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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문학동네, 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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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문학동네, 2017.)

Dog君 2017. 11. 21. 13:46


1. '세월' 이후. 이해와 공감.


 아내는 연주를 끝낸 뒤 수천 명의 기립 박수를 받은 피아니스트마냥 울었다. 사람들이 던진 꽃에 싸인 채. 꽃에 파묻힌 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마냥 내가 붙들고 선 벽지 아래서 흐느꼈다. 미색 바탕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흰 꽃이 촘촘하게 박힌 종이를 이고서였다. 그러자 그 꽃이 마치 아내 머리 위에 함부로 던져진 조화弔花처럼 보였다.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악의로 던져놓은 국화 같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입동', pp. 36~37.)


  짧은 사이 도화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대부분 알아채지 못한 실수였으나 방송 베테랑 최경위만은 심상찮은 눈으로 도화를 주시했다. 도화는 노량진이라는 낱말을 발음한 순간 목울대에 묵직한 게 올라오는 걸 느꼈다. 단어 하나에 여러 기억이 섞여 뒤엉키는 걸 알았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교회 식당에서 "도화씨가 좋아하는 거 같아 잔뜩 집어왔어요"라고 말하며 흰색 플라스틱 그릇 위에 가득 쌓인 동그랑땡을 자랑하던 모습과 옆면이 새카매진 한국사 교재, 베갯잇에 묻은 흰 머리카락, 눈가 주름, 살냄새 그런 것이 밀려왔다. 한겨울, 도화가 오들오들 떨며 현관문을 열면 따뜻한 두 손으로 언 귀를 녹여주던 모습과 여름이면 도화 쪽으로 바람이 더 가도록 선풍기 각도를 조절해주던 이수의 옆얼굴도. 그때서야 도화는 어제 오후, 주인아주머니를 만난 뒤 자신이 느낀 게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깯라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 쪽에서 먼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라왔던 것마냥. 이수는 이제...... 어디로 갈까? 도화가 목울대에 걸린 지난 시절을 간신히 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최경위가 나서기 전 재빨리 말을 이었다. 교통방송 때 늘 하는 말, 도화가 신뢰하는 말. 과장도, 수사도, 왜곡도 없는 문장을 풀어냈다. ('건너편, pp. 117~118.)


  기숙사에 머무는 일들은 모두 공동 규율을 지켜야 한다. 소등시간과 취침시간 준수는 기본이다. 이들은 전시실에 있을 때나 자신인 척할 뿐 해가 지면 중앙식으로 지어진 기숙사에서 중앙식으로 잔다. 밥도 규격화된 식판에 받아 용변도 정해진 장소에서 중앙식으로 본다. 그렇다고 이들이 '중앙'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이들은 단체 사진 속에서 점점 흐릿해져가는 유령처럼 모호하게 존재한다. 단지에선 이들에게 중앙 언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의사소통 체계가 통일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관리자들은 각 언어의 고유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타 부족끼리 말 섞는 걸 금지했다. ('침묵의 미래', pp. 133~134.)


  ......말해달라니. 막막해서 도리어 웃음이 난다. 이걸 어찌 설명하나. 말한다고 네가 알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재이야,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교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그런데 무슨 말을 하다 여기까지 왔지? 그래, 엄마랑 아빠는...... 지쳐 있었어.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그런 걸 다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이 곤경을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하다 온전한 참도 거짓도 아닌 말을 던진다.

  -아빠랑 왜 헤어졌나고?

  -응.

  -음...... 생각이 달라서?

  재이가 뜻밖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곤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말을 훈계조로 이야기한다.

  - 그럼 토론했어야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리는 손', pp. 21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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