 "실학사상, 개화사상, 동학운동, 의병정신, 3·1운동, 독립정신, 반공투쟁, 4·19정신, 5·16혁명" 등은 각기 다른 역사적 맥락 속에 있는 사건들이었지만, "근대화에의 지향, 실질과 창조, 주체성, 자주독립, 자유민권, 민족적 발전, 협동과 단결의 정신과 부합된다"는 이유로 '자랑스러운 민족사' 내러티브를 구성하며 재해석되었다. 1970년대 박정희정권이 '국적있는 교육'을 강조하면서 국사 교육을 가오하하고, 문예중흥5개년계획 아래 민족사관 정립을 위해 국학, 전통예술, 문화재 등의 분야에 당시로서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였다. (308~309쪽.)

 

  혁신세력의 민족주의는 차이의 공간이나 공백을 허용하지 않았다. 개인의 의사는 국민의 의사로, 국민의 의사는 민족의 의사로 집약되고 일치되어야만 한다고 이들은 생각하였다. 이들이 내 나라 내 조국을 위한 개개인의 헌신이 미덕으로 상정되는 순간, 내 나라 내 조국을 움켜쥐고 있는 권력의 공간과 조국의 이익에서 빗겨나 있는 자들 사이의 틈새를 현시하지 못하거나 무시 혹은 제거하려 하기 쉬웠다. 이는 '인민을 위하여'라는 그들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의사를 국민의 의사로, 국민의 의사를 민족의 의사로 비약시키려는 담론구조의 특질로 인해 인민 내부의 차이를 지움으로써 실재로서의 '인민'과 표상으로서의 '인민' 사이의 괴리를 드러내고 실재로서의 인민에 대해 억압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런데 한국현대사에서 역설적인 점은 통혁당, 인혁당, 남민전 사건에서 잘 드러나듯이 혁신계 통일운동세력이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억압/배제적 성격을 폭로하게 만들고 공동체 내부의 틈새와 균열을 드러내는 존재들로 자리매김 되어왔다는 사실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경계를 넘는 통일을 주장했던 이들의 존재 자체가 객관적으로 박정희체제의 존립근거를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이들은 박정희정권이 그 지배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규율하기 위해 선택된 일종의 희생양이었다. 반공규율체제의 억압성은 자유민주주의가 내장하고 있는 다원주의와 관용의 원리를 소멸시키고, 통일세력을 '비국민=빨갱이'로 낙인찍어 공동체로부터 추방시키게끔 하였다. (370~371쪽.)

 

교정. 초판 1쇄

25쪽 밑에서2줄 : 지시인들이 -> 지식인들이

81쪽 밑에서7줄 : (들여쓰기 삭제)

91쪽 밑에서3줄 : 우치무라

94쪽 8줄 : 우찌무라

99쪽 밑에서2줄 : 우찌무라 (우치무라 간조의 표기를 통일. 참고로, 색인에는 '우치무라 간조'임.)

139쪽 밑에서9줄 : 것은청년세대의 -> 것은 청년세대의

150쪽 밑에서2줄 : 길을 걸어하는 한국의 -> 길을 걷는 한국의

180쪽 마지막2문단~182쪽1문단 : (중복된 문단이므로 삭제)

189쪽 2줄 : 남북 간의 戰場은 -> 남북 간의 전장(戰場)은

213쪽 밑에서8줄 : 카르 슈미트 -> 카를 슈미트

213쪽 각주409번 : 카르 슈미트 -> 카를 슈미트

245쪽 밑에서3줄 : 인식은 富國을 향한 -> 인식은 부국(富國)을 향한

255쪽 8줄 : 민족주의 고양시키는 ->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

258쪽 2줄 : 독재의 素因이 -> 독재의 소인(素因)이

274쪽 5줄 : 아름아운 -> 아름다운

276쪽 밑에서6줄 : 도스토에프스키의 -> 도스토예프스키의

356쪽 8줄 : 명제을 -> 명제를

360쪽 8줄 : 횡포와 막을 길이 -> 횡포를 막을 길이

367쪽 9줄 : 공통체의 -> 공동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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