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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冊나부랭이

서울리뷰오브북스 11호 (서울리뷰, 2023.)

Dog君 2024. 2. 1. 09:39

 

  '서울리뷰오브북스' 11호를 읽었습니다. 작년 가을호를 이제서야 읽었네요;;

 

  고백하자면, 서울리뷰오브북스를 읽으면서 살짝 피로감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서평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피로감 같은 것이 있는데, 서리북도 그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느낌이 전혀 없습니다. 필자 섭외나 책 선정은 물론이고 글의 구성에서도 그런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호마다 기획이 충실해서 독자로서 참 기쁩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덕후라서 그런가, 이번에도 역시 박훈의 역사책 서평에 가장 먼저 손이 갑니다. 갑오개혁 관련 연구서라면 저도 대학원 과정 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오래된 책이라는 말인데, 신간 위주로만 짜여진 서평 문화에 은근히 거부감이 큰 저로서는 일단 반가운 마음이 큽니다. 다만 똑같은 이유로 살짝 불안하기도 합니다. 나온지 30년 가까이 된 책을 평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역사 서술을 논하는 이 서평에는 한국 근대사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그만큼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독자로서는 이 책들이 나온 이후의 근대사 연구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박훈의 서평에 대한 근대사 연구자의 의견이 겁나 궁금합니다.

 

  권석준의 서평은, 제게는 교양서에 대해 전문 연구자가 쓰는 서평의 모범으로 보입니다. 이 서평은 책의 한계를 명확히 짚어내면서도 교양서로서의 성취와 전문 연구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동시에 인정합니다. 유시민의 '교양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고 이를 글로도 정리하는 중인 저에게는 너무 큰 참고가 되는 글입니다. (내 글, 다시 써야 될 거 같은데;;)

 

  이제 12호를 신청하러 가야겠네요. ㅎㅎㅎ

 

  (...) 현업 과학자들이 전문적 연구를 풀어서 전달하는 것에는 늘 어려움이 따른다. 전문 용어나 개념은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더 기초적인 이론도 설명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본문보다 각주나 부록이 더 길어지는 일이 빈번해진다. (...) 받아들이는 측에서도 고통은 매한가지다. 독서는 독자가 가진 기존의 지식 체계와 새로 접한 지식의, 문자 그대로 뇌 속 신경 물질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화학 반응을 통한 융화 과정을 곁들인 고도의 지적 활동이다. 그런데 만약 이 융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상당한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다. 특히 조금이라도 깊이 들어가야 하는 분야의 과학 교양서는 더 그렇다. (...)

  과학의 학문적 훈련을 받지 못한 독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과학의 사유 방식을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의 진보의 가치를 알아 가는 과정에는 그래서 스토리텔링이 더 필요하다. 겉보기에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들을 하나씩 기둥으로 삼아 그 배경에 있는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들을 벽돌 쌓듯 촘촘하게 구성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효과적이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익숙했던 세계와의 연결 지점이 생기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권석준, 「사유 방식으로서의 과학 공부, 그리고 그 한계: 지식이 아닌 방법론으로서의 과학 -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150~151쪽.)

 

  유시민은 이 어려운 작업을 (...)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통해 어쨌든 꾸준히 시도했으며, 일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그러한 소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자신에게 익숙한 지적 플랫폼인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기대어 자신이 읽은 과학책에서 전달하고자 했던 지식과 방법론은 뒤로 밀어내고, 필요한 부분만 취사선택하여 자신의 기존 세계관을 강화하는 재료로 추출하는 모습도 여전히 남아 있다 (...) 최신 성과를 다룬 과학 교양서가 아닌 고전을 읽고 멈춘 후, 고전에서 다룬 내용이 현재 과학의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은 장면도 보인다.

  이러한 명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글쓴이의 수양록은 비슷한 입장에 있는 독자들에게는 꽤나 친절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통로가 될 수 있다. 과학자의 입장이 아닌 독자의 입장에서, 엄밀함과 정확도를 추구하는 이공계의 방식이 아닌 인문학 본래의 취지, 즉 인간을 이해하자는 취지에서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과학의 세부 분야들을 관통해 과학을 인간의 활동이자 고유한 지적 경험으로 들여다보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 책을 읽은 독자라고 하더라도, 다시 그 입장에 서서 이 책을 읽어 본다면 새로운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세부 분야를 하나로 연결하는 인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에서도 이 책은 일독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글쓴이의 배경에 대한 고려는 물론, 그가 가진 세계관이나 인문학적 성찰의 방향에 동의하느냐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권석준, 「사유 방식으로서의 과학 공부, 그리고 그 한계: 지식이 아닌 방법론으로서의 과학 -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152~153쪽.)

 

  이 책의 고유한 가치 중 하나는 글쓴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 보다 많은 독자들, 특히 과학적 훈련을 받지 않거나 현대 과학의 장벽이 높다고 느끼는 독자들에게 생각보다 쉽게 과학의 영역으로 갈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점이다. 글쓴이는 스스로 파악한 방식대로 처음에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뇌과학부터 시작하여 (...) 60세를 넘은 중년 문과 남자가 좌충우돌하며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닥치는 대로 읽어 낸 지적 여정을 효과적으로 잘 요약하여 보여 준다. 그 과정에서 그가 읽고 언급한 70여 권의 과학 교양서 혹은 고전들에 대한 소개는 독자들에게는 유용한 덤이기도 하다. (...) 그가 보여 준 과학서 독서편력은 비슷한 지적 여정에 도전하려는 다른 독자들에게는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는 한때 스스로 고백했던 것처럼, '거만한 바보'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학서를 탐독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여정을 시작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은 과학자 스스로에게도 필요한 고백이다. 글쓴이는 자신의 책을 현업에 있는 과학자들이 보지 않기를 바라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이 책을 현업 과학자들이 한 번 정도는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열된 과학적 사실이나 최신 연구 결과들은 일견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는 내용으로 다가오겠지만, 영역 밖에 있던 중년의 '문과 남자'가 최대한 인간에게 가까운 언어와 인문학적으로 익숙한 개념으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과학에 접근하는 과정 자체는 현업 과학자들도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글쓴이가 환원론을 다루면서 언급했듯, 현대 과학은 그 발달 수준에 비례하여 이미 너무나 많은 분야로 세분화되어 있고, 서평을 쓰고 있는 나를 포함한 이공계 분야 연구자들은 좁은 전공 분야의 벽을 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결국 과학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연구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인류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자연 현상에 대한 미스터리, 혹은 아직 개발하지 못한 시스템, 혹은 아직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고 있을 정도로 깜깜한 영역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책의 글쓴이가 보여 준 다양한 접근과 시도는 과학자들에게도 영감은 물론, 잊고 있었을지도 모를 인간에 대한 방향 감각을 살려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은 간혹 과도할 정도로 객관성에 집착하고, 과학 자체를 교조적으로 따르는 전투적인 모습도 보인다. (...) 그렇지만 과학은 인류가 문명을 이룩한 후 지금까지 문명을 지속시켜 온 수단일 뿐이고, 생각하는 방법론일 뿐이다. 과학이 갖는 수단과 방법론으로서의 의미는 브레이크 없이 확장하려고만 하는 지금 세상에서 새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과학 그 자체에 심취하기보다는 과학이라는 경로, 수단, 방법론을 통해 인류가 그다음 단계로 진보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 현업 종사자이지만, 내게 익숙하지 않은 타 분야에 대한 이해를 위해 얼마나 다각도에서 노력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성찰할 부분이 없지 않다. 이 책의 글쓴이는 유명한 전직 정치인이자 영향력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런 수식어를 이 책에서는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 책의 후기를 통해 글쓴이는 이렇나 자신의 지적 탐험에 많은 사람이 동참하기를 조용히 권유하고 있는데, 만약 그것이 이 책의 목적 중 하나였다면 글쓴이의 목적은 일부 달성될 것이라 생각한다. (권석준, 「사유 방식으로서의 과학 공부, 그리고 그 한계: 지식이 아닌 방법론으로서의 과학 -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163~166쪽.)

 

  (...) 한국 개화파의 꿈은 '조선판 메이지 유신'이었으니, 개화파가 집결한 갑오 정부가 위와 같은 파격적 개혁정책을 순식간에 쏟아 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과 다른 점은 외국 군대의 결정적 후원 아래서만 그게 가능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미군의 주둔하에서 한국의 근대화가 진행되었지만(그게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처럼 '결정적 후원'이었는지는 별개로 치고), 미국은 한국을 병합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므로, 대한민국 수립 후 전개된 '친미 개혁'은 그다지 공격의 대상이 되지는 않아 왔다. 그러나 일본은 청일전쟁 발발 16년 만에 한국병합을 자행했으므로 갑오 정부의 '친일 개혁'을 평가하는 것은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에서 곤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갑오 정부하에서 민비시해가 일어났고, 갑오개혁의 주역 중 한 명인 박영효를 비롯해 개혁에 관계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훗날 일제가 준 작위를 받았다. 다 아는대로 민비시해에 반발한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은 타살되고 갑오 정부는 무너졌다. 이런 전개에서 갑오개혁의 역사적 의의를, 민족주의 사관의 근대사 내러티브가 담아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단발령 반대 의병, 아관파천 같은 '이상한 움직임'들을 반일 민족주의적 행동으로 '해석'하며 대서특필해 왔다.

  그보다 더 결정적으로 갑오개혁의 평가를 주저하게 만든 것은 동학농민운동과 갑오 정부의 대립이다. (...) 농민군이 겨냥한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갑오 정부와 개화파 역시 그들의 적이었다. (...)

  그러니 황해도 개화파의 중진 안태훈의 장남 안중근이 동학농민군과 맞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많은 한국 시민들은 이 지점에서 당황할 것이다. 안중근과 전봉준을 동시에 사랑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민족주의적 근대사 서사에서 이들이 대립할 여지는 없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안중근은 동학당이 외국을 배척한다는 명분으로 포악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점, 동학난이 청일 및 러일전쟁을 불러올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동학당이 일진회의 뿌리(일진회 회원 중 상당수는 동학도들이었다)라는 점에서 강경한 반대 태도를 보였다. 그의 이런 이식은 동학농민운동 당시뿐 아니라 '일진회의 뿌리' 운운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뤼순 감옥에 있을 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안중근만이 아니었다. (...) 독립협회의 기관지 《독립신문》도 개화파 정부의 단발령 반대 의병 진압을 찬성했다. (박훈, 「'친○ 개혁'의 주체성과 한국 근대사 서술 - 『갑오경장연구』·『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친미개화파연구』」, 194~197쪽.)

 

  한국과 같은 규모와 지정학적 위치를 갖는 국가의 역사 서술에서 외세를 '차단'하려는 자세는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그것은 혹시 또 하나의 '외세 콤플렉스'의 표현은 아닐까. 한국사에서 기어이 '주체성'·'자율성'·'내재적 발전'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일까. 외세의 작용이 그 어느 나라보다 심한 상황에서, 그 외세를 역이용해 개혁과 발전을 이루려 했던 선인(先人)들의 사정과 노력에 좀 더 겸허하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거이야말로 한국사의 등신대(等身大)의 '주체성'이 아닐까. 그걸 주목하면 저 악명 높은 '타율성론'에 빠지는 것일까. 해방 후 대한민국의 성취가 미국을 모델로 한 '친미 개화파'의 꿈이 어느 정도 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면, 19세기 말 '친일 개화파'와 '친미 개화파'의 노선을 근대사 서술의 중심 무대로 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그 시도는 철저히 실패했지만, 사람 살다 보면 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는 법이다. 하물며 역사에셔랴. (박훈, 「'친○ 개혁'의 주체성과 한국 근대사 서술 - 『갑오경장연구』·『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친미개화파연구』」, 203~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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