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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이타주의자 (윌리엄 맥어스킬, 부키, 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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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이타주의자 (윌리엄 맥어스킬, 부키, 2017.)

Dog君 2017. 11. 21. 13:22


1-1. '플레이펌프'라고 하는 것이 있다. 아이들이 타고 노는 놀이기구(아래 사진)에 지하수 펌프를 연결해서 그걸 타고 놀기만 해도 물을 퍼올릴 수 있다는 건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적정기술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꽤 유명했던 아이디어였다.



1-2. 근데 이거, 지금은 실패한 자선사업/적정기술의 대표 사례가 됐다. 얼핏 보기엔 괜찮은 아이디어 같지만, 실제로 해보면 들어가는 노동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식수의 양이 터무니 없이 적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셀러브리티들의 찬사 덕에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키며 아프리카 전역에 수없이 설치된 플레이펌프는 그냥 흉물이 되는 중이라고 한다. (더 놀라운 건, 플레이펌프는 여전히 많은 후원을 받으며 사업을 계속하는 중이란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고...


[직썰] 기적의 놀이기구가 흉물로 변했다


1-3. 이 이야기, 여간 의아한 것이 아니다. 플레이펌프를 처음 제안한 트레버 필드가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것이 1989년이고, 최초의 플레이펌프가 설치된 것이 1995년이며, 플레이펌프 설치가 절정에 달했던 것은 대략 2008년경이다. 얼추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운동이 계속 되었지만, 이 단순한 기구가 실효성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 그 누구도 검증을 안 해본 상태로 운동이 계속 됐다는 말인데, 와 이거 이래도 되나.


2-1. '효율적 이타주의'라는 말을 제안한 윌리엄 맥어스킬은, 단순한 기부나 자선사업에서 선의보다 중요한 것은 효율이라고 말한다. 플레이펌프처럼 사업 자체의 타당성이 문제가 되기도 하고, 투명하게 운영되지 못하는 자선단체의 부도덕함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거다. 기왕 좋은 일 할 거면, 더 좋은 일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2-2. 맞는 말이다. 좋은 말이다. 잊을만 하면 기부금 횡령한 나쁜 놈들 소식을 듣곤 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선의의 단체에게까지 불똥이 튀기 마련이다.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아, 상상하지 말자.


3. 이 주장이 타당하려면, 어느 사업이 더 중요한지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나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는데, 각 사업이 갖는 효용을 수량화하는 지표가 있다고 한다. '질보정수명Quality-Adjusted Life Year, QALY'이라는 건데, 이걸 사용하면 자선사업의 우선 순위를 정확하게 계량된 수치로 보여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슬슬 입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정말 맞는 말이니까...


4. 근데 잘 모르겠다. 딱 그 지점부터 뭔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자선, 기부, 선의 같은 것과 효용, 효율, 수치 같은 것과 연결시켜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이성으로 해결해야 할 일을 감성으로 해결하려고 들면 안 된다는 저자의 문제제기에는 적극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그 말이 곧 감성의 효용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으로 이어붙여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자선사업의 지속성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업의 효율성이기도 하지만 동전의 반대면에는 그 사업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도 그려져 있는 것 아닐까. 선의에 가득한 사람들 앞에, 자선사업과 기부 앞에 단기재무제표를 들이밀며 효용이니 효율이니 따지고 있으면, 그거 너무 매정해 보이지 않나. 예컨대 아래와 같은 문단을 만나게 되면, 뭔가 배보다 배꼽을 더 크게 보고 계신거 같아서 정신이 아득해진다고나 할까.


  어떤 명분에 힘을 보내야 할지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령 삼촌이 암으로 사망했다면 암 연구기금 조성에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사별의 아픔을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으로 승화시키는 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암을 다른 치명적 질병보다 우선시해 기부하는 건 자의적인 판단의 결과일 뿐이다. 삼촌이 암이 아닌 다른 질병으로 사망했다 해도 슬픔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때 애도하는 건 그가 고통에 시달리며 예기치 않게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지 특정한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가족의 상실로 인한 슬픔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더 넓은 차원에서 죽음을 예방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집중해야지 '특정' 방식으로 죽음을 예방하고 삶의 질을 높이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도와주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온당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p. 64.)


5. 이런 방식의 접근이 불편한 것은, 이것을 더 밀고 나가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일이 따로 있다는 논리가 나오기 때문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하는 일에도 차등이 있다는 주장에 이르기 때문이다. 아래처럼 이야기하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체 뭐가 되냔 말이야. (아 여기서 갑자기, 얼마 전에 본 '어 퍼펙트 데이'가 생각나면서, 눙물이... ㅠㅠ)


  이제 그레그 루이스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살펴보자. 부유한 나라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기부를 전혀 하지 않는다면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평생 2명의 목숨을 구하는 선을 행하게 된다. 반면 가난한 나라에서 의사로 일하면 매년 4명의 생명을, 35년간 일한다면 140명의 생명을 구하는 선을 행하게 된다. 만약 그가 부유한 나라에서 의사로 일하며 버는 수입을 기부한다면 몇 명의 생명을 구하게 될까?

  영국 의사들의 연평균 수입은 세전 약 7만 파운드다. 미화로는 11만 달러쯤 되니 42년 동안 의사로 일하면 460만 달러다. 수입이 특히 많은 종양전문의라면 연수입은 그보다 두 배 높은 평균 20만 달러 정도가 된다. 앞서 말했듯 생명을 구하는 데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높은 사업은 말라리아 방지용 살충 모기장 배포로, 3400달러로 1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그레그가 종양전문의가 되면 연수입 20만 달러 중 50퍼센트를 기부해도 세전 소득이 10만 달러이므로(기부금은 소득 공제가 된다) 여전히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동시에 기부금으로 매년 수십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의사로 일할 때보다 훨씬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중요한 건 그레그가 기부를 위한 돈벌이를 택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했을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메워 의사가 되었을 테고 그 사람의 기부 금액은 미미했을 것이다(수입의 2퍼센트가 평균이다). 한편 가난한 나라의 비정부기구NGO에서 일했다면 해당 단체에서 지급하는 보수를 받았을 텐데, 그 돈은 그레그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다른 의사의 연봉이나 의료 장비 구입 명목으로 지출되었을 터다. 하지만 기부를 위한 돈벌이는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레그는 기부를 위한 돈벌이를 택함으로써 가난한 나라에서 직접 의사로 일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모국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pp. 113~115.)


6. 분쟁지역의 아동들이나 길고양이들을 위한 활동에 기부하는 사람에게 "우리나라(사람 중)에도 굶는 애들 많은데, 걔네들부터 먼저 돕는게 더 낫다"고 핀잔 주는 사람들이 꼭 있다. 내 경험상, 그렇게 핀잔 주는 사람이 정말로 기부 많이 하는 거, 거의 못 봤다. 어쩐지 이 책이, 그렇게 핀잔 주는 사람들의 말처럼 들리는 건 그냥 내가 삐딱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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