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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없는 경제학 (차현진, 인물과사상사, 20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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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없는 경제학 (차현진, 인물과사상사, 2011.)

Dog君 2018. 3. 18. 11:13


1-1. 흡사 고명을 잔뜩 얹은 잔치국수 같다고나 할까. 복잡한 수식이나 도표, 개념 없이 마치 입담 좋은 재담꾼이 이야기를 풀어가듯 온갖 레퍼런스를 끌어와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나처럼 기초지식이 부족한 사람 입장에서는 입문서로는 딱이다. 풍부한 레퍼런스 덕분에 어디 가서 썰 풀기에도 딱 좋은 내용들이다. (몇 주쯤 전에 한창 SNS에서 남이섬이 어쩌고 친일파가 저쩌고 하는 이야기가 돌아다녔는데, 여기에도 그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책에 따르면 그런 식의 이해는 대단히 피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궁금하신 분은 직접 사서 읽으시고...)


1-2. 그런데 똑같은 점이 약점이 되기도 한다. 워낙에 많은 이야기들을 끌어다 붙이다보니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비효율적인 독서가 될 수도 있다. 이리저리 달라붙은 이야기들을 다 쳐내면 정말로 책의 고갱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은 1/4이나 1/3 정도 될라나. 그러다보니 자칫 책 속에서 길을 잃기도 쉽다. 뭐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읽었는데, 어 근데 정작 본론이 뭐였더라... 뭐 이런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봐야 한다.


2-1. 대체로 책은 두 가지의 줄기를 가지고 있다. 첫번째는 화폐의 역사인데, 애초 화폐란 금(이나 은)을 대신하는 ‘대체물’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일일이 금덩어리를 들고 다니기 힘드니까 화폐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불편을 줄이게 했다는 건데, 이렇게 되면 그 가치 역시 금에 고정될 수밖에 없고, 시장 전체의 통화량 역시 금의 양과 동일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영국이 천명한 금본위제도는 유럽 전체의 도덕률, 즉 국제금융 시스템의 ‘영혼’이 되었다. 동시에 영국의 파운드화는 유럽의 금본위제도를 지탱하는 받침점이 되었다. (중략)

  영국이 주도하는 금본위제도는 한동안 잘 지켜졌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금본위제도가 잘 지켜질 수 있었던 이유는 금이 흔해졌기 때문이다. (중략) 산업혁명에 기막히게 때를 맞춘 금광의 발견이 없었다면, 화폐공급이 부족해서 불황이 찾아왔거나 금본위제도가 붕괴되었을 것이다. (경제사에서는 19세기 후반 금광의 연쇄발견을 ‘공급충격’이라고 한다.)

(중략)

  미국처럼 내부갈등을 빚는 경우도 있었지만 19세기 이후 금본위제도는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았다. 그러다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서 위기를 맞았다. 1차 세계대전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정치적인 결론을 맺었다. 하지만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1922년 34개국은 제노아에 모여서 금본위제도로 복원할 것을 맹세하고 이를 위해 각국이 중앙은행을 설립할 것을 결의했다. 1924년에는 승전국과 독일 사이에 배상금 문제도 타결되었다. 승전국들이 독일의 배상금을 낮춰주고 차관을 제공하면, 독일은 열심히 수출해서 빚을 갚는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미국 재무장관 찰스 도스Charles G. Dawes의 중재로 마련되었기 때문에 도스 플랜Dawes Plan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전쟁 때문에 산업시설이 파괴된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독일로부터 받아야 할 배상금의 규모가 줄어들고 시기도 늦어지기 때문에 파운드화의 가치하락을 감수해야 했다. 이것은 물가상승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도스 플랜의 성공은 유럽 대륙의 금융질서 회복을 향한 큰 진전이었지만, 정작 금융 종주국 영국의 형편은 더 나빠졌다.

(중략)

  세계대전에 뒤늦게 참가하여 피해가 가장 적었던 미국은 풍부한 노동력과 자원을 통해서 수출을 늘림으로써 당시 유럽의 금을 마구 빨아들였다. 따라서 전쟁이 끝난 뒤 금본위제도의 존속 여부는 영국이 아니라 미국의 손에 달려 있었다. 반면 유럽 국가들은 금 대신에 이웃 나라의 화폐를 외환 보유액으로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영국은 프랑화를, 프랑스는 파운드화를 각각 대외준비자산으로 비축해두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유럽 국가들이 말로는 금본위제도를 떠들었지만 현실은 금환본위제gold-exchange standard였다는 점이다. 상당량의 금이 미국에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금태환 요구가 차질 없이 이행되도록 유럽 중앙은행들이 연대책임을 지는 시스템이다. 이런 살얼음 같은 시스템은 국제공조가 튼튼하지 않으면 그리 오래갈 수 없는 허약한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체결된 주요 중앙은행 간 통화스왑계약currency swap contact도 이것과 같다.)

(중략)

  국제통화제도가 붕괴되는 혼란 속에서 세계에서 금이 가장 많았던 미국도 1933년 금본위제도를 포기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취임 이튿날, 달러화의 약세를 통해 수출을 늘리고 경제를 회복시키겠다는 생각에서 금태환 중지를 선언했다. 미국이 이렇게 나오니 벨기에, 캐나다, 아르헨티나,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체코, 일본, 콜롬비아 등도 잇달아 금본위제도를 중단했다. 이것이 금본위제도의 마지막이었다. (pp. 31~37.)


2-2. 근데 점차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시장의 확장 속도가 금의 유입량 증가 속도보다 훨씬 빠르니까 ‘금=화폐’라는 공식을 지키기가 어렵게 됐다는 거다. 거기다가 일시적으로 많은 돈이 필요한 상황까지 종종 발생하면서(예컨대 전쟁) 기본의 본위제도가 유지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고, ‘법정화폐’ 개념이 등장했다. 화폐의 가치가 금(이나 은)에 결부된 것이 아니라, 화폐의 발행과 유통은 법과 제도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돈=금’이라는 불문율이 깨지기를 바라는 독일 국민에게 1905년 놀라운 복음이 전해졌다. 게오르크 크나프라는 학자가 『화폐국정설』이라는 혁명적 저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했다.


  “화폐는 법의 산물이다Geld ist ein Geschöpf der Rechtsordnung.”


  그리고 ‘법정화폐Fiatgeld’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소재가치에 관계없이 명목가치로 유통할 것을 국가가 강제한 화폐’라는 뜻인데, 이는 오늘날에는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당시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생뚱맞은 개념이었다. 크나프의 주장대로 금과 상관없이 국가가 강제로 화폐를 유통할 수만 있다면, 크나프의 주장대로 금과 상관없이 국가가 강제로 화폐를 유통할 수만 있다면, 국가가 사방에 흩어져 있는 발권특허charter를 회수하여 한 은행에 몰아줄 수도 있다. 국가가 발권은행을 직접 소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크나프의 사상에 젖어든 독일 정부는 1909년 라이히스방크에 항구적인 발권 독점권을 허용했다.

  크나프 이전까지는 돈은 스스로 가치가 있어야 하고 정부가 가치문제에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파운드나 리라Lira 등 무게단위를 화폐단위로 쓴 것은,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이 화폐재료인 금속의 도량형을 정하거나 품질을 관리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화폐로 쓰일 금속의 종류와 외국 화폐와의 교환비율은 시장, 즉 개인이 결정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복본위제도bimetalism를 천명하고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법률로 정하더라도 그 비율이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정부가 화폐문제에 개입할 수 없는 증거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화폐제도는 개인적 선택의 결과”라는 생각이 상식으로 통했다. 그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카를 멩거였다. (중략)

  카를 멩거는 화폐금융 분야에서도 주류 경제학을 선도했다. 그는 『화폐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화폐는 물물교환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탄생한 발명품”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화폐의 출현은 개인적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에 화폐 문제에 정부나 법률이 끼어들 공간이 없었다. (중략)

  그런데 카를 멩거가 이끄는 오스트리아학파에게 무명의 신인 크나프가 도전장을 던졌다. “화폐는 법의 산물이다”라는 크나프의 주장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감히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엄청난 고증을 통해 내려진 결론이었다.

  예를 들어 화폐가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하지만, 화폐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사유재산제도 자체가 없었다. “멩거는 역사에 근거하지 않고 순전히 머릿속으로 화폐의 탄생을 상상했다”는 것이 크나프의 결론이었다.

  크나프와 같이 역사적 사실을 중시하는 학자들을 역사학파historische Schule라고 하는데, 크나프의 주장대로 법률의 힘으로 화폐의 탄생과 유통이 결정된다면 금이 많아진다는 것은 화폐제도 유지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반드시 금이 많아야만 화폐제도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크나프의 주장은 자력갱생을 희구하는 독일 국민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pp. 63~65.)


2-3. 그러면 뭐가 달라지냐. 애초의 금본위제도 하에서 화폐의 가치는 자유로운 시장질서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혹은 경제주체 간에 일어나는 전체 거래들의 총합으로 형성되는 것이지만, 화폐의 가치가 법과 제도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발권력을 가진 ‘법과 제도’ 다시 말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셈이다. 물론 ‘법정화폐’ 개념을 처음 말한 독일에서는 이게 엉뚱하게 튀어서 극단적인 국가주의로 가서 문제지만... 이 책의 저자는 자유로운 시장 질서니 자율조정시장이니 하는 말을 믿지 않기도 하지만(6장에서 신랄하게 깐다) 국가권력이 발권력을 쥐고 화폐 발행과 유통을 임의로 쥐고 흔드는 것도 반대한다. 국가권력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발권력을 마구 휘두르면 화폐가치가 그에 따라 널을 뛰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까 뭐라 그랬어, 화폐의 가치는 ‘권력(자)’이 아니라 ‘법과 제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했잖아. 저자가 줄곧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민주적 가치를 강조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 것 같다.


3. 그래서 두번째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다. 8장부터 10장까지 한국은행의 설립 과정과, 그 과정에서 한국은행의 성격(정치적 중립성)이 어떤 식으로 성립되고 침해되었는지를 길게 서술한다. 그 내용까지 굳이 여기서 정리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9장 정도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비교적 평이한 문체로 정리하고 있는데, 좀 더 꼼꼼하고 단단한 내용을 찾는다면 권혁은의 석사학위논문 「1950년대 은행 귀속주 불하의 배경과 귀결」과 『역사와 현실』 98호에 실린 동일저자의 논문 「1950년대 은행 귀속주 불하의 배경과 귀결」이 딱이다(...라고 하는데 정작 나는 아직 안 읽었다;;;).


  케인즈를 계기로 인류는 황금족쇄에서 벗어났다. ‘돈=금’이라는 무식한 불문율을 깨고 좀 더 세련된 방법을 찾았다. 돈에 대한 약속만으로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케인즈의 생각은 1944년 IMF의 탄생으로 실현되었다. 모든 나라가 자국의 화폐와 달러의 교환을 약속하고, 미국은 금 1온스당 35달러를 약속함으로써 돈이 잘 도는 평화로운 문명사회를 만들었다. 개인이 아닌 국가 간의 협약을 통해 국제통화제도를 만드는 것은 화폐제도가 국가주권의 산물이라는 크나프와 미첼 이네스의 주장,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케인즈가 고안한 제도도 완전하지는 않다. 오늘날 IMF 체제는 도전받고 잇다. 앞으로 어떤 시스템이 이를 대체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금과 결별한 문명사회가 다시 야만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그리고 민주적 통치자가 폭력적 통치자가 되지 않으려면, 온갖 유혹을 이겨내고 화폐가치를 지킬 수 있는 안전장치가필요하다.

  그 안전장치는 바로 독립된 중앙은행이다. 이것이 유구한 화폐의 역사에서 인류가 마침내 금이라는 안전장치를 포기하면서 새로 찾은 해답이다. 화폐국정론이라는 진화된 생각은 독립된 중앙은행이라는 보조장치가 있어야 안전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pp. 78~79.)


ps. 기본적으로는 좋은 책이지만, 내가 이마만큼 공부를 많이 했다...는 식의 문체는 좀... 좀... 그렇다. 저자가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블룸필드 보고서만 해도, 이 책에서 딱히 처음 인용한 것도 아니고 그간 국내학계에서 전혀 검토하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설마 내가 아는 거랑 다른건가)


  패기만만한 20대의 청년 사업가였던 매리너 에클스가 마흔을 바라보던 즈음에 대공황이 터졌다. 그 심각성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과거의 세계관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현실을 보고 에클스는 정부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경제가 어려울 때 혼자만 살겠다고 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케인즈가 『일반이론』을 통해 절약의 역설(Paradox of Thrift, 개인의 입장에서는 저축을 늘리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사회 전체에는 오히려 국민소득 감소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이론)을 설명하기도 전에 사업가의 직관으로 그 개념을 감지했던 것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는 오히려 돈을 더 풀도록 하는 제도나 존재가 필요했다. 유한한 목숨을 가진 개인과 파산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업이 돈을 풀 수 없다면 영속성을 가진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느꼈는데, 이는 매리너 에클스가 가지고 있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신념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에클스의 사상전향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자유분방한 서부에서 자기 사업으로 큰돈을 번 사람들에겐 연방정부라는 개념조차 희미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개입을 강조하는 케인즈의 주장은 소련공산주의자들의 생각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p. 136.)


  에클스의 실력이 돋보인 것은 루스벨트 행정부의 2년차인 1934년에 제정된 연방주택건설법National Housing Act이었다. 주택경기의 침체와 담보로 잡힌 집ㅇ르 잃은 서민들의 주택마련을 지원하기 위한 법이었다. 에클스는 이 법에서 공공주택건설public housing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주택은 개인의 소유물이지만 이의 구매를 정부가 도와주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에 근거한 개념이다. 집을 가진 사람은 이 법에 따라 주택개량을 위해 2000달러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고, 집을 사려는 사람에겐 정부가 80%까지 보증을 했다. (중략) 이런 조건의 융자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물론 연방정부의 적자도 덩달아 확대되었다. (p. 139.)


  8월 25일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일본이 투항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임금, 가격, 생산 등에 대한 전시통제 조치들을 일거에 해제하였다. 각종 전시위원회들도 하나둘씩 폐지했다.

  국내물가를 책임지고 있던 에클스는 이런 조치에 걱정이 앞섰다. 정부의 힘으로 가까스로 누르고 있었던 임금과 가격상승 압력이 일시에 분출되면 물가가 큰 폭으로 오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부동산 가격 폭등을 막으려면 양도소득세capital gain tax만이라도 대폭 인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 재무장관에 임명된 프레드 빈슨Fred M. Vinson을 찾아가 양도소득세율을 대폭 높여서 주택가격 상승을 억제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물가가 일시에 오르면 파업이 확산될 우려가 잇으므로 전쟁 중에 유지되었던 쟁의중단선언no strike pledge은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주지시켰다.

  하지만 에클스의 주장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임금이 다소 오르더라도 물가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동안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받아왔던 루스벨트 시대의 각종 임시조치들을 폐지하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한 국민의 시대적 요구라고 생각했다. (중략) 경제문제를 순진한 눈으로 본 것이다.

  에클스가 예견한 대로 물가상승 압력은 바야흐로 전 부문에 걸쳐 태풍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1945년 말 근로자들의 파업이 폭증하고 두 달 만에 임금이 18%나 올랐다.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생산량 감소로 인해 일반물가도 폭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무부는 연준이 제안한 한계지급준비제도reserve requirement system 실시까지 반대했다. 전쟁 중에 행정부로 넘어간 금리 결정권도 환원되지 않았으니 연준은 대출담보비율 인상만으로 인플레이션과 힘겹게 싸워야 했다. (pp. 157~158.)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물러나는 189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화폐제도가 최고 쟁점이었다. 36세의 나이로 혜성처럼 등장한 민주당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 Bryan 후보는 서부 네브라스카 하원의원 시절부터 대단히 급진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대표적인 대선공약은 복본위제도 보구기였다.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녔던 다른 군소정당에서도 그의 공약을 지지하고 나왔다. 이로써 브라이언은 민주당만이 아닌, 서민층을 대변하는 진보세력의 연합후보로 떠올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동화 『오즈의 마법사Wizard of Oz』(1900-1919)가 발표되었다. 이 동화는 네브라스카와 이웃한 사우스다코타 주의 지방신문 발행인 프랭크 바움L. Frank Baum이 쓴 것이다. 바움은 당시 지역정서를 대변하는 브라이언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직업상 그것을 밝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즈의 마법사』라는 동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선거운동을 도왔다.

  도로시라는 소녀의 모험을 그린 이 동화는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많은 정치적 코드가 담겨 있다. 이야기는 캔자스 주(미국 영토의 중심, 미국의 서민층)에 사는 여자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토네이도(미국 사회의 혼란)에 휩쓸려 어딘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곳으로 날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로시가 도착한 곳은 오즈(Oz, 무게단위 ‘온스’의 약자)라는 동네의 서쪽 끝(서부)이었다. 그곳을 다스리던 서쪽의 착한 마녀가 토네이도 때문에 죽은 것(서부 경제의 피폐)을 안 맨발의 도로시는 그녀의 은색구두를 신는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역시 길을 잃은 세 친구를 만난다. 양철인형(상공업·공장 노동자), 허수아비(농업, 농민) 그리고 모곳리만 크고 용기가 없는 사자(정계)였다. 이들 넷은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마법사가 오즈의 동쪽 끝(워싱턴 D.C.)에 사는 또 다른 마법사라는 말을 듣고 노란 벽돌로 만들어진 길(금본위제도)을 따라 험난한 여행을 한다.

  천신만고 끝에 마법사의 집에 도착했더니, 마법사는 푸른색 에메랄드로 만들어져 바깥세상이 푸르게만 보이는 이상한 집(금권정치)에 갇혀 사는 사람이었다. 직접 만나보니 그 마법사는 소문과 달리 아무 마법도 없는 무능한 존재(클리블랜드 대통령)였다. 그 마법사는 자기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도로시가 신고 있던 은색구두(은화 발행)야말로 모든 소원을 이뤄주는 신통한 물건이라고 고백한다. 그 말을 듣고 은색구두를 부딪치며 소원을 비는 순간 도로시와 친구들은 각자의 소원을 모두 이룬다.

  이 동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복본위제도를 통해서 서민 중산층의 민생고가 해결되고 모든 산업이 잘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실현할 사람은 브라이언밖에 없다는 것이 숨겨진 정치적 코드였던 것이다.

  1896년의 대통령 선거는 금본위제도냐, 복본위제도냐를 두고 남북전쟁 이후 계속되어왔던 지역 간 대결의 마지막 승부였다. 그 선거에는 철저하게 지역감정이 담겨 있었다. 겨로가는 공화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경제력을 가진 동·북부에서 반기업적 정서를 가진 브라이언을 공산주의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브라이언이 당선되면 회사문을 닫겠다고 위협을 하면서 노동자들에게 공화당의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후보에게 표를 던질 것을 강요했다.

  금본위제도를 지지하는 매킨리 후보가 당선되면서 세상을 곧 뒤집을 것 같이 시끄러웠던 복본위제도 옹호론자들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중략) 1896년 대통령 선거 이후 남아프리카와 호주 등지에서 새로운 금광이 연속적으로 발견되고 금을 쉽게 추출하는 새로운 공법(靑化法)이 개발되면서 금의 생산량이 세계적으로 크게 늘었다. 즉 은을 돈으로 쓰지 않는데도 인플레이션이 생길 정도로 화폐공급이 늘어났다. 1893년의 지독했던 불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졌다. (pp. 197~199.)


  데이비드 놀런이나 아인 랜드나 앨런 그린스펀 식의 객관주의에는 “수치화된 것은 정확한 것”이라는 미신이 작용한다. (중략)

  계량모형을 통한 경제전망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중략) 미래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처신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이 점은 자유의지로자인 아인 랜드와 데이비드 놀런이 주장하는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거기까지는 수긍할 수 있다.

(중략)

  문제는 자유의지론자들이 내세우는 주장의 앞에 붙는 전제조건이다. 자유의지론자들은 인간이 느끼는 효용과 감정이 가지는 모호성 및 추상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객관적인 실체가 있다고 본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수치화된 미래가 있다고 믿게 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들이 강조하는 자유의지는 사라지고 숫자로 표현되는 운명론으로 빠지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철학으로서의 미국식 자유의지론은 스스로 모순을 잉태하고 있는 궤변이요, 개똥철학이다.

  인간의 미래가 담긴 지도는 없다. 경제활동의 미래를 설명하는 경제전망은 미리 정해진 사실을 그린 지도가 아니라 길을 가는 데에 참고하는 나침반일 뿐이다.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객관적인 실체들이 반드시 있다고 믿고, 매사를 수치로 표시하기 좋아하는 앨런 그린스펀 류의 개고간주의에는 지도와 나침반을 혼동하는 중대한 오류가 있다고 보인다.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대단히 정교한 수리모형을 통해 대형 투자은행investment bank들이 스스로 리스크를 관리해 나갈 수 있다는 믿음, 즉 시장근본주의market fundamentalism라는 개똥철학에서 시작된 것이다. (pp. 254~255.)


교정.

403쪽 6줄 : 구한말에도 급진개혁가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신식화폐발행장정’을 통해 은본위제도를 선언(1894년 8월)하면서 화폐주권을 주장했었지만 곧 실패했다. 당시 김옥균을 앞세운 급진개혁파의 은본위제도 채택은 -> 신식화폐발행장정은 1894년 8월의 일이 맞지만, 김옥균과 갑신정변은 1884년의 일이다. 같은 쪽 60번 각주에서 "김옥균 일파”를 지칭한 것 역시 오류다. 전체 논지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오류지만, 어쨌거나 틀린 건 틀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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