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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민음사, 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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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민음사, 2017.)

Dog君 2018. 2. 6. 15:26


1. 제목이 좀 거시기해 보이지만, 저자가 말하는 '게으름'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계층의 독단적 규정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많은 일을 하는 것"(p. 9.)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며 너도나도 얼리버드가 되기를 기원하다가, 급기야는 마 4차산업혁명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내일이라도 당장 인생의 낙오자가 되고 말 거라는 듯이 위기감을 조장하는 요즘 시대에는 좀 안 맞아보이는 이야기이기는 하다. 근데 글타고 낮밤도 없이 열심히 일만 하고 살면, 그게 또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라는 거, 적어도 우리 세대는 경험적으로 다 깨우치고 있는 거 아닌감. 죽어라고 열심히 일하고 났더니, 자식새끼는 나랑 말도 안 해주고,  가족 내에서 내 위치는 애매하고, 술 마시는 거 말고는 딱히 취미나 여가활동 하는 법도 못 배웠고... 머 그런 얘기들 많잖아.


  모두가 돈벌이가 되는 직업에 종사해야 하고 이에 불참할 경우에는 책임 모독죄를 묻는 법령에 저촉되어 거의 열광적으로 노고를 기울여야 하는 바로 요즘 세태에, 충분히 가진 것에 만족하고 주위를 돌아보며 즐기자고 주장하는 다른 편의 외침은 허세와 허풍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리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게으름이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계층의 독단적 규정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근면성 못지않게 그 입장을 진술할 타당한 권리가 있다. (후략) (p. 9.)


  그러나 그의 분주한 습성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은 그 자신만이 아니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 친구와 친척, 기차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고통을 받는다. 인간이 자기 일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지속적 헌신은 다른 것들을 지속적으로 소홀히 해야만 유지될 수 있다. 인간의 일이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인지는 결코 명확하지 않다. 공정하게 평가하자면, 인생의 극장에서 가장 현명하며 덕스럽고 선을 베푸는 일을 하는 사람은 무보수 연기자들이다. 이 일들은 분명 세상 사람들에게 한가롭게 여겨진다. 극장에서 빈둥거리는 신사와 노래하는 청소부, 오케스트라의 근면한 바이올린 연주자뿐 아니라 관람석에서 바라보고 박수치는 사람도 실로 자기 나름의 역할을 하며 전체적 결과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분은 여러분의 변호사와 증권 중개인, 여러분을 신속히 이곳저곳으로 실어다 주는 호위병이나 철도 역무원, 여러분을 보호하기 위해 거리를 순찰하는 경찰에게 다분히 의존한다. 그러나 마주쳤을 때 미소가 떠오르게 하거나 즐겁게 동석하여 저녁 식사의 풍미를 돋워 주는 다른 은인들에 대한 고마움 역시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가? (중략) 우리가 가장 과소평가하는 의무는 행복이다. 행복함으로써 우리는 익명으로 세상에 은혜의 씨앗을 뿌린다. 그 씨앗은 우리도 모르게 남아 있고, 그것이 싹을 틔울 때 가장 놀랄 사람은 바로 그 씨를 뿌린 사람이다. (중략) 따라서 빈둥거려야만 행복한 사람이라면 빈둥거리며 지내야 한다. 이것은 파격적인 원칙이다. 다만 기아와 구빈원 때문에 그리 쉽게 남용될 수 없는 원칙이다. 현실적인 한계 내에서 이 원칙은 모든 도덕률 중에서 가장 반론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pp. 17~20.)


2. 그렇게 살아봐야 어차피 이룰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으니까. 아니, 요즘처럼 불안정한 시대에는 어차피 애초부터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는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과정을 어떻게 잘 수행할 것인가만 남는 거 아닐까. 잘 하려는 강박과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건 자기 존중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자존감이 더 필요하지 않을랑가.


  우리는 쉬는 시간도 아까워하면서 불가능한 희망을 향해 끊임없이 행군해 나아가며 기이한 광경을 연출한다. 불굴의 모험적인 개척자처럼 구는 것이다. 실로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할 리 없다. 그곳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우리가 수백 년을 살고 신의 능력을 갖추더라도, 결국에는 우리가 원했던 데 그리 가까워지지 않을 터다. 오, 힘겹게 일하는 인간의 손이여! 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싫증 내지 않고 내딛는 발이여! 머잖아 곧 눈에 띄는 산꼭대기에 이르고 아주 조금만 더 가면 지는 해를 배경으로 엘도라도의 뾰족탑이 불현듯 보일 것만 같다. 여러분은 자신이 받은 축복을 알지 못한다.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것은 도착하는 것보다 낫다. 진정한 성공은 힘겨운 노력 자체이기 때문이다. (pp. 26~27.)


  나는 파리에 도달한 지금 뉴헤이븐과 디에프를 거쳐 온 것이 부끄럽지 않다. 들르기 아주 좋은 곳들이었고, 그렇게 거쳐 왔어도 목적지에 도달했다. 내가 예전에 지녔던 의견은 지금 갖게 된 견해에 이르는 노상의 여러 단계였을 뿐이고, 지금의 견해도 다른 견해로 이르는 단계에 불과하다. 나는 젖 먹는 아기였던 시절이 부끄럽지 않듯이 내 나름의 만능 해결책을 지닌 맹렬한 사회주의자였던 것이 창피하지 않다. 물론 세상은 수많은 면에서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으려면 조금은 혹독한 시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 뭔가를 하고 뭔가가 되고, 뭔가를 믿어야 한다. 마음을 정확히 균형 잡힌 공백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궁극적으로 올바른 결론에 이르기보다는 균형 잡힌 공백 상태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중간 단계에 있을 뿐이더라도 열정을 품은 것은 나중 회고할 때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성 바오로가 대단히 열성적인 바리새인이 아니었더라면 냉정한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후략) (pp. 45~46.)


3-1. 내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것. 그리고 무슨 일을 하건 그 과정 자체를 즐길 것. 그래야 오래 할 수 있다는 것. 대체로 내 생활신조에 부합하는 것 같아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3-2. 아차차, 사실 글의 내용은 나를 즐겁게 했지만, 100년도 더 전에 쓰여진 글이라 그런지 문체는 나랑 심히 맞지 않다. 책의 의미를 그나마라도 이해하려고,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어야 했다. ㅠㅠ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불편할뿐더러 부자연스럽다고 판단해서 질투심을 억제한다. 이는 온당치 않다. 성미가 고약한 신하처럼 질투심이 섬기는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도 바로 동일한 의미에서 동일한 정도로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반박은 질투심이 늘 있던 인간의 특성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천지개벽이 일어났을 때 인간이 지녔을 소박한 감정 구성에 질투심은 포함되지 않았고, 오래 지난 후 시절이 나아지고 만물이 풍부해진 다음에야 등장했을 것이다. 사랑이나 우정, 조국애, 이른바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기쁨, 가치가 있는 감정은 대부분 마찬가지다. 특히 역사적으로 세밀하게 검토한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배겨 내지 못할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이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시가와 다른 나라에서, 가령 그리스에서 사랑이 과연 어떠했을지 묻기 시작하면 기이하기 짝 없는 의혹이 일기 시작하고 온통 모호하고 색다르게 보여서, 그에 비하면 꿈이 오히려 논리적으로 여겨질 지경이다. 어떻든 질투심은 살아이 빚은 결과 중 하나다. 여러분이 임의대로 좋아하든 말든 질투심은 여기 존재한다. (pp. 98~99.)


  하지만 그를 아직 세상에 붙들어 주는 다정한 끈이 많이 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인에게 그렇듯 그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가 자비로운 사람이었고 인생을 개인적 쾌락과 출세라는 좁은 구멍이 아니라 더 넓은 시각에서 보아 왔다면, 희한하게도 그의 생각 일부는 죽음이 다가와도 그리 달라지지 않고 회한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들판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쟁기질 하는 사람의 뒤를 따르고, 떼까마귀는 씨를 뿌리는 사람의 뒤를 따른다는 영어권 속담을 그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이 살아생전에 고국에 돌아가서 밀밭에 싹이 트고 여물어 마침내 추수한 곡물을 즐겁게 집으로 운반하는 광경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앞으로의 추수와 지속되는 가뭄이나 때 아닌 장마에 그는 여전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는 자신과 무관한 사건의 결과를 흥미로이 오랫동안 기다리곤 했고, 자신에게 필요한 일정한 식량에 빵 반 덩어리도 더 늘리거나 줄이지 않는 풍작에 기뻐하고 기근에 슬퍼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삶의 위안이자 영감이었던, 인류의 나은 미래에 대한 사심 없는 희망은 변함없이 남아 있다. 이 희망은 그의 일신을 위협하는 운명이 미칠 수 없는 곳에 세워져 있다. 그러므로 그가 애써 충실하게 추구해 온 태평성대가 도래하기 5000년 전에 죽든지 5050년 전에 죽든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는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았다. (pp. 131~132.)


  도보 여행을 제대로 즐기려면 혼자 떠나야 한다. 떼 지어 가거나 둘이 떠나도 이름만 그렇지 실은 도보 여행이 아니다. 그것은 소풍에 가깝다. 도보 여행은 반드시 자유로워야 하므로 홀로 떠나야 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멈추거나 계속 갈 수 있고 이 길이나 저 길로 갈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보폭대로 걸어야지 경보 선수 옆에서 초총걸음 치거나 아가씨와 보조를 맞춰 맵시 내며 걸어서는 안 된다. 또한 마음이 온갖 인상에 열리고 생각이 눈에 보이는 풍경에 물들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온갖 바람에 울리는 피리 같아야 한다. “걸음을 옮기면서 말하는 것은 지혜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시골에 있을 때는 시골처럼 단조롭게 지내고 싶다.”라고 해즐릿은 말한다. 바로 이것이 도보 여행에 대한 모든 진술의 핵심이다. 아침의 사색적 침묵을 바로 곁에서 깨뜨릴 거슬리는 목소리가 없어야 한다. 사람이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야외의 많은 움직임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도취에 빠질 수 없다. 그 도취는 느긋해진 두뇌의 황홀경으로 시작해서 이해할 수 없는 평온함으로 끝난다. (pp. 138~139.)


4.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아래 인용. 원래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 중에 나오는 데, 그냥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에 관한 이야기로 읽어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사람 말이라는게 '말하는 사람'만큼이나 '듣는 사람'도 중요하다. 텍스트의 의미는 발화자가 발화할 때도 생겨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받아들일 때 생겨나기도 하니까.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말을 잘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의미는 곧잘 왜곡되곤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법도 알아야 하지만, 사랑받는 법도 알아야 한다... 뭐 이런 말씀. 복잡하게 포스트 어쩌구 하는 이론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냥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잖아, 이건.


  내가 읽은 현대 작품의 가장 숭고하고 유익한 문단에서 소로는 “진실을 말하는 데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라고 말했다.(원주-『콩코드와 메리맥 강에서의 한 주』, 「수요일」, 283쪽.)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경험이 거의 없거나 진실에 대한 열망이 크지 않을 것이다. 말에 일말의 분노나 의혹이 스며들면 기이한 음향효과가 생겨서 듣는 사람으로서는 불쾌한 모욕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러므로 전에 말다툼을 한 사람들은 서로 냉담하게 처신하고 언제라도 휴전을 어길 태세가 되어 있다. 진실을 말하려면 정신적으로 대등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중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부모 자식 간 교류는 말로 하는 펜싱 시합으로 전락하기 쉽고 오해가 깊이 박히기 쉽다. 여기에 또 다른 면도 있다. 부모는 자식의 성격에 대해 어린 시절이나 질풍노도의 청년기에 형성된 불완전한 견해를 품는다. 부모는 그 생각에 집착하여 자신의 선입견에 맞는 사실만을 주목한다. 사람은 자신이 부당한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할 때 진실을 말하려는 노력을 가차 없이 즉시 포기한다. 반면에 좋아하는 친구나 나아가 연인 사이에서는 (상호적 이해가 사랑의 본질이므로) 한쪽이 쉽게 진실을 보여 주고 다른 쪽은 적절히 이해한다. 하나의 암시나 표정이 장황하고 미묘한 설명의 요지를 전달한다. 인생을 이해할 때는 예, 아니요라는 대답도 빛을 발한다. (후략) (pp. 109~110.)


ps. 19세기에 쓰여진 책이니 당연히 요즘 관점에서 볼 때 영 아니올시다- 싶은 부분이 있다. 예컨대 남녀관계와 결혼에 관한 구절 같은 것.


  그러나 안락한 결혼은 결코 영웅적이지 않다. 결혼은 분명 너그러운 남자의 정신을 편협하고 무디게 만든다. 결혼한 남자는 해이해지고 이기적이 되며, 그의 도덕성은 기름이 껴서 변질한다. (중략) 난롯가의 따뜻한 분위기는 남편 마음속의 근사한 야성을 완전히 말려 버린다. 그는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해서, 아내를 포함해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안락과 행복을 선호하기 시작한다. 어제는 남은 동전 한 닢까지도 남들과 나누었을 테지만, 오늘 “그의 첫 번째 의무는 자기 가족”이다. 그는 포도주를 쌓아 두고 지극히 소중한 가장의 건강을 관리하는 것으로 그 의무를 대부분 완수한다. 이십 년 전에 이 남자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용감한 행위를 감행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쪽에도 적합하지 않다. 그의 영혼은 잠에 빠져서, 어떤 말로도 깨울 수 없다. 돈키호테가 총각이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결혼을 잘못 한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여자에게는 이런 위험이 훨씬 적다. 여자에게 결혼을 쓸모가 많고, 인생의 더 많은 부분을 열어 주며, 훨씬 더 자유롭고 유용하게 살아가게 해 준다. 그러므로 여자는 결혼을 잘하든 못하든 간에 어떤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실로 가장 명랑하고 진실한 여자는 노처녀이고, 노처녀들과 결혼 생활이 불행한 아내들이 진정한 모성적 손길을 지닌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사실은 안락한 결혼 생활이 여자에게도 무언가를 제한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듯하다. 그럼에도 법칙은 확고하다. 뛰어난 남자와 여자를 고르고 싶다면, 좋은 총각과 좋은 아내를 선택하라. (pp. 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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