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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 (임태훈 외, 알마, 2017.)

Dog君 2018. 2. 13. 18:16


1-1. 작년 가을께, 7주 정도 교육을 받았다. 교육의 기본목표는 신규자를 위해 업무능력을 함양하는 것이었는데, 중간중간에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교양 과목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4차산업혁명’으로 채워졌다. 그냥 산업혁명이라고 하면 대충 뭔지는 아는데, 나도 모르는 새에 2차와 3차 혁명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는 강사들마다 입을 모아 혁명 혁명 하길래, 내가 지금 제정 말기의 러시아에 버금가는 혁명적 시기에 살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막 그랬다. 


1-2. 그렇게 한참이나 혁명을 호소하는 삐라를 뿌리...는 것은 아니고, 뭐 암튼 계속 그렇게 혁명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정작 그 기술혁신의 시대에 우리 같은 보통의 인간은 뭘 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강사는 없었다. 알파고와 인공지능이 열어갈 장밋빛 미래를 늘어놓다가 ‘너네들 직장 이거, 임마, 몇 년 만 지나면 다 없어지거든? 너네 다 좆됐어, 임마’하는 경고 메시지도 간간이 섞어 주는 건 나도 이해하겠는데, 그래서 뭘 어쩌라고, 싶었다. 


2. 기술 수준은 ‘4차 산업혁명’에까지 이르렀지만, 그 기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여전히 70년대에 머무른 듯 하다. 기술이 열어올 미래에만 도취되어 그것을 가능케 했고 또한 그것에 수반될 인간과 사회의 문제는 일단 뒤로 미뤄놓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가치중립적으로 올바른 것으로만 이해되었던 것 같다. 그 자체로는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닌, 마치 일종의 현상이나 조건에 불과한 것처럼 인식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했던 적은 없다. 과학과 기술은 언제나 사회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이었기에 그것은 언제나 ‘담론’이었다. 


  불길한 변화가 벌어지고 있다는 진단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지난 십여년 사이에 스마트폰은 정점을 지난 한물간 기술이 되고 말았다. 스마트폰은 ‘테크노컬처’의 심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치였다. 스마트폰 이후로 새로운 대세를 형성하리라 기대받는 차세대 기술은 인간의 존엄과 자율, 건강한 사회 공동체의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기보다 독점기업과 금융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뒤쫓고 있다. 인터넷 환경도 심각하게 오염됐다. 인터넷은 집단지성을 활용하는 촉매제라고만 볼 수 없게 됐다. 일베와 그 아류들이 온갖 사이트에서 증식하는 집단저능 배양기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세태가 이럴진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기대를 담은 개념으로 파악하는 건 순진한 일이다. (중략)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비판적으로 상대화시킬 수 있는 기술 프레임이 필요한 시대다. (중략) 존 바텔John Battelle을 비롯해 ‘테크노컬처’라는 말을 유행시킨 《와이어드》의 필자들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기술 생태계의 최종 진화형으로 간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기술사의 흐름은 관심 밖이었다. 그들에게 역사란 큰돈이 움직이는 방향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기술은 인간만이 독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기술사는 바이러스에서 로봇에 이르는 비인간들의 역사이면서 바위와 산, 유기체의 세포 단위로 모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하는 무기화합물의 역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술은 인간의 힘만으로 개발되지 않는다.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구성성분 간의 다양하고 유기적 협동 현상의 일원으로서 인간은 기술을 촉발한다. 기술사의 인간 중심주의 혹은 발명하는 근대 주체의 신화학이란 자본주의적 시장질서에 폐색된 사고로부터 비롯된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테크노 컬처에서 누가 돈을 벌게 되는지를 따져본다면 다른 평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이가 유튜브의 개인 채널에 유명 드라마의 패러디 영상을 올려서 몇백만 명이 시청하는 인기를 얻었다 해도, 돈을 버는 건 콘텐츠 생산자가 아니라 유튜브다. 테크노 컬처의 창조적 역량과 비전은 수많은 이들의 인지노동을 빨아들여 부당한 이익을 얻는 플랫폼 사업에 전유됐다. 정치 경제의 측면에서 봤을 때, 21세기 테크노 컬처는 20세기 매스 컬처보다 나아진 게 아니다. (중략) 문화는 권력이 작동하고 경제와 결합하여 담론의 중층적인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세계다. 테크노 컬처도 예외가 아니다. 이 용어를 마땅히 휩쓸려 들어가야 할 아수라장으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 (임태훈, 「책을 펴내며: ‘테크노컬처’ 고쳐 쓰기」, pp. 6~7.)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4차산업혁명의 최대 수혜자는 플랫폼 자본을 장악한 소수의 기업으로 집중될 것이다. 소득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14.2%를 차지하고 소득 상위 10%가 48.5%의 부를 장악한 대한민국은 초독점사회로 진입할수록 한층 더 가혹한 소득 격차에 직면할 것이다. 가계부채는 2016년 4분기를 지나며 1300조 원을 돌파했다. 이 상황에 금리가 1%만 올라도 전체 가계의 추가 이자 부담은 9조 원에 달하고 7만 가구가 파산한다. 

  2017년은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줄어들기 시작하는 인구 절벽 원년의 해다. 바닥을 친 출산율은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18세에서 29세 청년 중에서 정규직은 단 7%에 불과하다. 도대체 이런 나라에서 청년이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이런 현실을 바꾸는 일에 4차산업혁명이 뭘 약속할 수 있을까. 4차산업혁명은 이 나라가 준비해야 할 불가피한 미래인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미래는 없는 건가. 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은 4차산업혁명이 세계 경제의 대세라고 선언했다. 그들이 말하는 미래가 우리를 더불어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그들이 대세라고 정하면 우리는 매질을 당하는 가축처럼 끌려갈 수밖에 없는 신세일까. 문재인 대통령의 선한 의지를 믿고 선정善政이 이뤄지기만을 기다릴 게 아니라, 우리들이 살고자 하는 사회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는 과정이 절실하다. 

  4차산업혁명을 당위가 아니라 선택지의 하나로 놓고 따져보는 논의가 이번 대선에선 절망적으로 결핍되어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 시절의 창조경제를 극복할 경제 정책을 내놓고자 한다면, 재벌과 토건족의 이익보다 노동자들의 삶을 우선적으로 챙겨야 한다. 노동의 질서가 곧 세상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99%의 노동자가 일평생 가난의 비참에서 헤어날 수 없는 사회는 정상적인 세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니 외국 정책과 성공 사례를 모방하는 일에 더는 한눈팔 때가 아니다. 우리의 엄중한 현실에 집중할 단어는 ‘4차산업혁명’이 아니라도 아주 많다. (임태훈, 「4차 산업혁명, 인간농장의 새 슬로건」, pp. 60~61.) 


3. 마치 이 나라의 역사에서 ‘경제’가 그랬던 것과 같다. 과학이나 기술이나 경제는 늘상 ‘발전’이라는 척도를 통해 평가되곤 했는데, 그 ‘발전’은 곧 선한 것이고 더 나은 것이었다. 그러한 가치판단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는, ‘발전’ 자체를 상대화해야 한다는 내 입장에서 볼 때, 과학과 기술을 ‘담론’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이 책의 주장은 분명히 경청할 필요가 있다. 


ps. 자잘한 사실관계를 알아가는 재미도 굉장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전공, 경제와 과학기술의 중간에 걸쳐 있으니까 나도 이런 공부 좀 해보면 안 될랑가. ㅋㅋㅋ 그래서 그런가, 이 중의 몇몇 저자는 일부러 글을 찾아 읽고 싶을 정도로 내게 흥미로운 화두를 많이 던져주었다. 


  1970년대 정부 정책의 방향은 명확히 ‘동력 경운기 중심의 기계화’였다. 정부는 한국, 일본, 대만이 공통적으로 경운기를 ‘중추기계’로 선정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유경제 체제인 이들 나라에서 자유농민들은 자신이 소유한 경운기로 영농활동을 했다. 반면 대규모 국유농장을 운영하는 통제경제체제인 북한에서는 ‘농노農奴적 위치’의 농민들이 트랙터를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통계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북한은 트랙터를 4만1천대 보유하고 있을 뿐 경운기는 한 대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경운기라는 테크놀로지가 영세한 농촌의 현실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경제체제를 반영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략) 1970년대 한국의 관료들이 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던 경운기는 이제 당시에는 사회적 비난을 받았던 간편한 운반수단으로 주로 이용되고 있다. (중략) 이렇듯 똑같은 기계도 사회경제적 여건이 변화함에 따라 상이한 용도로 이용될 수 있다. (최형섭, 「농기계 소리 메아리치는 농촌」, pp. 148~150.) 


  청계천의 전자 조립업체들은 대량주문을 소화할 만큼 많은 인력과 고급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새로운 게임기가 나오면 5일 안에 초정밀 필름을 입수하여, 칩보드를 풀어서 금성반도체로 다시 구성해 해적기판을 만들었다. 집적회로가 카피되는 과정에서 보드가 상당히 커졌다. 좌우로 회전하게 되어 있던 볼륨조절 보드에 자동차 중고 핸들을 가공해 조립하여 레이싱 게임의 조이스틱으로 사용하게 하는 등 말도 안 되는 수법이었지만, 일제나 미제의 오리지널 게임기의 성능을 거의 그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능력도 보여주었다. 당시 기술자들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의 게임기판 제작 실력을 점쳐보기도 했다. 

  ‘갤러그gallag’의 원 게임 명칭은 ‘갤러가galaga’다. 하지만 당시 청계천에서 주로 복제하던 기판이 해적기판이었기에 하단의 남코Namco사 타이틀이 사라지고, 제목도 ‘갤러그’로 표시되었다. 통상 해적판의 경우 오리지널에 비해 조악한 품질로 몇 년이 지나면 작동하지 않거나 비디오나 오디오 출력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갤러그 기판은 갤러가 기판과 비교해 성능이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영진, 「전자오락실 점령한 갤러그 전성시대」, pp. 225~226.) 


ps2. 물론 이 책에도 단점은 있다.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인데다가 저자가 여러 명이기 때문에 글 사이의 고저차가 좀 있는 편이다. 심지어는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아니, 저자들 사이에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정도로 조율과 평준화가 안 되어도 괜찮나. 예컨대 아래 인용문 같은 부분을 보면... 음... 아무래도 앞에서 진지하게 깔아둔 문제의식과는 충돌하는 느낌. 


  흔히 자율주행 자동차에 대해 가장 많이 제기하는 문제가 자동차가 피할 수 없는 사고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직진하면 사람 다섯 명을 치게 되고 방향을 틀면 한 명만 치게 되는 경우 기계가 어떤 윤리적 판단을 내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왜 사람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기계더러 풀라고 하는 걸까? 자율주행 자동차에 윤리적인 문제까지 다루라고 하면 기계에 대해 지나친 요구를 하는 것 아닌가? 또한 자율주행 자동차가 기계적 오류를 일으킬 것에 대해 걱정하는 이들도 많은데, 기계적 오류의 확률이 없지는 않으나 인간이 일으키는 온갖 다양한 원인의 오류에 비하면 훨씬 적을 것이다. 인간은 화가 났다고, 술 먹었다고, 시간 없다고 과속을 하거나 신호를 위반하지만 기계는 그런 오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령 운전자의 사고가 급증하고 있는데, 자율주행 자동차는 이런 문제도 해결할 것이다. (이영준, 「드론과 자율주행 자동차」, p.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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