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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2012.1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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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2012.11.6.)

Dog君 2017. 11. 26. 13:48

난 말야... 고민 같은건 스무살 즈음에나 하는 건줄 알았어. 사실 그 때는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았나 모르겠어. 왜 그런거 있잖아. '대학에 와보니 인간관계가 고등학교 때랑 다르네요', '그 여자애/남자애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같은 거 말야. 지금 생각하면 좀 유치하고 웃기긴 하지만, 그 때는 그 나름대로 되게 진지했던 그런거. 그래서 그 때는 어서 빨리 그런 고민 같은거 안 할 수 있는 당당함이나 뚜렷한 주관 같은게 생기길 원했던 거 같아. 그냥 막연하게 말야. 선배들은 그런 걸로 고민 안 하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런데 나이를 조금 더 먹고 대학교 고학년이 되어도 그걸 그대로 비슷하게 하고 있길래 좀 놀랐어. 물론 고민의 내용이야 변했지만... 여전히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 변했잖아, 그치? 뭘 해서 먹고 살지, 진로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뭐 그런 것들... 다들 그런 것들 때문에 고민하잖아. 그러다가 가끔 술 먹고 꽐라 되고. ㅋㅋㅋ. 근데 그 때도 마찬가지였던거 같아. 빨랑 취업을 하든 뭘 하든 해서 다음 단계로만 넘어가면 뭐라도 될 줄 알았던거지. 고민이 그냥 풀릴 줄 알았지.


그렇게 정신없이 20대를 보내고 나니까 내가 벌써 나이가 서른이래. 나 서른될 때 무슨 생각했는 줄 알아? 나 스무살 때는 서른 먹은 선배들이 졸라 어른스럽고 커보였는데, 정작 내가 서른이 되고 나니까 나는 아직도 모르는 것 천지에 성숙한 것도 하나 없는 것 같은데 나이가 벌써 서른이래는거야. 얼마나 웃기겠어.


근데 진짜 졸라 짱 레알 웃기는 건, 예전에 했던 그런 고민들을 이 나이 먹어도 여태껏 그대로 똑같이 하고 있다는거야. 인간관계가 변하고 어쩌고 하는 고민들은 사회생활 시작하면서 진작에 시작한 거고, 뭐 해서 먹고 살까,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 뭐 그런 고민들을 지금도 하고 있잖아. ㅎㅎㅎ. 근데 또 좀 더 놀라운건 이 고민을 내 또래 친구들도 거의 똑같이 하고 있다는거야. 나처럼 대학원에 간 녀석이든, 그냥 직장생활 하는 녀석이든 말이지. 그래도 스무살 즈음에는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같은 깡이라도 있었던거 같은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는 것 같잖아. 괜히 쓸데없이 보고 들은 것만 많아서 겁만 많아졌어. ㅋㅋㅋ. 물론 뭐... 그런 것들 때문에 상처입고 움츠리고 양보한 덕분에 지금 내 모습까지 됐다는 거 모르지 않지만.


그냥 요즘은 좀 더 많이 그래. 내 나이도 적지 않아서, 벌써 서른 하나도 끝나가는 시점인데 난 정말 하나도 이뤄놓은 게 없는 것 같거든. 하다 못해 대학원생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는 외국어 능력도 하나 변변한게 없고, 마땅히 수학능력이 더 좋은 것도 아닌데, 기억력은 평균 이하인 게 틀림없고, 세상 일들을 넓게 보는 능력 같은 것도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아. 한 마디로 공부 쪽으로는 재능이 완전 꽝이란 거지. ㅇㅇ. 처음 대학원 가겠다고 마음 먹었던 건, 돈 좀 없어도 되는데 그냥 보고 싶은 책 보면서 쓰고 싶은 글 쓸 때가 제일 기분 좋길래, 잘 하지도 못하는 공부 그거 해보겠답시고 대학원 원서를 쓴 거였거든.


맞아. 이제 나에게 공부라는 건 단지 대학생활을 좀 더 연장해 보고 싶은 희망만으로 하는 건 아니야. 좋든 싫든 이제 공부는 내게 노동 그 자체, 혹은 직업이야. 다른 사람들이 직장을 찾고, 월급을 받아서 주변 사람들을 건사하는 것과 똑같은 거지. 여기서 무슨 대단한 영감을 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자기 혼자 세상 고민 다 짊어진 것 같은 사명감 같은 걸 가질 필요도 없어. "프로는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갈 뿐"이니까.


전에 어디 라디오에서 누가 그러던데... 어쩌면 내가 해야 하는 건 그저 매일 아침 일어나서 묵묵히 어제도 했던 일을 계속 하는 건지도 몰라. 설령 어떻게 하면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그 일의 끝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말야. 분명 그 중간중간에 지치기도 할 거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막막해서 그냥 주저앉아버릴 때도 있을거야. 아 정말 이젠 못 해먹겠다 싶은 그 순간에도 선택은 하나 밖에 없어. 그냥 잠깐 쉬었다가, 전에 하던 그 일 다시 하는 거. 우리가 '훌륭한 역사가/예술가'라고 부르는 사람이 이뤄놓은 것들 중에서 번뜩이는 단 한 번의 영감에서 시작된 건 하나도 없어. 지금의 나처럼 불안과 불확실에 시달리면서도,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아올라간 것들이 어느 순간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톡 튀어나왔을 때 비로소 사람들이 그걸 '결과'로 인정해 주는 것 뿐이야. (물론, 내가 그 사람들이랑 동격이라는 건 절대 아니고.)


* 예전에 써둔 글에, 오늘 기분을 약간 더해서 고쳐 썼다. 어차피 이렇게 긴 글은 아무도 안 읽으니 말투가 좀 손발 오그라들어도 무슨 상관이겠어. (페이스북, 2012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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