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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평전 (안재성, 실천문학사, 200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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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평전 (안재성, 실천문학사, 2009.)

Dog君 2018. 2. 12. 10:35


1. 이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이 너무 단순해서 선택가능항도 그만큼 적다는 것이다. 선택가능항이 세 개 이상이 되는 경우가 드무니까. 중국집에서는 짜장 아니면 짬뽕, 선거에서는 1번 아니면 2번, 정치는 보수 아니면 진보, 이거 머 이래.


이런 혁신, 더는 불가능한 건가.


2. 아마도 지난 백여 년간의 역사적 경험 때문에 그러리라. 식민지 경험이 워낙에 압도적인데다가 그 직후에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왔으니 현실의 권력구조 또한 그렇게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고착된 것 같다. 현실이 그렇게 왜곡되어 있다보니 그것에 눈감은 채로 ‘해체’니 뭐니 하는 말을 쉬이 꺼내기도 어렵다. 그거야말로 현실의 권력이 가장 원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3. 그러다보니 그 이분법 사이에서 사라져 간 사람들에 계속 눈이 가고, 괜히 더 감정이입이 잘 되고 그런다. 세상이 이분법이니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그 사이에서 사라져 간 것들에 꾸준히 눈길을 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 뭐 그렇다고 해서 굳이 박헌영을 변호하거나 그가 김일성보다 더 나았다거나 하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않다. 이 책에서도 박헌영의 한계와 단점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억울하게 스러져간 사람이 박헌영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까지 수집된 자료와 증언만으로 보건대, 박헌영을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라거나 불세출의 영웅이라 찬양하기는 어렵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에는 탁월했지만 선동력과 포용력 등 대중정치가로서 필요한 정치수완은 거의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근본 성품은 온후하고 지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입장은 다분히 교조주의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표범처럼 단단한 인상에 좀처럼 웃지 않는 과묵하고 비밀주의적인 성향은 지하운동의 지도자에게는 적합했을지라도 공개정당의 지도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정황과 증거자료로 보건대, 그는 결코 미국의 간첩 노릇을 했거나 비겁자인 적은 없었다. 그는 일제 후반기 내내 국제공산당(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조직의 최고책임자로 임명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해방되자마자 그를 최고지도자로 옹립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칙적이고 교조적인 성향이 ‘결과적’으로 적을 이롭게 했다고 공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면모가 없었다면 애초에 공산당 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한계요, 시대의 한계였다. (pp. 27~28.)


  사상적으로 박헌영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랄 수 있었다. 공산주의 내부의 공격과 달리, 그는 일제의 간첩도 미제의 간첩도 아니었으며, 그 어떤 증언이나 기록에도 그가 비겁자로 굴었다는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우익의 공격대로 철두철미한 소련파였으며 그것이 그의 치명적인 결함의 출발이었다. 그는 오로지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이 나눠준 교과서대로 세상을 보려 했다. 일제하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행동은 같이하더라도 여러 가지로 번민하는 흔적을 남겼다. 유독 박헌영은 교조적인 원리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모습이 그를 불변의 공산당 지도자로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될 수 없게 만든 이유도 되었다. (p. 211.)


  나중에 북한에서도 생활하는 샤브시나는 박헌영과 김일성의 성격을 흥미롭게 비교할 수 있었다. 박헌영이 답답하리만큼 겸손한 데 비해 김일성은 누구에게든 쾌활하게 자신의 이력을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샤브시나는 온건하고 지적인 박헌영에게 애정이 갔지만, 권력은 박헌영 같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훈장이 아니었다. 권력은 적당히 타락하고 적당히 비열한 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욕망이었다.

  김일성을 만난 이들은 누구나 샤브시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기 마련이었다. 박헌영만큼이나 실력 있는 술꾼인 김일성은 술이 거나해지면 손가락으로 술을 찍어 식탁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곤 했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연안 출신들에게는 대단치 않은 소규모 전투에 불과했으나 김일성은 자신의 활약을 과시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p. 275.)


4. 한가한 일요일 오후의 카페에서 이 책을 다 읽었는데,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역사의 흐름과, 권력의 향배와, 분단의 고착에 따라 스러져간 그 많은 사람들. 물론 그런 상황에서라면 그 누구라도 어느 한 쪽은 숙청당했겠지만... 그 와중에 죽어간 혁명가들을 길게 나열할 때 마음이 찡하다가, 박헌영과 주세죽과 김단야와 박비비안나와 박병삼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만 마음이 무너져버렸다. 역사란 무엇이고, 그 역사 속을 살아가는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싶어서.


  우연하게도, 박헌영의 편지가 모스크바에 도착할 무렵인 5월 5일, 주세죽은 스탈린에게 조선으로의 귀환을 허용해 달라고 청원했다. 모든 정보로부터 차단되어 있던 그녀는 1946년 1월 소련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실린 박헌영 관련 기사를 보고서야 그가 조선공산당 당수가 되어 있음을 알았고, 뒤늦게 스탈린에게 눈물로 호소한 것이었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제 남편 박헌영을 통해 저에 대해 확인하셔서 제가 조선에서 다시 혁명 활동에 종사하게끔 저를 조선으로 파견해주실 것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저는 진정 충실하게 일할 것이며 제 남편을 이전과 같이 보필할 것입니다. 제 요청을 받아들여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만일 제가 조선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제가 모스크바에 살며 제 딸을 양육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빕니다. 제 딸 박비비안나는 지금 136학교에서 제9학년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제 요청을 거절하지 마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조선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주세죽의 애절한 청원은 기각되었다. 다만 소련 정부는 두 달 후인 1946년 7월 10일부터 그녀를 크질오르다의 한 방직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박헌영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을 만나고 돌아간 바로 다음 날이었다. (후략) (pp. 336~337.)


  1953년 봄, 주세죽은 박헌영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모스크바로 향했다. 딸 비비안나까지 체포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누구보다도 투철한 혁명가이던 두 남편 김단야와 박헌영을 모두 제국의 간첩이라는 누명으로 잃게 된 그녀는 크게 상심해 있었다. 오래전부터 심장병과 폐병을 앓고 있던 그녀는 모스크바까지 먼 기차여행 중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피로를 이기지 모하고 기진해 쓰러졌다.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로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마침 비비안나는 지방 순회공연을 가고 없었다. 주세죽은 소련인 사위 빅토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초라한 병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이 53세, 낯선 나라 낯선 오지에서 유형생활과 방직공장 직공으로 일해온 지 15년 만이었다. 조국을 떠나온 지는 23년째였다.

  허정숙·고명자와 함께 대표적인 신여성 트로이카로 신문과 잡지에 오르내리던 그녀의 죽음에 대해, 고국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내무성 지하 감옥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고 있던 박헌영도 물론 알지 못했다. 그녀가 홍범도·김경천 등 수많은 조선인 애국자들과 함께 카자흐스탄공화국 크질오르다에서 비참한 유형생활을 하던 끝에 사망했다는 사실은 40년이 지나서야 남한 사회에 알려졌다. (중략)

  주세죽의 생애 유일한 유산인 비비안나는 다시 여러 해가 지난 1994년이 되어서야 어머니가 복권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중앙아시아 황량한 오지에 유폐되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주세죽은 힘겹게 번 약간의 돈을 모두 털어 모스크바의 딸을 찾아오곤 했지만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다는 이야기를 차마 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후략) (pp. 596~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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