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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 (리처드 탈러·캐스 선스타인, 리더스북, 200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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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 (리처드 탈러·캐스 선스타인, 리더스북, 2009.)

Dog君 2018. 1. 21. 15:24


0. 엄청난 베스트셀러에 대해서 뭐라든 말을 붙이는 것은 꽤 껄끄러운 일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테니 그만큼 많은 평들이 있을테고, 그러니 내 모자란 지식으로 이렇게나 거칠게 정리할 시간에 잘 정리된 평 하나 더 읽는게 훨씬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르니까. 더욱이 경제학처럼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남이야 뭐라고 썼건 간에 내가 필요한 방식으로, 내가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글의 내용을 정리해보는 것도 아주 불필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싶다. 잘 써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기로 꽤나 오래 전에 마음 먹은 바도 있고.


1-1. 최근에 읽은 경제학 책들을 근거로 아주 조심스럽게 중간결론을 내보자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이라는 모델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경제적 인간’이라는 게, 인간이란 본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는 존재이므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충분한 정보와 선택의 여지만 주어진다면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순간적으로/일회적으로 실수를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체 사례 중에서 일탈한 예외이므로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인간의 합리성이 지켜진다는 것이다.


1-2.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카트리네 마르살의 책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경제적 인간’이라는 모델에 대한 회의가 책 전체의 전제로 깔려 있다. 카트리네 마르살의 경우에는 ‘경제(economy)’라는 단어에는 ‘합리'나 ‘이성’의 의미만을 담아두고, 흔히 여성의 영역으로 상정되는 가사노동이나 감정의 영역은 ‘경제’의 영역에서 분리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경제’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이른바 ‘감성적인 것’이나 ‘여성적인 것’이 배제되어 있는데, 기실 이런 것들을 빼고 ‘경제’를 논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1-3. 리처드 탈러와 캐스 선스타인이 쓴 이 책 역시 비슷하다. 인간이 어떤 (경제적) 판단을 내릴 때, 이성이나 합리에만 기초하는 것이 아니란 거다. 대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심리적.사회적 편향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거지. 인간의 (경제적) 판단이 합리성에 기초한 모델이 아니라 심리적.사회적 편향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편향을 잘 이용하는 ‘넛지’를 통해 개별 주체의 긍정적인 판단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이는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정책 개입에 비해서 그 강도가 크게 낮기 때문에(물론 ‘넛지’와 정책 개입의 경계는 모호하다), ‘큰 정부’론과도 결이 다르다. 아마도 이것 때문에 많은 (정치적) 리더들이 이 책에 주목했겠지.


(전략) 경제학을 공부했든 그렇지 않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하며 따라서 경제학자들이 제안하는 인간 모델에 들어맞는다는 생각 말이다.

  경제학 서적을 들춰보면,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처럼 사고하고 IBM 컴퓨터처럼 뛰어난 기억용량을 갖고 있으며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계산기가 없으면 복잡한 나눗셈을 할 때 어려움을 겪고, 종종 배우자의 생일을 잊어버리며, 새해 벽두부터 숙취로 머리를 쥐어뜯는다. 우리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아니라 그저 호모 사피엔스일 뿐이다. 복잡한 라틴어 대신 부르기 쉽도록 여기서는 그러한 가상의 존재와 실제의 존재를 각각 ‘이콘(Econ)'과 ‘인간(Human)’이라고 부르겠다. (p. 22.)


  넛지는 선택 설계자가 취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을 금지하거나 그들의 경제적 인센티브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고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그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넛지 형태의 간섭은 쉽게 할 수 있는 동시에 그렇게 하는 데 비용도 적게 들어야 한다. 넛지는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다. 과일을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놓는 것은 넛지다. 그러나 정크푸드를 금지하는 것은 넛지가 아니다. (p. 21.)


  우리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가 초당파주의(bipartisanship)의 믿음직한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환경보호나 가족법, 학교 선택권 등을 포함하는 많은 영역에서 보다 나은 거버넌스(governance)는 정부의 강제나 속박 측면에서는 더 적은 것을 요구하고 선택의 자유 측면에서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인센티브와 넛지가 각종 요구사항과 금지사항을 대체한다면, 정부는 더 작아질 뿐 아니라 더 조심성 있는 조직이 될 것이다. 따라서 명확히 하자면, “우리는 더 큰 정부가 아니라 더 나은 거버넌스를 지향한다”는 얘기다. (p. 372.)


  한 가지 문제는 민간부문의 선택 설계자들보다 공공부문의 선택 설계자들이 훨씬 더 걱정스러운 존재인가의 여부이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양쪽 모두를 걱정한다. 민간기관들도 이따금씩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무능력하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행태를 취한다. 표면적으로, 공공부문의 설계자가 민간부문의 설계자보다 언제나 더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어쨌든 공공부문의 관리자들은 유권자들에게 대답을 제시해야 하고, 민간부문의 관리자들은 소비자의 안녕보다는 이윤 및 주가의 극대화를 더 중요시해야 하지 않는가. (중략)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친 것은 부분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이 맺는 계약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무지를 이용당했기 때문이다. (중략) 회의론자들은 자유 사회의 사람들은 틀릴 권리를 갖고 있으며 때로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모종의 가르침을 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중략)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양의 학습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아이들이 수영장에 빠져 운을 시험해보는 방식으로 수영장의 위험성을 배워야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런던의 보행자들이 ‘오른쪽을 봐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기 위해 굳이 이층버스에 치어봐야겠는가? 인도에 경고문을 설치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pp. 350~354.)


2. 그래서 그런가, 이 책에는 숫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이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숫자로 환산가능한 어떤 것들에 의지하지 않거든. 대개의 경우 그 판단들은 각 개인의 경험이나 사회적 환경에 의해 형성된 편향에 따라 결정될 뿐이니까.


  파리의 지하철 시스템의 경우, 사용자들은 영화표만한 종이 카드를 기계에 넣는다. 그러면 기계는 카드를 읽고 그 위에 '사용했음'이라는 기록을 남긴 다음, 상단으로 다시 뱉어낸다. 카드는 한 면에 마그네틱 선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양면이 똑같다. 탈러는 처음 파리에 갔을 때, 이 시스템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그네틱 선이 위를 향하도록 넣어봤는데 다행히도 기계가 적절하게 작동했다. 이후 그는 늘 마그네틱 선이 위를 향하도록 카드를 넣었다. 몇 년 후에 다시 파리에 간 그는 역시 파리를 방문한 친구에게 자랑스럽게 지하철 시스템 이용법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의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보니 카드를 어느 쪽으로 넣든 전혀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p. 143.)


3. 물론 정책 결정처럼 기회비용이 큰 경우에는 합리성의 크기가 더 증가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관점에도 명확히 선을 긋는다. 그러니까 정책 결정의 경우에도 이 책의 모델은 그대로 성립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판단주체의 숫자가 늘어나도 저자의 주장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남한처럼 정책결정권이 소수-때로는 단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경우에는 더 말해 무엇하랴!)


(전략)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은 심리학 실험들을, 오직 ‘판돈이 낮은 경우’를 위해서만 고안되었으며 종종 사람들에게 충분히 학습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해왔다. 그들은 판돈이 올라가고 연습의 기회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올바르게 이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는 최소한 두 가지의 문제가 존재한다. 첫째, 판돈이 올라간다고 해서 성과가 개선된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어떤 것에 대해서든 최초 추정을 할 때에는 판돈이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캐머러와 호가스(Hogarth)(1999) 참조]. 두 번째로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경제학은 인생의 커다란 결정들을 설명하도록 도와야 하는데, 이러한 결정들은 연습의 기회 없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후략) (p. 122.)


4. 그래서 나에게는 이 책이, 어떤 인간이 내린 어떤 (경제적) 결정을 본석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이 좀 더 많거나 혹은 전혀 다른 것들을 살펴야 한다는 의미로 읽혔다. 그러니까 경제 분야에서 읽을 수 있는 몇 가지 정책 결정 같은 것을 설명할 때 덧셈뺄셈만으로 설명해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고, 그러한 대차대조표 이상의 다른 맥락들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 단위의 정책 결정을 포함한) 경제사를 논할 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다.


5. 여기까지 생각을 끌고 오니까, (경제학에서 출발한 경제사 연구와 다른) 역사학에서 출발한 경제사 연구의 장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감이 오는 것도 같다. 인간과 경제라는 것이 결코 합리와 이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온전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표와 그래프 속의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맥락들까지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 뭐 그 정도일까. 이걸 또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다듬어야 할지는 청탁받은 원고 쓰면서 더 고민하기로 하자. (왜냐면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일요일 오후이고, 나는 더 이상 일/글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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