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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쓰게 된다 (김중혁, 위즈덤하우스, 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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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쓰게 된다 (김중혁, 위즈덤하우스, 2017.)

Dog君 2018. 1. 14. 12:21


1. 별로 똑똑하지도 성실하지도 않은 대학원생/연구자로 살아온 지 벌써 10년 가까이 됐다. 그래서 그런가, 딱히 이렇다 할 연구성과를 내놓지도 못했고 뭐 하나 잘 하는 것도 없는 채로 여기까지 왔다. 타고난 천성부터 게으른데다가 그런 천성을 고쳐보겠다는 의지도 없으니 아마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2. 그런데 갑자기 지난 연말께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지도교수님의 정년을 생각하면 당장 졸업논문 데드라인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고, 그거 말고도 이제는 슬슬 글의 형태로 가다듬어야 할 공부거리들도 몇 가지 있으며, 꼭 한 번 공부해보고 싶은 주제도 몇 가지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지금 당장 뭐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타이밍에 있다.


3. 그런 위기감에 허우적대던 때에, 때마침 (내가 좋아하는) 김중혁의 신간이 나왔다. 제목 봐라. 이 정도면 뭐, 궁예가 환생해서 관심법을 하는 것만 같은 제목 아이냐.


4-1. 사실, 대단히 새로운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시중에 나온 숱한 글쓰기 책들처럼 이 책 역시 '일단 쓰라'고 말한다. 잘 써야 한다는 강박 따위 버리고 일단 뭐든 써보라는 것. 계획 따위 세울 시간에 일단 하는 것. 어떤 일을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그 일을 하는 것이니까.


  최선을 다할 수 없으므로, 모든 글쓰기의 첫 문장은 대충 쓰는게 좋다. 어차피 우리는 최선의 문장을 쓸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문장을 쓸 수 없다면 아무 문장이나 쓰면 된다. 그래도 좀 나은 문장이 있지 않겠냐고?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위악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골라봤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게 첫 문장이다. 에세이를 쓰든 논문을 쓰든 블로그 글을 쓰든 소설을 쓰든 시를 쓰든 첫 문장은 그렇게 대충 쓰는 게 좋다. 대신, 종이에 쓰면 안 된다. 생각만으로 쓰는 거다. 아무 문장이나 생각으로, 내 눈앞의 하얀 화이트보드에, 가상의 모니터 화면에 그 문장을 쓴다. 그리고 그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문장은 잘 보이지 않는다. 문자로 쓰여 있지 않으므로, 옷을 입지 않은 투명인간 같은 모습이므로, 잘 보이지 않는다. 문장은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 한다. 가상의 모니터에 쓰인 첫 문장을 한참 들여다 보면, 문득 그게 첫 문장감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그건 67번째 문장이거나 82번째 문장에 어울린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 문장을 지우고(아니면 아래로 내리고, 혹은 문장 저장소에 넣어두고) 첫 문장을 다시 쓴다. 이번에도 대충 쓴다. 그리고 다시 그 문장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여러 개의 문장을 첫 문장으로 써보면, 어느 순간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첫 문장이 나타난다. 그 문장이 최선을 다한 문장이어서가 아니라 ‘하는 데까지 해본 문장’이라서 그렇다. 더 이상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첫 문장을 종이 위에 적는다. 문자를 입은 첫 문장은 그럴싸해 보인다. 제법 첫 문장 같다. (pp. 75~76.)


4-2. 그리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라는 것까지 더하면 된다. 읽기, 생각하기, 쓰기, 이 세 가지가 균형을 갖출 때야 비로소 단지 지식자랑하는 글에서 멈추지 않고 더 좋고 더 따뜻한 글이 된다는 것이다.


  대학을 다닐 때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던 시기가 있었다. 도서관에 앉으면 아무 책이나 골라서 끝까지 읽었다. 할 일이 없었다. 휴대전화는 당연히 없었을 때였고, 여자친구도 없었을 때였으니 할 일이 당연히 없었겠지.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서 누구에겐가 대여해주고 싶을 정도였겠지. 도서관에 앉아서 주로 소설이나 철학서를 읽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몰라도 무조건 끝까지 읽었다. 다 읽고 나면 이상하게 뿌듯했다. 하나의 세계를 통과해낸 것 같아서, 내가 모르던 걸 알게 된 것 같아서,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아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껏 책 한 권 다 읽었을 뿐인데 말이다. 다 읽지 못한 책은 빌려 갔다. 대출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도서 대출카드의 맨 윗줄에 내 이름을 적는 게 뿌듯할 때도 많았다. 냉기가 도는 자취방에서 책을 마저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더 읽고 싶었다.

  예전에는 무조건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어 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고,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없다면, 가까이 있는 것을 한 번 더 접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익숙한 친구와 한 번 더 만나는 게 나을지 모른다.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것 같다. (중략)

  더 많이 아는 건 누군가와의 대화에 도움이 된다. 자랑할 수 있고, 뽐낼 수도 있다. 한 번 더 알게 되는 건 자신과의 대화에 도움이 된다. 한 번 더 알게 되는 순간, 모르는 게 더 많아질 수 있다. 지식을 자랑할 수 없게 된다. 책을 읽다 보면 머리에 지식이 가득 차는 듯한 희열을 맛볼 때가 있는데,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점점 더 모르는 상태가 지속되길 바란다. 여전히 잘되지 않지만, 책에서 읽은 것들을 세상에서 써먹고 싶어 좀이 쑤시지만, 내가 아는 게 진짜 알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한 번 더 물어보려고 노력한다. 두 번 더 읽으면서 계속 물어보려고 한다. (pp. 62~65.)


  그 후로도 나는 지식에 발목 잡힌 사람을 여럿 보았다. 회사에서도 보았고, 우연히 갖게 된 술자리에서도 만났고, 온갖 장소에서 여러 번 자주 보았다(생각해보니, 남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 어쩌면 나도 그랬는지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내가 아는 이야기가 나오면 몹시 흥분하며 뭔가 자세히 설명하려 했을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얄팍한 지식을 보여주려 노력했을 것이다. 지식을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서의 유혹을 이기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모두 얄파간 존재들이니까, 아는 게 거기서 거기인 존재들이니까, 기회가 오면 아는 체해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중략)

  책의 울타리를 미리 쳐놓으면 다른 곳으로 넘어가기 힘들다. 많이 읽는다고 해서 언제나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책을 단순히 많이 읽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좁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아는 것을 안다고 계속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에다 높은 장벽을 쌓는 일이 될 것이다.

  글쓰기는 독서에서 시작된다.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어떤 글을 쓸지가 결정된다. 어떤 책을 읽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도 중요하다. 아무리 새로운 책이라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다면, 그 책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발목을 붙잡는 책이 아니라 계단이 되는 채깅어야 한다. 천천히 읽고, 낯설게 읽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읽고, 두 번 읽고, 이해하며 읽고, 오독하면서 한 번 더 읽고, 읽지 않은 책인 것처럼 한 번 더 읽고, 줄을 그어가며 읽어야 한다. 한 권의 새로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이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pp. 126~128.)


  수많은 작가들의 글쓰기에 대한 충고를 한데 끌어모았을 때, 그 교집합이 최고의 비법일까. ‘열심히 쓴다’, ‘꾸준히 쓴다’ 정도만 교집합에 남아 있겠지. 충고 따위 무시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해설을 보지 않고 문제집을 풀 때처럼, 작가들의 충고는 모두 잊고 혼자서 밤을 꼬박 지새우며 글을 쓰다 보면 저절로 작은 깨달음이 올 때가 있다. 자기만의 공식이 하나씩 생겨나고, 작가들의 충고가 무슨 말인지 몸으로 알게 되는 때가 온다. 그 사소한 깨달음이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다. (p. 132.)


그리고,

절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우리의 임무는 세상을 정리정돈하는 게 아니다. 더 어지럽게, 더 헝클어뜨려서 더 많은 것들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마음껏 어지르자. (pp. 186~188.)


  말은 글보다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글의 경우에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세세한 논리가 내용을 뒷받침해주지만, 그래서 오해의 소지가 적지만, 말의 경우에는 굵직한 논리만 부각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듣고 있는 말을 재구성한다. 다르게 알아듣는다. 말과 글 사이에, 인간의 숙명이 있다. 대화를 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문제다. 대화에는 치밀하고 자세한 논리가 없다. 언뜻 논리적인 말들도 받아 적어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 오직 책을 통해서만 언어의 세세한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문장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수십 수백 번 고친다. 오해가 없도록, 오해가 적도록, 계속 고친다. 책만 읽고 대화를 하지 않는 것 역시 문제다. 책에는 반론이 없고, 피드백이 없다. 책을 무조건 신뢰하는 순간 벽에 갇히게 된다. 언어와 비언어 사이, 말과 글 사이에 인간들이 있다. (pp. 231~232.)


5-1.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서 절대 빼먹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글쓰기'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


네오랩 컨버전스의 네오 스마트펜 N2

처음에 써보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종이에 쓰면 어플리케이션에 자동으로 입력된다. 이곳에 단어를 쓰면 저곳에 단어가 나타난다. N2는 전용 노트가 필요한데, 노트를 잘 살펴보면 ‘N코드’라 불리는 작은 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글씨를 쓸 때마다 N코드 좌표가 만들어지고, 그 좌표를 어플리케이션으로 전송하는 시스템이다. 생각해보면, 상징적인 시스템이다. 글을 쓰는 일은 좌표를 찍는 일이랑 비슷하니까,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니까. (p. 23.)


(전략) 글을 쓴다는 것은 ‘최초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포털의 댓글들이 금방 재미없어지는 이유는 거기에 어떤 ‘정리’와 ‘공감’도 없기 때문이다. (p. 86.)


5-2. 김중혁이 말하는 '쓰기'는 단지 종이에 잉크로 문자를 적어넣거나 키보드를 두들겨 텍스트를 입력하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읽고 무엇을 느꼈는지를 차분히 돌아본 다음, 그것이 언어라는 형태를 통해 온전히 표현되도록 고민하고, 그리고 그 생각이 다른 이에게 온전히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가다듬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일단 쓰라는 김중혁의 주문/주장은 생각나는대로 아무데다 휘갈기라는 뜻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와중에도 늘 돌아보고 고민하고 가다듬으라는 거 아닐까.


5-3. 결국 '쓰기'의 본질은 과정에 있는 셈이다. 그 과정에 충실할 수 있다면, 결과물이 어떠한 꼴을 갖고 있건 그게 무어 대수랴.


  우리는 서로서로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나도 당신도 천재는 아니다. 천재 같은 것은 어쩌면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 우리가 만든 창작물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조차 놀라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떤가. 우리는 만드는 사람이고, 창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의 그 어느 조직보다도 끈끈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인가를 만들기로 작정한, 창작의 세계로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당신을 존중한다. 하찮다고 느껴지는 걸 만들었더라도, 생각과는 달리 어이없는 작품이 나왔더라도, 맞춤법이 몇 번 틀렸더라도, 그림 속 사물들의 비율이 엉망진창이더라도, 노래의 멜로디가 이상하더라도, 나는 그 결과물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건투를 빈다. (pp. 28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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