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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事나부랭이

친구 결혼식

Dog君 2016. 2. 14. 18:11

  대학이고 뭐고 그저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냥 덜커덕 대학에 붙어버렸다. 별 생각 없이 본 수능에서 인생에 다시 없을 잭팟이 터졌고, 그 덕에 내신이고 논술이고 면접이고 없이 오직 수능성적만으로 신입생을 뽑는 대학에 붙어버렸다. 우편으로 응시서류를 보내기만 했는데, 붙어버렸다. 팔자에 없을 것 같았던 서울 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게 서울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조차 세련된 서울 말씨를 구사하는, 그야말로 경이로움으로 가득찬 도시였다.


  선배를 제외하고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 녀석이 있었다. 재수를 했다고 했고, 눈에 띌 정도로 활달한 성격이었다. 남녀 할 것 없이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는 빨간 낙타에 어버버-가 되곤 했던 나는, 아 서울 애들은 다 이런가보다 했다. (고등학교는 의정부에서 나왔고 집은 포천이라고 했지만, 진주 촌놈에게 경기도는 다 서울로 보였다.)


  서로 닮은 구석이라고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식혜 찾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고, 그래서 싸우기도 많이 했고, 또 그래서 서로 시큰둥하게 지낸 기간이 좀 더 긴 것 같기도 하지만, 뭐 어쨌거나 이런 저런 공간에서 많은 것을 공유했다.



  대체 발에 안 걸리는 것이 없었던 쉰내 나는 자취방에서 빤스 안에 손 집어넣으며 (그리고 그 손으로 다시 오징어를 찢어 씹으며) 밤새 만화책 보며 낄낄거렸던 일이라거나, 연극 준비한답시고 사람 키만한 합판을 대여섯장씩 리어카에 싣고 자취하던 옥탑방 옥상에서 페인트칠한다고 좆뺑이를 쳤던 일이라거나, 그렇게 힘들게 연극 올렸는데 막상 무대에서는 대사 까먹어서 1년에 딱 한 번 하는 공연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던 일이라거나, 공익근무하던 시절에 또다른 친구까지 포함한 셋이서 '니가 더 좆됐거든'을 주제로 1:1:1 통화를 하면서 낄낄대다가 다음 달에 대륙간탄도탄 수준의 전화비폭탄을 얻어 맞았던 일 같은 것들이 기억난다. 30몇년 살면서 가장 안 풀리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그 때 그 '좆같음'을 같이 한 것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친구가 오늘 결혼했다. 제발 그냥 좀 평범하게 하면 안 되겠냐는 신부의 간절한 소망을 뿌리치고, 내 친구는 자기답게, 친구들에게 어벤저스와 스타워즈 가면을 씌우고 자기는 아이언맨 가면을 쓰고 춤을 추며 퇴장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장식했다.




행복해라 지금처럼.











ps. 나한테는 캡틴아메리카 가면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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