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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학자들 (이정환, 생각정원, 20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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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학자들 (이정환, 생각정원, 2014.)

Dog君 2018. 3. 1. 15:28


0. 어떤 책에 거의 비슷하게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는 것은 저자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 거기에 있다는 뜻이다. 이 책에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편집이나 교정교열 과정에서 걸러냈어야 할 실수지만, 다르게 말하면 이것이야말로 저가가 정말로 강조하고 싶은 문제라는 뜻이기도 하다.


  재벌 개혁은 여전히 한국 경제의 중요한 화두입니다. 한국 사회의 어느 누구도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재벌 총수 일가의 탈법과 불법 행위를 눈감아주자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재벌 개혁이 절실한 과제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재벌 개혁만 하면 양극화가 해소되고 일자리가 늘어나고 성장률도 높아질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정치적 말장난입니다.

  재벌을 건드려서 고용 없는 성장과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재벌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면 저절로 경제가 살아날 거라고 믿는 것만큼이나 허망한 일이죠. 장하준 교수와 김상조 교수의 오랜 논쟁이 계속 겉도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합니다. 재벌과의 타협을 이야기하는 동안 재벌은 정치권을 구워삶아 제도를 바꿔버렸습니다. 재벌 규제 이슈는 변죽만 울리는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변질됐고요.

  지난 대통령 선거(2012년 대선-옮겨쓴이) 때 반짝 유행했던 경제민주화라는 키워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장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자유방임의 시장이 민주주의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서 필요하다면 정치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의미일 텐데요. 정치의 개입이나 민주적인 통제 모두 양날의 칼이고 이중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재벌 개혁도 중요하지만 고용 없는 성장과 소득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제민주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복지 전망이 없는 경제민주화는 거짓이며 비정규직 문제를 돌보지 않는 경제민주화는 위선이고 기만입니다. 순환출자 금지나 출총제 부활, 금융산업 분리 강화 등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최저임금 인상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그리고 노동자의 경영 참여 확보입니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방치하면서 재벌만 개혁하면 이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질까요? 재벌의 이익을 억제하면 죽어가던 중소기업들이 살아날까요? 학자들의 갑론을박과 정치인들의 요란한 구호, 언론의 호들갑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것은 진보 진영의 무기력과 방관입니다. 재벌은 때려잡아야 하고 성장보다는 분배가 우선이고 관치금융은 사라져야 하는 등등 교과서적인 답변을 줄줄 외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죠. (pp. 24~26.)


  재벌 개혁이 절실한 과제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재벌 개혁만 하면 양극화가 해소되고 일자리가 늘어나고 성장률도 높아질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너무나도 뻔한 정치적 말장난입니다. 재벌을 건드려서 고용 없는 성장과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재벌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면 저절로 경제가 살아날 거라고 믿는 것만큼이나 허망한 일이죠. 장하준 교수와 김상조 교수의 오랜 논쟁이 계속 겉도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민주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장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자유방임의 시장이 민주주의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서 필요하다면 정치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의미일 텐데요. 재벌 개혁도 중요하지만 고용 없는 성장과 소득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제민주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복지 전망이 없는 경제민주화는 거짓이며 비정규직 문제를 돌보지 않는 경제민주화는 위선이고 기만입니다. 순환출자 금지나 출총제 부활, 금융산업 분리 강화 등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최저임금 인상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그리고 노동자의 경영 참여 확보입니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방치하면서 재벌만 개혁하면 이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질까요. 재벌의 이익을 억제하면 죽어가던 중소기업들이 살아날까요.

  학자들의 갑론을박과 정치인들의 요란한 구호, 언론의 호들갑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것은 진보 진영의 무기력과 방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p. 306~307.)


1. 기획 단계에서는 이 책의 제목으로 고려된 것은 ‘삼성사용설명서’였다고 한다. 재벌 개혁 문제를 다룬 이 책의 제목이 이렇다는 것은 ‘삼성’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재벌 일반을 지칭하는 일반명사 혹은 대명사라는 뜻일테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는 삼성그룹을 둘러싼 여러 경제학자들의 어지러운 논전을 설명하고 있지만 이 책은 단지 삼성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권력과 결탁한 자본권력의 문제,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를 어떤 식으로 변화시킬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말 무서운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확보한 삼성이 하나의 사회적 가이드라인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삼성전자서비스 위장도급 논란과 노동조합 탄압은 단순히 이 회사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삼성전자 집단 백혈병 사태 역시 마찬가지고요. 명백한 불법행위를 정부가 외면하고 방조하고 언론도 쉽사리 건드리지 못합니다. 삼성이 버티면 거대한 법의 구멍이 생겨나고 다른 기업들도 그 치외법권 지대에 안주하게 되는 거죠.

(중략)

  결론은 이겁니다. 삼성을 버릴 각오를 해야 삼성을 넘어설 수 있고 삼성을 넘어서야 비로소 우리 사회의 변화를 모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죠. 이 책은 한국 사회가 삼성과 공존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지만 다양한 층위의 관점과 주의·주장을 펼쳐놓고 비교·분석하면서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를 우선순위에 둬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에 더 큰 비중을 뒀습니다. (pp. 7~9.)


2-1.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줄기는 장하준이 제기한 이른바 ‘사회적 대타협’론이다. 한국 경제에서 재벌이 그간 수행했던 역할과 위상을 따져볼 때, 재벌을 (다분히 감정적으로) 두들겨 패기만 해서는 득보다는 실이 더 많기 때문에 오히려 재벌의 현실적 위치를 인정해주는 대신 재벌이 제 역할을 수행하도록 딜을 하자는 것이다. 재벌이 시장에서 수행해야 할 일은 크고 안정된 자본을 바탕으로 한 연구개발과 신규시장 개척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소액주주운동 같은 것은 단연코 피해야 한다. 기업이 장기적인 투자보다는 단기적인 손익에 매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장하준·정승일과 김상조·장하성의 경계가 그어진다.


2-2. ‘국가의 역할’이라는 책에서도 강조했듯이 장하준은 ‘보이지 않는 손’을 믿지 않는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애초부터 성립 불가능할 뿐더러 특히 동아시아의 경제성장과정을 살펴 봐도 국가권력과 무관한 자유로운 성장이라는 것은 어디서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조 스터드웰의 ‘아시아의 힘’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스티븐 S. 코언과 J. 브래드퍼드 들롱이 쓴 ‘현실의 경제학’에서도 비슷한 관점을 찾을 수 있다. 이 책도 어서 정리해야 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시장질서를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국가가 가진 법과 제도라는 틀을 이용해 재벌을 통제가능한 영역으로 묶어두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다. 어차피 국가와 시장이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양성화하자는 것이다. (그게 음성적인 ‘정경유착'보다는 나으니까) 생각 없이 재벌을 두들겨 팼다가는 도리어 초국적 투기자본에게만 좋은 일을 하는 어부지리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는 것.


  흔히 비판하는 것처럼 재벌의 과잉 투자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 경제가 지난 50년 동안 과잉투자 때문에 성장해왔다는 게 장하준 교수의 주장인데요. 삼성전자와 포스코를 비롯해 반도체나 철강, 자동차, 조선 등 한국 경제의 전략 산업들이 재벌의 선도적인 모험 투자 덕분에 가능했다는 거죠. 다시 말해 국가의 지원을 받는, 또는 국가 권력과 유착된 재벌이라서 그런 압축적인 고도 성장을 견인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개혁이 진행되면서 단기 실적을 좇는 주주 자본주의가 확산됐습니다.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목표가 서면 설비 투자를 늘리기보다는 현금을 쌓아두고 부채 비율을 낮춰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늘리도록 기업을 압박하게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당연히 일자리가 줄어들고 장기적인 성장성도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게 장하준 교수의 주장입니다. (p. 43.)


  장하준 교수는 재벌을 쫓아내면 그 자리를 초국적 투기자본이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깔고 주장을 풀어 나갑니다. (중략) 장하준 교수는 결국 재벌과 초국적 투기자본,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를 묻고 있는 건데요. 재벌을 앞장 세워 초국적 투기자본의 공격을 막는 게 한국 경제가 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게 장하준 교수의 결론입니다.

(중략)

  저는 장하준 교수를 여러 차례 인터뷰하고 기사를 썼는데 (중략) 언젠가 “한국 사회에 다시는 대우그룹 같은 모험 투자를 하는 기업 집단은 나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던 게 기억납니다. 흔히 대우그룹이 은행 대출을 끌어 쓰다가 못 갚아서 망한 걸로 알고 있지만 IMF 이전까지만 해도 기업 금융과 모험 투자가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이었죠.

  IMF 이후 기업들의 부채비율이 많이 낮아지고 재무 건전성도 개선됐지만 한국 경제의 역동성은 크게 떨어졌습니다. 현금을 쌓아두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공장을 짓거나 기술을 개발하는 데 머뭇거리는 기업들도 많습니다. 이미 고도 성장의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명분으로 단기 실적을 강조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게 장하준 교수의 주장입니다. (pp. 48~50.)


2-3. 장하준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장하준이 재벌이 뭐 예뻐서 이런 말을 하겠냐. (그러니까 재벌 앞잡이라는 감정섞인 비판은 제발 그만...) 하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고서라도 장하준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더 가능하다. 무엇보다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그러니까 ‘어떻게’라는 각론이 없다는 게 일단 가장 큰 약점이다. 아래에 인용한 것처럼 1)무엇을 얻어낼 것인지가 확실치 않고, 2)어떻게 재벌에게 협상을 강제할 것인지가 모호하며, 3)재별과 협상을 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누구와 어떻게 협상을 한다는 것인지도 애매하다. 사회적 대타협의 좋은 사례로 흔히 인용하는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 이야기도 한국 상황에 적용하기엔 좀 거시기한 측면이 있고...


  문제는 자본과 노동이 뭘 어떻게 주고받느냐는 겁니다. 뭘 줄 건지는 오히려 명확한데 뭘 받아낼 건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건희 회장에게 차등의결권이나 황금주, 포이즌필 같은 경영권 보호 장치를 허용할 수도 있겠죠. 이재용 부회장이 내야 할 상속세를 깎아줄 수도 있을 것이고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금융산업 분리 규제를 파격적으로 완화해줄 수도 있을 겁니다.

(중략)

  재벌을 감싸고 돈다는 비난을 의식한 듯 장하준 교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는 “재벌에게 경영권 방어 장치를 허용한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면서 “그 대가로 제안할 수 있는 건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 제한, 설비 및 연구개발 투자 확대, 미래형 신산업 투자, 그리고 복지국가 건설 및 부자 증세 협조 등이 있을 수 있다”고 제시하기도 합니다. 역시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죠. (pp. 53~54.)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스웨덴에서 재벌 총수 일가와 노동자 계급의 대타협으로 경영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고용 창출과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합의를 끌어냈다는 장하준 교수 등의 주장은 상당 부분 왜곡된 것입니다. (중략)

  한국 사회에 알려진 것과 달리 찰츠요바덴 협약의 쌍방 주체는 고용자연합회SAF와 노동조합총연맹LO였고 이들을 협상 테이블에 불러 모은 건 사회민주당이었습니다. 장하준 교수가 말하는 빅딜과는 거리가 있죠. 애초에 이 자리에서는 발렌베리 가문의 경영권 인정 등은 의제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경영권 인정해줄테니 뭐 내놓아라, 이런 식의 대타협은 있지도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중략)

  주목할 대목은 스웨덴도 복지국가 시스템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사회문주당이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했습니다. 노사 대타협도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이뤄진 게 아니라 양쪽이 서로 위협을느낄 정도로 대등한 권력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했고요.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한 노동운동 진영이 자본을 압박해 대등한 타협을 끌어냈다는 사실도 중요한 교훈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요. 노동조합 조직률은 10%를 밑돌고 산별노조는 정치적 존재감이 크지 않습니다. 질 좋은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데 노동자 계급은 분열돼 있고 진보 정당은 궤멸되다시피 한 상황입니다. 노동자 정치 세력화는 정말 요원해 보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자본가 계급을 압박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 대타협을 하려면 협상의 상대방이 있어야 할 텐데 이건희 회장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협상 테이블에 나오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pp. 56~58.)


3-1. 그 반대에는 김상조와 장하성이 있다. 장하준의 주장이 국가의 개입을 통한 재벌과의 대타협이라면, 김상조와 장하성이 강조하는 것은 주주의 권리 행사를 통한 주주 자본주의다. 현대의 기업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가 주식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는 주식회사의 원리라면, 그 주식만큼의 권리를 행사하고 이를 통해 총수의 전횡을 견제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원칙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시장경제의 본래 원칙부터 제대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뭐 대충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한국 경제가 이 모양 이 꼴인게 이 정도 수준의 원칙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기 때문임을 생각하면 꽤나 현실성도 있다 하겠다. 장하성 펀드의 성과(물론 결국엔 실패했지만...)나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이 거둔 성과 등도 있고.


3-2. 근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 논리의 밑바닥에는 결국 시장경제에 대한 상당한 신뢰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그렇게 경계하곤 하는 ‘신자유주의’랑 같은 뿌리에서 나온 논리라는 거다. 한국의 재벌이 워낙에 엉망이라서 지금 당장에야 이 정도만 해도 굉장히 진보적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분명히 어느 순간에는 무척 괴상한 방향으로 튈 수도 있다는 점을 까먹으면 안 된다. 예컨대 주주 자본주의 운동에서 가장 돋보이는 힘을 보였던 ‘장하성 펀드’에 초국적 투기자본이 참여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막상 장하성 펀드 쪽에서는 ‘뭐 어쩌라고...’하는 반응이 나왔던 적이 있기도 하다. (이에 관해서 이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김상조 교수는 “장하준 교수 등은 개별 경제 주체들의 단기적 이해충돌이 벌어지는 현실을 은폐하고 정부가 이를 권위주의적으로 조정하던 단계가 지났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중략) “과연 한국의 관료 시스템이 시장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공공성의 담지자인지 의문”이라는 이야기죠.

  결국 관료를 믿느니 시장에 맡겨두는 게 낫다는 이야기가 될 텐데요. 이 지점에서도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략)

  흥미롭지 않습니까. 김상조 교수 등은 정부의 개입과 민주화를 상반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습니다. 정부의 개입 없이 시장에 맡겨두면 그게 민주화라는 건데요. 결국 민주화의 주체를 시장으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들은 국가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내면서도 시장의 효율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시장 근본주의까지는 아니겠지만 시장원리가 늘 최선이라는 도그마를 부정할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경제적·사회적 통제 장치를 이야기하면서도 그게 국가 권력은 아니라고 못을 박고 있다는 겁니다. (중략) 정부는 물러나 있고 시장에 맡겨두면 다 해결된다는 겁니다. 시장을 잘 굴러가게 만드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는 거죠. (pp. 76~77.)


  김상조 교수는 《종횡무진 한국경제》에서 “한국 경제의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과잉 및 구자유주의의 결핍에 있다”고 규정합니다. 신자유주의의 과잉은 너무나도 당연한 문제 제기지만 법치주의와 공정경쟁 질서 확립 등 구자유주의적 과제 역시 절실한데 보수나 진보나 이를 방기하고 있다는 지적이 참신하죠. 김상조 교수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구자유주의를 확립하는 게 이 시대 한국의 개혁·진보 진영의 과제”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홍기빈 소장은 〈시사인〉에 기고한 《종횡무진 한국경제》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서평에서 (중략) “김상조 교수가 정치·경제 모델의 원리로 구자유주의를 제시하는 대목에서 당혹감을 느꼈다”고 털어놓고 있는데요. (중략) 홍기빈 소장은 “김상조 교수가 희구하는 최소한의 법과 제도의 질서가 자리 잡고 공정·공평의 경쟁이 가능한 자본주의는 구자유주의가 우상으로 내건 자유시장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규제하고 조정하는 가운데서 출현했다”고 지적합니다.

  홍기빈 소장의 표현에 따르면 “김상조 교수가 꿈꾸는 고전적 자유주의는 가상으로 그려낸 자연법의 세계, 온갖 불법과 탈법, 폭력을 구사함녀서 비즈니스에 골몰했던 공장주들과 로스차일드 가문, 미국의 날강도 귀족들이 날뛰던 세계”였는데 말이죠. 사실 김상조 교수처럼 냉철하고 논리적인 사람이 “낡은 19세기 그림책에나 나오는 구자유주의 질서(홍기빈 소장의 표현)”를 연모한다고 밝힌 대목은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도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pp. 94~95.)


4-1. 여기서 독자가 더 참고해야 할 것은 위의 두 진영으로만 나눌 수 없는 그 외의 의견들이다. 먼저 위의 두 진영이 공통적으로 성장/발전을 곧 경제의 목적으로 가정한 다음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박형준의 논의가 있겠다. 다만 이 책에서 소개된 박형준은 양자의 이론적 공통기반을 설명하는 데서만 그치고 있고, 그만의 독자적인 주장이 소개되고 있지는 않다. 이에 관해서는 책에 소개된 박형준의 책을 따로 더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박형준 연구원은 김상조 교수를 신고전파로, 장하준 교수를 발전국가론자로 분류합니다. 박형준 연구원에 따르면 신고전파는 애초부터 정치적 과정에서 분리된 자율조정 시장이라는 기제를 상정하고 시장의 내재적 본성에서 경제 발전의 동력을 찾습니다.

  반면 발전국가론은 자율조정 시장의 존재를 부정하고 국가의 산업 정책이 경제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주장합니다. 국가와 제도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발전국가론은 제도주의로 불리기도 합니다.

  신고전파는 탈정치화된 시장을, 발전국가론은 탈정치화된 국가를 상정하고 있다는 분석인데요. 신고전파는 정치적 요인을 외생변수로 설정하고 시장의 자율조정 기능을 저해하는 요소로 이해합니다. 발전국가론은 국가를 효율적인 산업정책을 추진하는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국가 이성으로 정의합니다.

(중략)

  박형준 연구원은 “2가지 접근 방식 모두 시장 또는 국가에 고정불변의 형이상학적 성격을 부여하고 이로부터 경제 변화를 설명하는 본질주의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흥미롭게도 박형준 연구원은 “발전국가론과 신고전파의 드러난 차이는 과장되어온 반면 공통된 이론적 기반은 간과되어왔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들의 이론적 관심은 국가의 시장 개입 또는 방임이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가 아니면 저해하는가 하는 문제로 정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어떻게 해야 경제가 발전하는가에 대한 공통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특히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현실 감각의 부재를 규범적 원칙으로 바꾼다는 비판도 재미있습니다. 경제가 잘되면 자유시장 덕분이고 잘 안 되면 국가 개입 탓으로 돌린다는 거죠.

  앞에서 김성구 교수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주류 경제학에서는 반복되는 공황을 설명할 이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장의 실패 가능성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시장의 한계를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는 발전국가론은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권력기구로서 국가의 성격을 간과해 마치 국가가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생산성 본부인 것처럼 포장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자율적이고 강력한 국가 엘리트가 최상위에 자리 잡고 사회그룹의 개별 이익을 중재해 구현한 계급·계층의 벽이 없고 하나로 융합된 사회적 시공간을 이야기한다는 거죠. (pp. 185~187.)


4-2. 주주 자본주의의 가부를 묻는 틀에서 벗어나 이해당사자들의 역량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이병천과 자본권력에 대한 사회적인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김성구가 있다. 두 사람 모두 이분법적 논의를 허문다는 점에서 참고할 가치가 충분하지만, 어쩐지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이병천에게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무엇인지, 김성구의 경우에는 그 “사회”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각각 더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홍기빈의 이야기도 참고 삼아 메모해 둔다.


*.  주주 자본주의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충돌에 대해서는 229~231쪽을 참고하자.


  그러나 이병천 교수는 “국가도 자본도 구조화된 권력체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실행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인데요. 기업과 자본을 규율할 수 있는 제도적 강제 체제에 대한 아이디어가 빠져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이병천 교수는 “장하준 교수가 국가의 능력에 너무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아쉬움을 드러냅니다.

  이병천 교수의 지적은 굉장히 흥미롭고도 중요합니다. “민주화가 오히려 국가의 조절과 규율 능력의 후퇴를 불러오고 그래서 대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민주적 규율 체제, 제도적 강제 체제를 수립하지 못하면 나라 경제와 국민 대중의 삶이 대자본의 볼모로 붙들릴 위험이 있다”는 겁니다. 한국 경제가 당면한 현실을 정확하게 짚고 있는 대목인데요.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사회적 대타협이 가능하겠느냐는 이야기도 되겠죠.

  이병천 교수는 “노동세력이 미약한 한국과 동아시아 개발주의와 노동세력이 강력한 정치적 정치적 주체로 나서 노사정 합의가 제도화된 유럽의 사회적 합의주의는 근본적으로 정치적 구도가 다르고 복지국가로 가는 길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합니다. “국가가 개방된 수평적 협력과 공정 경쟁 질서를 키우도록 제도 증진적 방식의 개입을 해야 하는데 장하준 교수는 이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국가 일방의 개입주의에 치우쳐 있다”는 겁니다.

(중략)

  이병천 교수는 장하준 교수의 주장이 과장됐거나 근거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중략) “깊은 강은 국제 금융자본과 재벌 사이에 흐르는 게 아니라 재벌+국제 금융자본과 중소기업+노동자+중산층 사이에 흐르고 있다”는 게 이병천 교수의 주장입니다.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 문제까지 국제 금융자본의 탓으로 돌린다면 과도한 단순 논리”라는 지적입니다. (pp. 132~135.)


  이병천 교수는 “한국 경제 1997년 체제를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두 견해(장하준·김상조)가 각각 다른 논리 구조로 신자유주의 지배 또는 사회 경제적 양극화 체제의 정점에 있는 재발을 그 책임에서 면제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죠. 장하준 교수 등이 재벌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로 규정하는 오류에 빠졌다면 김상조 교수 등은 공정한 시장 경쟁을 강조하면서 정작 양극화와 경제력 집중 문제에 소홀해다는 비판입니다.

(중략)

  이병천 교수는 “딜레마에 빠진 재벌 개혁의 대안은 이해 당사자의 참여와 협력의 책임 자본주의를 어떤 방식으로든 살려내는 길 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좀 원론적인 이야기처럼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중략) 법적으로 강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게 한계입니다. (pp. 138~140.)


  김성구 교수가 보기에 재벌 개혁은 오히려 지엽말단적인 문제입니다. 애초에 국가 권력과 자본 권력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통제할 것이냐를 이야기해야 답이 나오는 문제입니다. 자본주의 발전 단계와 이행을 포괄하는 큰 맥락을 읽지 못하고 삼성의 지배구조라는 단편적인 이슈로 접근하니까 출자총액제한을 하느냐 마느냐, 빅딜을 하느냐 마느냐 같은 소모적인 논쟁에 매달리게 된다는 겁니다.

(중략)

  김성구 교수는 “진정한 경제민주화는 재벌의 경영권과 복지국가를 빅딜하는 게 아니라 재벌의 경영권도 통제하고 증세와 복지국가도 강제해야 한다”고 못을 박습니다. 너무 빤한 이야기라 살짝 감동이 덜한데요. 다만 김성구 교수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건 재벌을 섣불리 해체하거나 재벌과 어설픈 타협을 하려 할 게 아니라 재벌의 사회화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독점자본의 사회화, 그 다음에야 비로소 복지국가의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거죠. (pp. 182~184.)


  홍기빈 소장은 2012년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노동조합총연맹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건 맞지만 정당 운동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노동운동이 정치권을 압박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운동 진영이 사회민주당의 노사 협조 노선에 끌려왔던 측면이 강하다”는 설명입니다.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을 겁박해서 복지국가를 끌어냈다고요? 오해입니다. 자본가들이 겁을 집어먹었으면 깡패들을 불렀겠죠. 겁 준다고 복지국가를 하겠습니까. 노동자 계급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해서 자본가 계급을 압박했다기보다는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받는 사회민주당이 변화를 끌어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스웨덴에서는 다행히 합리적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공동의 목표를 만들자는 논의가 1920년대부터 있었습니다.”

  홍기빈 소장은 “좌파들은 뭔가 깨부숴야 한다, 뭔가 휘두르고 투쟁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 것 같은데, 현실적인 힘과 정치적인 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스웨덴에서는 건설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노동조합총연맹이 나서서 파업을 막기도 했죠. 단위 사업장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계급적 이해관계를 넘어 연대를 끌어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는 이야기입니다.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은 노동자 계급의 단결 투쟁이 아니라 잘 설계된 현실적 비전에 스웨덴 국민들이 호응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홍기빈 소장의 지적은 투쟁 일변도의 주먹구구식 이론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현실론이기도 하고 한국의 좌파들이 거대담론보다는 잠정적인 유토피아를 고민해야 한다는 절박한 충고이기도 합니다.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는 그날을 기다릴 게 아니라 바로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투쟁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죠. (pp. 147~148.)


5. 책의 내용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각 경제학자들의 논의가 단일한 논점에 국한되어 있지도 않거니와 서로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논쟁이기도 하기 때문에 목차처럼 사람에 따라서 말끔하게 나뉘지도 않는다. 지금의 구성이 최선의 타협인 것 같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 사람이 논점에 따라 무게중심을 정확히 잡고 책을 읽어야지 그냥 생각없이 읽었다간 책 속에서 길을 잃기 쉽다.


6-1. 이 정도로 책 내용을 정리하고 나니 관전포인트가 크게 2개 정도 보인다.


6-2. 첫 번째는 이 책에 나온 경제학자들의 애프터스토리. 그 중에서도 특히 김상조와 장하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2014년에 나왔는데 그 이후 4년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 책에서는 그냥 예상 시나리오였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통한 삼성승계작업은 2015년에 현실이 되었고, 촛불을 통한 정권 교체도 있었다. 그런데 지난 정권을 무너뜨린 권력 비리에서 삼성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장하준의 사회적 대타협론은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졌다. 오너 일가의 도덕성부터가 저토록 글러먹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대타협’의 ‘ㄷ’자도 꺼낼 수 없지 않겠나. 반대로 주주 자본주의 강화론자인 김상조와 장하성은 각각 공정거래위원장과 청와대 정책실장이 되어 문재인 정권의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따로 챕터가 마련되지는 않았지만, 홍종학 중소기업벤처부 장관도 포함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보여준 김상조와 장하성의 입장이, 향후 어떤 식의 경제정책으로 열매 맺을지 주목할 일이다.


6-3. 두 번째는 60~80년대의 경제성장모델에 관한 것이다. 국가와 재벌이 경제성장과정에서 어떠한 관계를 맺어왔는가는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경제학자들이 자기 근거로 삼는 내용들이다. 그 역사에 대한 이해에 따라 주장도 달라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60~80년대 경제사에 대한 이해가 곧 현실경제에 대한 이해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이유를 여기서 또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유’는 많은데, 정작 공부는 안 한다는 게 함정...) 경제(사)에 대한 내 관점은 아직까지 매우 단순해서 '시장 대 정부' 정도로 단순화되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아직도 너무 단순하게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좀 더 세심한 결을 짚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거 참 그게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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