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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200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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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2009.)

Dog君 2018. 8. 20. 13:24


1.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이고 에세이고 읽어본 적이 없지만, 이런 글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요즘처럼 달리기가 재미있을 때 읽으니, 책도 덩달아 재미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서 재미있는 걸지도...)


2. 네, 차곡차곡 쌓아가는 성실함과 시간의 힘. 저도 믿습니다.


  강한 인내심으로 거리를 쌓아가고 있는 시기인 까닭에, 지금 당장은 시간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거리를 뛰어간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아마 비슷한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계속하는 것-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pp. 18~19.)


  나는 팀 경기에 적합한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경기에는 잘 맞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좋든 싫든 그것은 타고난 나의 성격인 것이다. 축구나 야구 같은 경기에 참가하면(어린 시절을 빼놓으면 그런 경험은 실제로 거의 없지만) 언제나 어렴풋이나마 거북스런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형제가 없다는 것도 관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게임은 도저히 몰입할 수가 없다. 스쿼시는 좋아하는 스포츠지만 막상 경기를 하게 되면 이기든 지든 묘하게 안도감을 얻을 수 없다. 격투기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나라고 해서 지는 걸 좋아할 리는 없다. (중략) 그보다는 나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이 쏠린다. 그런 의미에서 장거리를 달리는 것은 나의 성격에 아주 잘 맞는 스포츠였다.

  마라톤 풀코스를 달려보면 알게 되지만, 레이스에서 특정한 누군가에게 이기든 지든 그런 것은 러너에게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우승을 목표로 뛰는 일류 선수라면 눈앞의 라이벌을 이기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겠지만, 일반의 러너에게 개인적인 승패는 큰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물론 ‘저 녀석한테 지고 싶지 않다’는 동기를 갖고 달리는 사람도 더러 있을지 모르고, 그것은 나름대로 연습할 때 자극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특정한 라이벌이 어떤 사정으로든 그 레이스에 참가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레이스의 동기가 소멸(혹은 반감)해버리게 되면 러너로서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pp. 24~25.)


  달리기 시작하고 한동안은 그다지 긴 거리를 달릴 수는 없었다. 20분이나 기껏해야 30분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로도 헉헉 하면서 숨이 차버리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랫동안 운동다운 운동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달리는 것을 이웃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도 어쩐지 좀 쑥스러웠다. 어쩌다 이름 뒤에 붙는 소설가라는 직함이 쑥스러운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달리는 사이에 달리는 것을 몸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에 따라 거리도 조금씩 늘어갔다. 폼 같은 것도 갖춰지고 호흡의 리듬도 안정되고 맥박도 차분해져 갔다. 스피드나 거리는 개의치 않고 되도록 쉬지 않고 매일 달리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게 달린다는 행위가 하루 세끼 식사나 수면이나 집안일이나 쓰는 일과 같이 생활 사이클 속에 흡수되어 갔다. 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습관이 되고, 쑥스러움 같은 것도 엷어져 갔다. 스포츠 전문점에 가서 목적에 맞는 제대로 된 신발과 달리기 편한 옷도 사왔다. 스톱워치도 구입하고, 달리기 초보자를 위한 책도 사서 읽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러너가 되어간다. (pp. 67~68.)


  매일 계속해서 달린다고 하면 감탄하는 사람이 있다. “무척 의지가 강하시군요”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칭찬을 받으면 물론 기쁘다. 욕을 먹는 것보다 훨씬 좋다. 그런데 의지가 강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세상은 그처럼 단순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라고 해도 무방하다. 솔직히 말하면 매일 계속해서 달린다는 것과 의지의 강약과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내가 이렇게 해서 20년 이상 계속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아하는 것은 자연히 계속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할 수는 없다. 설령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오히려 몸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주위의 누군가에게 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달리는 것은 근사한 것이니까 모두 함께 달립시다” 같은 말을 되도록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후략) (p. 73.)


  이와 같은 능력(집중력과 지속력)은 고맙게도 재능의 경우와 달라서, 트레이닝에 따라 후천적으로 획득할 수 있고, 그 자질을 향상시켜 나갈 수도 있다. 매일 책상 앞에서 앉아서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이것은 앞서 쓴 근육의 훈련 과정과 비슷하다.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끌어올려 가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중략)

  장편소설을 쓴다고 하는 작업은 근본적으로는 육체노동이라고 나는 인식하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는 두뇌 노동이다. 그러나 한 권의 정리된 책을 완성하는 일은 오히려 육체노동에 가깝다. 물론 책을 쓰기 위해서 뭔가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거나 빨리 달리거나 높이 뛰거나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작가의 작업을 조용한 지적 서재 노동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커피 잔을 들어 올릴 정도의 힘만 있으면 소설 같은 건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그러나 실제로 해보면 소설을 쓴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신경을 레이저 광선처럼 한 곳에 집중하고, 무의 지평地平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적합한 단어를 일일이 선택해서 전체의 흐름을 있어야 할 위치에 계속 유지시키는-그러한 작업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장기간 동안 필요로 한다. 실제로 몸을 움직이고 있지는 않지만, 뼈를 깎는 듯한 노동이 몸 안에서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물을 생각하는 것은 머리(마인드)이다. 그러나 소설가는 ‘이야기’라고 하는 의상을 몸에 감싼 채 온몸으로 사고하고, 그 작업은 작가에 대해서 육체능력을 남김없이 쓸 것-대부분의 경우 혹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pp. 122~124.)


  세상에는 때때로 매일 달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고 싶을까” 하고 비웃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이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설령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온전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 라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이 수적으로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렇나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의견에는 아마도 많은 러너가 찬성해줄 것으로 믿는다. (pp. 127~128.)


  아침, 강변의 코스에서 대체로 비슷한 시간에 얼굴을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작은 몸집의 인도인 부인이 혼자 산책을 하고 있다. 나이는 60대로 보이며 얼굴은 기품이 있고 언제나 깔끔한 차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어쩌면 조금도 이상한게 아닌지도 모르지만-매일 다른 옷을 입고 있다. 산뜻한 사리에 몸을 감싸고 있을 때도 있고, 대학의 이름이 새겨진 헐렁한 셔츠를 입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한 번도 그녀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오늘은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도 이른 아침 러닝에 있어 나의 작은 즐거움 중 하나가 되고 있다.

  크고 새카만 보정 기구를 오른쪽 다리에 붙이고 빠른 걸음으로 산책을 하고 있는 아저씨도 있다. 몸집이 큰 백인이다. 어딘가 큰 상처를 입은 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보정 기구는 벌써-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4개월이나 붙어 있는 상태다. 그의 오른쪽 다리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무튼 걷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는 상당히 빠른 스피드로 걷고 있다. 큰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묵묵히 빠른 속도로 강변도로를 걷는다.

  어제는 롤링 스톤스의 《베거스 뱅큇Beggar’s Banquet》을 들으면서 달렸다. 〈심퍼시 포 더 데빌Sympathy For The Devil〉의 예의 ‘후후woo woo’라고 하는 펑키풍의 백코러스는 달리는 데 실로 안성맞춤이다. 그 전날에는 에릭 클랩튼의 《렙타일Reptile》을 들으면서 달렸다. 어느 쪽이나 흠잡을 데 없는 음악이다. 마음에 와 닿고, 몇 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특히 《렙타일》은 달리면서 꽤 여러 번 들었다.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렙타일》은 천천히 러닝을 하는 아침에 듣기에 딱 좋은 앨범이다. 강요하는 듯한 느낌과 부자연스러움이 티끌만큼도 없다. 리듬은 항상 명료하고 멜로디는 한없이 자연스럽다. 내 의식은 조용히 음악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내 두 발은 리듬에 맞춰 규칙적으로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간다.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섞여 때때로 뒤에서 “왼쪽 으로 갑니다!On your left!”라는 고함이 들린다. 그리고 경주용 사이클이 쉭 하는 소리를 내며 내 왼쪽을 추월해간다. (pp. 146~148.)


  달리고 있는 동안 몸의 여러 부분이 차례차례 아프기 시작했다. 오른쪽 허벅지에 한동안 통증이 오고, 그것이 오른쪽 무릎으로 옮겨가고, 왼쪽 허벅지로 다시 옮겨가고......하는 식으로. 몸의 각 부분이 번갈아가며 들고일어나서 자신들의 통증을 소리높여 호소했다. 비명을 올리고, 불평을 늘어놓고, 사정을 호소하고, 경고를 해댔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100킬로를 달린다는 것은 미지의 체험이었고, 모두 각기 할 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잘 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은 인내하며 묵묵히 달려 나갈 수밖에 없다. 강한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려고 하는 급진적인 혁명의회를 당통Jacque Danton이나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같은 이들이 변론을 구사해서 설득하는 것처럼, 나는 신체의 각 부위를 열심히 설복한다. 격려하고 매달리고 치켜세우기도 하고 질책도 하며 고무도 한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될 일이 아닌가, 지금은 어떻게든 참고 힘내다오, 라고. 하지만 생각해보면-하고 나는 생각한다-결국은 두 사람 다 목이 뎅강 날아가 버렸잖아. (pp. 169~170.)


  그러면 그때 그녀는 조금씩 롤링의 움직임을 늘려 나갔다. 아주 조금씩. 그것도 “이건 롤링 연습입니다”와 같은 말은 하지 않고, 개별적인 몸의 움직임을 가르쳐 나간다. 그 가르침을 받는 쪽은 그 연습의 구체적인 의도는 모른다. 그저 들은 대로 몸의 그 부분을 차근차근 움직이고 있을 뿐. 어깨 돌리는 법을 배울 때에는 어깨 돌리는 법만 집요하게, 아주 싫증이 날 정도로 반복시킨다. 어깨 돌리는 법 연습만으로 하루가 끝날 때도 있다. 이건 상당히 피곤하고 허무하다. 그러나 나중에 돌이켜보면 ‘아, 그런 것이었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품 조각이 전부 조립되어 전체의 모습을 보이게 되면, 거기서 처음으로 개별 부품의 기능을 알 수 있게 된다. 밤이 새고 하늘이 밝아지면, 그때까지는 그저 뿌옇게밖에 보이지 않던 집의 지붕 모양이나 색깔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드럼 세트의 연습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며칠이고 베이스 드럼의 패턴만 되풀이한다. 며칠이고 심벌 연습만 하게 한다. 며칠이고 탐탐Tam Tam 연습만...... 단조롭고 지루하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게 일체가 되면 멋진 리듬 머신이 탄생한다.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집요하고 엄격하고 그리고 참을성 있게 개별 파트의 나사못을 조여 나간다. 물론 시간은 걸린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시간을 들이는 것이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 된다. 이렇게 해서 수영법 교정을 시작한 지 1년 반 뒤에는 이전보다 훨씬 멋있고, 비교적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장거리를 헤엄칠 수 있게 되었다. (pp. 243~244.)


교정.

163쪽 13줄 : 오츠크 해와 -> 오호츠크 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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