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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문이 있었다 (태극문 20주년 기념위원회, 새파란상상, 20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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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문이 있었다 (태극문 20주년 기념위원회, 새파란상상, 2014.)

Dog君 2018. 8. 19. 17:45


1-1. 슈퍼히어로 영화를 좋아한다. 어지간하면 나올 때마다 챙겨보고 (꼭 영화관에서 보지 못하면 다운받아서라도 본다) 원작 만화도 사서 본다.


1-2. 그저 때려부수기나 하는, 판타지로 가득한 블록버스터가 뭐가 좋으냐고 물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판타지스러운 면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상황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유로움 덕분에 변수 통제도 훨씬 쉬워지고, 따라서 보다 근본적이고 전형적인 윤리 실험이 가능해진다. 당장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시리즈는 물론이고 마블 원작의 캡틴아메리카나 데어데블 같은 명작이 딱 그렇다.


1-3. 미국의 슈퍼히어로가 마블과 DC라면, 동양의 슈퍼히어로는 아마도 무협소설일거다.


2-1. 슈퍼히어로가 어쩌고 무협이 저쩌고 장황하게 늘어놨는데, 정작 나는 무협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 흔한 『영웅문』도 띄엄띄엄 봤고, 『묵향』이니 하는 것도 친구들이 보는 것을 표지만 본 정도였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런 내가 완독한 유일한 무협소설이 『태극문』이다. 1995년 여름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다른 친구들이 한창 『퇴마록』을 읽을 때, 도서대여점에서 빌려온 『태극문』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초식 묘사와 야한 장면들은,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아이에게 엄청난 재미였던 것 같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도 곧 『태극문』을 잊었다.


2-2. 그랬다가 2~3년 전쯤에 『태극문』이 다시 생각났다. 책을 다시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많던 도서대여점이 사라지면서, 그 도서대여점들이 품고 있던 만화책과 무협소설들이 대거 중고시장에 나왔기 때문이다. 『태극문』 6권을 모두 구하는 것은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3. 그 와중에 『태극문』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태극문』은 붕괴하다시피한 한국 무협소설 시장이 부활하는 계기가 된, 이른바 ‘신무협’의 효시라고 한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 다른 작품을 꼽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태극문』 발간 20주년을 기념하는 책이 나왔고, 바로 그것이 『태극문이 있었다』이다.


  그 다음으로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무협소설시장의 몰락 이후 재기의 신호탄을 터뜨린 것이 바로 용대운의 《태극문》이다. 사실 시간 상으로 따지면 그보다 1년 전 고 서효원의 친형인 서희원과 유랑이라는 필명으로 무협소설을 쓰다가 만화스토리 작가로 전업한 유광남이 차린 출판사인 서울창작에서 출간한 서효원의 《대자객교》야 말로 90년대에 다시 시작된 무협소설의 붐을 알린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 자극을 받아 80년대에 무협작가로 이름을 날린 야설록이 세운 뫼출판사에서는 야설록 본인과 금강의 작품을 재간으로 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용대운의 신작인 《태극문》까지 내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서효원과 야설록, 금강의 작품들은 모두 과거 한 번 출간되었던 작품들의 재간이었고, 이 작품출간으로 인한 새로운 움직임과 영향력 같은 것이 미미했음을 생각하면 90년대 무협의 시작을 《태극문》부터 꼽는 것이 무리인 것같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태극문》은 그 작품 자체의 의미도 있지만 그 이후 이어진 신무협의 여러 작가, 작품의 탄생과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태극문》이 없었더라도 90년대 무협 붐은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용대운이 키워낸 나를 비롯한 몇몇 신무협작가들이 없었더라도 무협의 새로운 경향을 있었을 수 있고, 그게 신무협, 즉 새로운 무협이라고 불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태극문》과 용대운이 없었다면 좌백과 몇몇 작가들은 없었고, 신무협도 지금같은 모양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이 《태극문》 20주년을 기념하고자 하는 이유다. (좌백, 「태극문과 나」, pp. 17~18.)


  《검왕》을 마지막으로 무협소설계를 떠났던 용대운은 4년 뒤인 1994년 화려하게 복귀한다. 서효원의 《대자객교》가 재출판되어 독자들의 환영을 받은 직후가 되는데, 이 장면에서 주목되는 것을 그 복귀의 경로이다. PC통신 무협소설 동호회(하이텔의 무림동)에 “《검왕》 탈고 이후 출간하려고 구상했다가 반 정도 쓰고 중지했던 작품”인 《태극문》을 연재했던 것인데, 이것이 큰 인기를 끌면서 소위 창작무협소설의 부흥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태극문》 이후의 한국무협소설을 ‘신무협’이라고 부르는 세간의 관습에 따른다면, 신무협은 구무협과 그 스타일에서 구분될 뿐 아니라 매체라는 측면에서 구무협이 만화방용 출판 위주인데 신무협은 PC통신(나중에는 인터넷) 연재와 도서대여점용 출판을 두 축으로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태극문》은 스타일과 매체 두 측면 모두에서 ‘신무협’의 효시이거나 선구자라고 할 만하다. (후략) (전형준, 「용대운, 낭만적 자아를 추구하는 복수담과 완성담」, p. 54.)


4. 책을 읽게 된 계기를 길게 썼지만, 『태극문』에 헌정한다는 이 책의 기획의도도 그렇고, 무협소설의 역사에 대해 정말 1도 모르는 내가 이에 대해서 뭐라뭐라 평을 붙이는 것은 주제넘은 일인 것 같고... 『태극문』에 대한 내 감상을 짧게 붙이는 것으로 대신해야겠다.


5. 『태극문』에서 주인공 조자건의 상대인 화군악은 사실상 맥거핀 내지는 조건에 가까운 것 같다. 특별한 대사도 없기 때문에 사실상 캐릭터로서 기능하지 않고, 단지 조자건, 섭보옥, 번우량, 위지혼, 모용수 다섯 사람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 정도의 의미만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조자건, 섭보옥, 번우량, 위지혼, 모용수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하나의 주체가 갖는 다섯 측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조자건은 인내/성실성, 섭보옥은 매력/카리스마, 번우량은 인성/정의감, 위지혼은 의지/목표의식, 모용수는 지성/냉정함, 이라고나 할까. 최후의 순간 화군악과의 일전을 앞두고 이들 다섯이 다시 힘을 모으는 장면은, 궁극에 이르기 위해서는 모든 측면을 모두 아울러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 아닌가 싶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힘이 더 실리는 쪽은 있다. 태극문과 조자건은 단순하고 시시한 것이라 할지라도 성실함이 있다면 충분히 제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절세의 무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실함 자체가 곧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만시간의 법칙이니 하는 것까지 들먹이고 싶지는 않지만,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다. 프로는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라는 『에브리맨』의 구절이 떠오르는 것이 나만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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