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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모리스 마이스너, 이산, 200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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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모리스 마이스너, 이산, 2004.)

Dog君 2018. 3. 12. 19:29


1-1. 흔히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이라고 하면 원시공산제, 고대노예제, 중세봉건제, 근대자본주의, 그리고 미래의 사회주의/공산주의로 이어지는 5단계론을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 이건 마르크스가 한 말이 아니고 그로부터 한참 지난 스탈린의 ‘역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등장하는 거긴 하지만 그런 것까지 내가 일일이 따질 깜냥은 안 되고...) 이건 어디까지나 이상화된 모델에 가깝기 때문에 실제로 이 모양대로 역사가 흘러간 경우는 거의 없다. 당장 봉건제라는 것부터가 유럽에서만 관찰되는 독특한 역사적 경험이다 보니, 그런게 없는 다른 지역에서는 뭐 다른 말을 해 볼 여지조차 없는 거다. 콩을 심어야 콩이 나지, 팥을 심어서 콩이 나올리가 없잖냐.


1-2. 그래서 유럽이 아닌 다른 동네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머리가 아팠다. 아 시발 중세봉건제가 있어야 근대자본주의가 되고, 근대자본주의가 있어야 사회주의/공산주의로 가고, 그래야 아구가 딱딱 맞을텐데, 유럽에서 들어온 마르크스주의 졸라게 공부해서 제 땅을 다시 돌아보니 이거 암담한기라. 근대자본주의가 있어야 그 안에서 이윤율 저하 경향도 찾을 수 있는 거고, 자본주의가 낳은 노동자계급이 있어야 얘네들이랑 같이 사회주의 혁명도 하는 건데, 아나콩콩, 노동자계급은커녕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 바쁜 농민들을 데리고 뭘 어쩌란겨. 자본가계급(부르주아지)을 타도해야 사회주의도 오고 공산주의도 오고 하는 건데, 있지도 않은 걸 어떻게 타도하란겨. 쉐도우 복싱이라도 하라는 거여 뭐여.


  여기서 우리는 근대중국의 역사적 현상 저변에 깔린 사회적 기초에 대한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정치적 힘이 사회경제적 힘으로부터 갖는 상대적 독립성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사회계급도 지배적 위치를 점하지 못하고 모든 계급이 미약한 상태에서 정치적 힘은 점점 각 사회계급으로부터 독립하여 사회 전반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띤다. (중략) 군사력에 기반한 독립적 정치권력은 20세기의 정치생활에까지 계속 영향을 미치며 지속되었던 전통적 양식의 특징일 뿐 아니라 중국의 두 근대 정당인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특징이기도 했다. 국민당의 역사뿐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역사 역시 특정 사회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정치정당의 역사라고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다. (중략) 두 근대 정당 모두 사회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와 정책이 결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군사적 권력의 소유자들이 사회계급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적 상황하에서 운영되었다. (pp. 30~31.)


  20세기 역사에서 지식인을 정치적으로 그토록 중요하게 만든 것은, 보통 이야기하는 것처럼 학자들이 중국에서 차지하는 전통적인 신망 때문이 아니라 근대중국의 역사적 상황 때문이었다. 거대한 사회적·문화적 와해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정치적 혼란, 모든 사회계급이 미약한 나머지 어떤 계급도 지배적이지 못한 상황에서 인텔리겐치아는 실제로 독립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역사적 발전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식인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역사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자신이 속한 사회계급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사회적으로는 독립적이 되었지만 정치적·역사적으로는 무능해져버렸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이 다른 사회계급과 자신들을 묶을 필요성을 느끼고 그 기회를 적극 받아들여 고난받는 대중의 사회경제적 불만을 표현하는 정치적 목소리가 되어줄 때, 그래서 대중의 행동을 새로운 형태의 정치행동으로 이끌 때, 오직 그때에만 인텔리겐치아는 근대중국의 역사적 상황이 제공하는 혁명적 변화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 오직 그때에만 사회적 현실을 자신들의 사상과 이상, 비전에 따라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략) ( p. 34.)


(전략) 역사 속에서(또는 혁명을 만들어 나가는 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인간의 의식, 즉 관념과 의지, 그리고 인간의 행동이라는 강한 주의주의적 신념은 마오쩌둥의 초기 지적 경향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헌신적인 혁명가가 자신의 관념과 이상에 따라 사회현실을 만들어 나간다는 신앙은 마오가 혁명활동을 실천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흡수하기 시작할 때 마르크스주의의 강력한 결정론적 교의의 영향하에서도 살아남았다.

  사회주의 미래의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마오의 신앙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주장하는 사회발전의 객관적 법칙에 어느 정도 바탕을 두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종국에 사회주의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앙은 역사발전의 객관적 힘을 믿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확신에 기초하고 있지 않았다. 마오에게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필수요소는 인간의 의식적인 행동이었고, 또한 혁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혁명활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중국에서 혁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어떤 사회경제적 수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들이 물려받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정통이론에 의해 혁명활동이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는 성공을 만들어내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인 ‘올바른 사상의식’을 갭라하는 데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내포하고 있었다. 마오주의에서 올바른 사상은 혁명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핵심적인 전제였으며, 바로 이런 가정 위에서 옌안 시기에 발전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졌던, ‘사상개조’와 ‘의식개조’를 강조하는 마오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pp. 78~79.)


  그러면 사회주의 혁명의 행위주체는 누구인가? 마오주의 이론에서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끌어갈 것이라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이며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화신이라는 정통 레닌주의를 반복하는 것 이상을 찾을 수 없다. 마오는 오직 ‘인민민주주의독재’라는 개념만을 새롭게 덧붙였는데, 이 개념은 옌안 시기의 통일전선전략 속에서 탄생했으며 인민공화국 성립 전야인 1949년에 공식 선포되었다. 혁명의 부르주아적 단계를 주장하는 이 이론은 네 계급 연합-프롤레타리아트, 농민, 프티부르주아지, 민족부르주아지-을 대표하는 정부를 제시하지만, 그 연합을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아래에 둠으로써 궁극적으로 정치권력이 공산당에 있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중략)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뛰어넘어 전진할 것임을 결정하는데 결국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은 마오주의가 그토록 강조했던, 역사에서 ‘주관적 요소들’이었으며, 특히 사회주의적 목표를 추구하고자 했던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의식적인 결심이었다. (중략) 이런 ‘주관적 요소’는 중국혁명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짓는 데 엄ㅊ어난 역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오주의 이론이 의미하는 것과 마오주의자들의 행동에 나타나는 것에 따르면,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며, 이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체에 의존하는 것도 농민에게 속하는 것도 아니며 특정 사회계급과 독립되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혁명 엘리트(당과 당 지도부)는 마음속에 사회주의적 목표를 굳건히 간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대중운동을 이끈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인민’ 전체의 잠재력으로 간주되었다. 혁명활동을 통해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정신과 사회주의 세계관을 가질 수 있는, 정신적·사상적 전환을 이룩할 수 있는 잠재력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와 혁명을 만들어감에 있어 의식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오래전부터 있어온 주의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마오주의의 경향과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론에 대한 마오주의의 독특한 대응을 보여준다. 마오가 중국사회의 객관적 계급상황에 대한 항상 진지한 관심을 보였으며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계급투쟁의 열렬한 옹호자였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는 ‘계급’을 객관적 사회계급이 아니라 도덕적·사상적 기준에 따라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전제조건이었다고 한다면, 마오에게는 ‘프롤레타리아’ 관념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의 존재가 바로 혁명계급의 존재를 증명하는 충분조건이었다. (pp. 84~86.)


2. 중국 사회주의의 특징이 거기에 있다. ‘마르크스주의’라고 이름붙인 이론체계에 걸맞는 물질적 요소가 없으니까, 그걸 ‘의식’나 ‘관념’, ‘의지’ 같은 것으로 대체한다는 거다. 유물론의 원칙에서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해야 한지만, 중국의 마르크스주의(그냥 마오주의라고 하자)에서는 의식이 존재를 규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렇게 ‘의지’나 ‘의식’을 부여할 수 있는 지식인 계급이 가장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거지.


  이런 ‘국가자본주의’의 부활에는 순수한 이데올로기적 고려 이상의 것이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단순히 ‘신민주주의’에 대한 약속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 아니며, ‘부르주아 민주주의’ 발전단계가 사회주의보다 선행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 명제를 역사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주된 관심은 오히려 세속적인 데 있었다. 파산된 경제를 재건하고 미래의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을 다시 세우고 그 위에 건설하는 것이 빠른 방법이었던 것이다. 완전몰수와 국유화를 위한 계획은 불가피하게 구조적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지만이 갖고 있던 관리기술과 전문기술을 이용하려면 자본주의의 부활이 어느 정도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필요와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신정부는 남아 있던 부르주아지와 전문기술자의 지지를 얻어냈으며 나라를 떠난 많은 사람들에게 국가경제 재건사업에 참가하기 위해 돌아올 것을 권유했다. (pp. 133~134.)


3-1. 근데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에서 계급 대립의 선이 좀 이상하게 그어지기도 했던 것 같다. 예컨대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 ‘부르주아지’를 처단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부르주아지들을 체제 내로 흡수해야 하는 순간도 일시적으로 있었다는 거지.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단계를 밟아야 했을 때가 있기는 했으니까.


  공산주의가 승리할 당시 중국의 상황은, 사실 러시아보다도 관료제가 성장할 수 있는 훨씬 비옥한 토양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훨씬 낙후되어 있었고 농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였으며 각 사회계급 역시 훨씬 미약했다. 중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보다 수가 훨씬 적었고 정치적으로도 훨씬 미성숙했으며 집권자인 공산당과는 아주 약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중국은 민주주의 전통이 없는 나라였으며 사회 깊숙이 뿌리박힌 관료제 전통에 짓눌려 있었다. 혁명은 완전히 내셔널리즘적인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객관적인 역사현실이나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에서 국제주의적인 면모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중략)

  관료화에 유리한 조건들을 갖춘 것 외에도, 혼란스러운 정치적 격변과 빈곤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나라에서 전국을 아우르는 정치적 중앙집권화와 신속한 경제발전은 무엇보다도 절박한 문제였다. 더구나 자산계급-신사-지주엘리트층과 그때까지 남아 있던 부르주아지-의 파멸은, 그것이 아무리 사회적·경제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강력하고 독립적인 관료제의 성장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을 없애버린 격이 되었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 방대한 관료기구가 사회를 능가해서 지배적인 사회세력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인민공화국에서 새로운 유력한 관료제가 등장하긴 했지만 그 권력은 적어도 소련관료제에 비하면 제한적이었다. 이런 제약은 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는 혁명유산의 영향이 계속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중략) 어쩌면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두 번째 요인은 마오쩌둥 개인의 엄청난 권위와 명성이었다. 마오는 관료제에 대한 깊은 적대감과 함께 인민과의 특별한 사적인 관계, 그리고 모든 공식 조직기구를 초월하는 지도력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pp. 340~341.)


3-2. 오히려 적대의 전선은 ‘(농민)대중’과 ‘당 관료 및 지식인’ 사이에 그어졌던 것 같다. 고래적부터 내려온 중국 사회의 특성상 관료주의가 발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컸던 데다가, 사회주의 혁명 이후 당장 경제성장의 필요가 컸기에 그에 따라 권위적인 체계의 필요성도 커졌기 때문이다.


(전략) 마오주의 관점에 따르면 ‘올바른 의식’은 유해한 전통적 가치와 낡은 사상의 완전한 제거를 필요로 했다. 문화적 반전통주의와 인간의 의식적 활동을 역사의 결정적 힘으로 간주하는 신념은 마오의 문화혁명관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였다. 그리고 이런 개념은 신문화시기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기 전의 지식인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으며 옌안의 혁명시기와 혁명 이후 인민공화국의 역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마오의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에서 중심을 차지해왔다.

(중략) 마오는 사회주의 사회든 공산주의 사회든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의존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사회나 공산주의 사회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은 사람들의 의식을 ‘프롤레타리아화’하는 것이며, 이는 문화혁명이라는 수단을 통해 실현될 수 있었다. 마오에게 대중의 문화적 ‘프롤레타리아화’는 근대적 경제발전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제였다. 사회주의를 건설할 때 “중요한 문제는 사람을 개조하는 것”이라고 마오는 거듭 강조했다.

(중략) 실제로 마오는 자본주의가 역사발전의 진보적 단계라는 마르크스주의 명제를 거부했다.(레닌은 결코 그런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중국이 오랜 시간을 요하는 자본주의적 발전단계를 피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후진성이 가져다 주는 사회주의적 이점을 찬양했다. (pp. 433~436.)


  1960년대 중반 마오쩌둥이 일으킨 동란(그 결과는 그의 통치 마지막 10년을 지배하게 된다)은 물론 단순히 그가 갖고 있던 문화혁명 개념의 산물이 아니었다. (중략) 이 극도로 기이한 정치적 동란이 혁명 이후의 시기에 등장했던 일련의 사회문제, 즉 점점 커져가는 사회적 불평등, 지도자와 대중 모두에게서 사회주의 비전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 새로운 관료 엘리트의 공고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벌어졌다는 점은 오늘날 쉽게 무시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중략) 마오의 ‘잘못된’ 사상과 총체적 권력에 대한 그의 갈증말고도 이처럼 많은 문제들이 문화대혁명이 전개되는 과정에 연루되어 있었다. (p. 439.)


4. 그런데 이건 혁명을 주도한 마오주의의 입장에서는 다시 애초의 사회관계로 돌아가는 셈이 된다. 일껏 권위주의/계급대립을 해소한다고 해놨고 그 과정에서 (농민)대중의 자각과 자발성이 필수적인데, 당 관료와 지식인이 그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들게 되면 말짱도루묵이니까. 그래서 이 책에서 가장 길게 묘사하고 있는 것도 관료주의화된 당 관료와 지식인에 대한 마오(그리고 그가 의지한 (농민)대중)의 길고 긴 줄다리기다. 그래봐야 그거 결국 권력다툼 아니냐고 냉소적으로 쏘아붙일 수도 있지만(그리고 이 책에서도 그러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굳이 부인하지 않지만), 그래서야 중국 현대정치사에 대해 무슨 이해가 가능하겠나. 실제로 당 내에서 어떤 식으로 권력이 움직였고, 어떤 힘에 근거하여 그러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설명하자면 이렇다는 거.


5. 이렇게 권력이 오가고, 누군가가 숙청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끝까지 살아남고, 하는 과정이 이 책의 제목 중에서 ‘마오의 중국’에 해당한다. 그러면 ‘그 이후’는 또 뭘까.


6-1. 뭐긴 뭐여, 덩샤오핑이지. 덩샤오핑은 이미 1950년대부터 자본주의적인 생산력 성장을 강조했는데, 마오가 죽고 그가 집권한 이후 그가 선택한 것은 마오와의 결별이었다. (그런데 정작 집권과정에서는 마오와 함께 했던 혁명전통의 힘을 빌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마오는 그토록 당 관료와 지식인에 의한 위계질서를 털어내고 그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는 것을 경계했지만, 반대로 덩샤오핑에게 중국 사회는 계급 모순이 버얼써 해소되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이 없었다.


6-2. 그래서 그 다음? 저자가 보기에 마오 이후의 중국은 그냥 자본주의 사회다. 근데 그냥 자본주의는 아니다. 자본주의면 부르주아가 그 뭐시기냐,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하는 최소한의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게 지금 중국 사회에서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리냐 이거요. (시진핑이 영구집권을 한다던가 만다던가) 그러니까 현재 중국 자본주의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자리에는 덩샤오핑이 육성한 당 관료들이 들어가 있는데, 얘네들은 역사 속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했던 역사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까, 모리스 마이스너가 보기에 지금의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이되 정치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아닌 상황이고, 그래서 만약 중국에서 정치적 자본주의/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 주체는 (이제서야 계급으로 성장한) 노동자 계급이 될 거라는 거. 그런 전망으로 이 책은 서둘러 마무리된다.


6-3. 아 그런데, 그게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게, 천안문 이후로 급속도로 냉정을 되찾은 중국 사회... 그리고 그 이후로 다들 조용한 중국 사회... 아, 중국의 정치는 이제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사회이긴 한건가.


(전략) 1956년 중국공산당 제8차 당대회에서(정치보고를 할 때) 류사오치는 과거의 착취계급이 소멸했음을 축하하고 사회주의의 결정적 승리를 선포했다. 덩샤오핑 역시 자본주의가 패하고 계급대립이 사실상 사라졌다고 공언했다. 이제 사회적 격차는 “같은 계급 내의 분업문제”일 뿐이었다. 중국사회의 주요 모순은 이제 더 이상 적대적인 사회집단들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선진적인 사회제도와 낙후된 사회생산력 사이”에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20여 년 뒤 마오 이후 시대의 주된 정통사상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새로운 사회주의 시대에 당이 직면한 주요 과업은 계급투쟁의 촉진이 아니라 경제발전이었다. (p. 444.)


  이 모든 실패와 결함에도 불구하고 마오주의 시대가 중국의 근대산업혁명 시기였다는 역사적 결론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토록 오랫동안 ‘아시아의 병자’로서 모욕당해온 중국은 1950년대 초 벨기에보다 규모가 작은 공업기반에서 출발하여 마오쩌둥 시대에는 세계 6대 공업생산국의 하나가 되었다. (중략) 1957년에서 1975년까지 마오쩌둥 시대의 마지막 20년(마오의 후계자들에 의해 낮게 평가되는 시기) 동안 대약진이 초래한 경제적 재난을 포함시키더라도 중국의 국민소득은, 인구가 거의 두 배로 급성장하는 이 시기에 1인당 기준으로 63% 증가했다.

(중략)

  소련역사에 대한 기념비적 저작을 완성한 위대한 영국 역사가 E. H. 카는 이렇게 경고했다. “위험은 우리가 혁명이 낳은 거대한 오점, 인간의 고통스런 대가, 그것의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를 감추는 데 있지 않다. 위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망각해버리고 싶어 할 뿐 아니라 그 엄청난 업적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해버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있다.”

  러시아 역사뿐 아니라 근대중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 역시 카의 말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보통 혁명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대격변은 일반적으로 이루지 못할 큰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지나친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 꽤 오랜 시간 동안 실제로 이루어진 역사적 성취가 무시되고 잊혀지면서 환멸감과 냉소주의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역사의 실상에 초점을 맞추려면 보통 수세대가 지나야 한다. 혁명의 신기원을 이룩한 정치투쟁과 사상투쟁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세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 및 역사 인식에 깊이 박혀 있는 것은 대약진과 문화대혁명 같은 마오주의 기록에 나타난 오점이다. 이런 역사적 모험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엄청난 인명의 희생을 초래했다는 것을 잊을 수는 없으며 잊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미래의 역사가들은 이런 실패와 죄상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인민공화국 역사에서 마오주의 시대를 (아무리 다르게 평가한다고 할지라도) 세계역사상 위대한 근대화를 이룩한 시대의 하나로, 그리고 중국인에게 커다란 사회적·인간적 이득을 가져다준 시대로 틀림없이 기록할 것이다. (pp. 586~589.)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정치질서와 갈등을 일으키는 열정적이고 독립적인 부르주아지가 의회민주주의 발전에 불가피한 요소였음은 역사적 사례로 계속 남아 있다. “부르주아지가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고 무어가 요약했던 것처럼. 이것이 근대역사의 보편적인 교훈일지는 몰라도 중국 민주주의에 길조가 되는 교훈은 아니다. 오늘날 중국의 부르주아지는 서양 여러 나라에서 나타났던 전형적인 초기 부르주아 계급과 닮은 점이 거의 없다. ‘마오 이후’의 중국 부르주아지는 분명 활력이 넘치는 계급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시장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기회를 이용하는 데 있어 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던 공산당 관료와 그들의 친척으로 구성된 계급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경제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공산주의 국가에 의존하는 계급이다. 또한 노동계급과 자유노조로부터 정치적으로 보호받기 위해 국가에 의지하는 계급이다. 요컨대 중국의 부르주아지는 강력한 민주주의적 잠재력을 갖는 계급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 독재에 대한 심각한 도전은 국가가 후원하는 자본주의의 수혜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희생자로부터 나올 것 같다. (pp. 667~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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