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자연에 이름 붙이기 (캐럴 계숙 윤, 윌북, 2023.) 본문

잡冊나부랭이

자연에 이름 붙이기 (캐럴 계숙 윤, 윌북, 2023.)

Dog君 2024. 1. 25. 11:09

 

  저는 이 책이 이토록 가독성이 좋은 것이, 책의 내용 뿐만 아니라 구성에서 기인하는 바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흡사 드래곤볼 같은 구조라고나 할까요. 드래곤볼의 손오공이 피콜로, 프리저, 셀, 마인 부우의 순서로 점차 강해지는 적을 상대했던 것처럼, (이런 구성/장르를 '배틀'물이라고 한다지요) 이 책은 린나이우스가 분류학을 정립시킨 이후 '진화의 계통'을 들고 나온 진화론, 각 생물개체의 특성을 수량화한 수리분류학, DNA를 통해 진화의 계통과 생물의 분류를 추적하는 분자생물학, '진화상의 새로움'에 주목한 분기학 등, 차례로 강적을 만나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그러고보니 그 결과도 드래곤볼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제 기억 속의 드래곤볼은 프리저(1단계)의 전투력이 53만 정도였고 이후에도 뭐 대충 그 언저리에서 놀았을텐데 (나는 이걸 왜 기억하고 있지...) 시리즈가 거듭된 끝에 요즘은 1억(...)도 훌쩍 넘었다고 하더만요. 분류학도 수리분류학이나 분자생물학 단계에 이르면 우리의 직관적인 이해(움벨트)와는 크게 멀어지죠. 차이가 있다면, 드래곤볼은 뇌절을 거듭하며 아득한 수준으로 끝없이 뻗어가는 반면 이 책은 말미에서 움벨트와 과학적 객관성의 차이를 다시금 좁힐 것을 주장하며 뇌절에 고삐를 당긴다는 것이겠죠.

 

  우리 주변을 둘러싼 자연계에 이름을 붙이고 이를 분류하는 일을 소재로 한 이 책의 이야기를 단지 분류학에만 국한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던 것처럼,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존재를 인식하고 수용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그게 어디 꼭 자연에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어떤 분은 여기서 인식론이니 언어적 전환이니 '차연差延differance'이니 하는 것들을 떠올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발달한 역사학 역시 "마법과 구분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 아닌가 싶어서 책을 덮으며 입가에 살짝 쓴맛이 도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 분기학자들은 생명의 질서를 진화적으로 올바르게 밝혀내면 '어류fish'라는 분류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단언했다. (...) 다른 분류군과 분명히 구별되는 통합적인 하나의 분류군으로서 어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빨간 점이 있는 모든 동물을, 또는 시끄러운 모든 포유류를 통합적인 단일 분류군으로 묶을 수 없듯이, 어류도 그런 단일 분류군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류가 없다고?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생각, 과학이라면 덮어놓고 믿는 사람의 마음마저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과학적 분류와 명백히 진실로 보이는 것(명백한 진실이란 게 과연 존재한다면)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결코 사실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에서 대대손손 물고기를 잡아 온 어부들이 그런 생각을 가볍게 반박할 테고, 미국 어류 및 야생돌물관리국에 소속된 많은 이들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무엇보다 명백하고도 단순한, 물고기들이라는 실상이 가장 강력한 반증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문제는 이렇다. 우리가 물고기라고 생각하는 모든 생물을 하나의 분류군에 집어넣는다고 해보자. 이것이 진짜 분류군으로서 성립하려면, 우리는 (진화적 유연성이라는 우리의 규칙에 따라) 이 분류군에 들어가야 할 또 다른 것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물고기를 낳은 물고기의 조상에게 또 다른 후손이 없는지 질문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답에는 놀랍게도 파충류라거나, 심지어 우리 인간처럼 물고기와는 지극히 거리가 먼 생물을 포함하는 분류군인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무척 물고기스럽지 않은 것들이 다수 포함된다. 하지만 우리의 엄격한 지침을 준수하려면 도마뱀, 거북이, 뱀, 곰, 호랑이, 토끼, 심지어 인간까지 그 모두를 다 물고기 무리에 집어넣어야 한다. 이러면 갑자기 '어류'라는 분류군이 그리 어류 같지 않은 것이 된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어류'라고 알고 잇는 분류군은 그 새롭고 개선된 질서 짓기의 규칙에 따르면 한마디로 존재하지 않는 분류군인 것이다. 이리하여 새롭게 등장한 그 혁명적인 분기학자들의 손에 의해 어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어류의 죽음은 더욱 엄격히 진화에 근거한 명명과 분류의 새로운 방식이 가져온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26~29쪽.)

 

  나는 늘 분류학이라는 과학의 역사가 일련의 가지런하고 순차적인 통찰과 실험실의 야근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겼고, 또한 그런 것들이 모든 타당한 과학의 진보를 이끄는 것이라 배웠다. 그런데 분류학은 철저한 이성에서 태어나 명쾌한 실험을 통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일반적인 과학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움벨트에서 받은 충돌으로 태고부터 해왔던 일(생명의 질서 짓기와 이름 짓기)에서 파생된 과학이었다. 하지만 움벨트는 금세 분류학 분야의 크고도 끈질긴 약점이 되었다. 생명에 대한 움벨트의 시각은 과학의 토대에 되기에는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38쪽.)

 

  (...) 린나이우스가 한 일은 레오뮈르의 책을 독파한 귀족 부인이 갈망했던 것을,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갈구했던 일을,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인지한 바로 그대로의 자연 질서를 깔끔하게 해설해준 것이다. 그것도 사람에게 알려진 생명의 세계가 아무도 분류할 엄두조차 못 낼 정도로 확장되고 있던 그 시기에 그 일을 해냈다. (...)
  그러니까 『자연의 체계』는 단순히 체계화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감각된 세계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단순히 우리가 아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 것이라고 느끼는 세계였다. 우리는 그 세계에 대한 지분을 갖고 있다. 우리가 그 세계를 소유하고 있다. 린나이우스가 기록한 것은 바로 인간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이 비전이었다. 그의 천재성은 디테일에서 드러났지만(우리 중에 그 수수께끼 같은 월계수속을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의 인간다움은 나머지 모든 것에서, 그러니까 우리 모두 쉽게 볼 수 있는 물고기, 소나무, 호랑이에서 드러났다. (...) 그는 우리의 세계를 포착하고 그 타당성을 확인해 주었다. (84~85쪽.)

 

  (...)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다. 다윈이 판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사람이 지닌 감각의 힘, 고정된 자연 질서에 대한 그 강력하고 주관적인 비전은 더 이상 지배력을 휘두르지 못한다. 크기에 따른 배열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부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화의 계통수에 근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분류의 정확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최종 결정자는 진화적 관계였다. 진화적으로 관계가 매우 먼 종들은 올바른 생명의 분류에서 서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진화의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야 서로 분기한 종들은 같은 속에 속하는 두 종으로 서로 나란히 두어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윈은 과학이 이제 채택해야만 하는 것(진화적 관점으로 생명을 분류하는 것)과 과학이 이제껏 언제나 의존해왔던 것(자연 질서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얼개를 짜놓았다. 또한 진화적 생명 분류와 일반 사람들이 자연의 질서로 인지하는 것 사이의 가장 극단적인 충돌을 초래하고, 물고기를 없애버릴 그 과학자들, 바로 분기학자들이 등장할 토대도 마련해두었다. 그리고 본인은 알 수 없었겠지만, 진화가 승리하고 물고기가 죽을 결말을 미리 정해둔 것 역시 다윈이었다.
  (...)
  생명에 대한 과학적 시각과 나머지 우리 모두의 시각이 일치했던 순간(린나이우스가 축하하고 기록했던 그 순간)은 이제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 많은 조개껍질 수집가와 딱정벌레 사냥꾼, 그 많은 올빼미 관찰자와 식물 덕후에게 크나큰 기쁨을 안겨주었던 생명의 시각, 움벨트의 시각, 인간과 생명 세계 사이의 가장 깊고 심오한 연결이 이제 나가는 문 쪽을 향해 떠밀리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과학이 칼자루를 넘겨받았고, 과학은 완전히 새로운 어딘가로, 어떤 새로운 비전으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생명을 바라보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철저하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 방식을 향해 가는 자기만의 여정에 올랐다. (118~120쪽.)

 

  (...) 1942년에 마이어는 종에 대한 정의를 발표했다. 이 정의는 어떤 두 개체군이 서로 이종교배가 불가능할 때, 다시 말해서 그 개체군들에 속한 개체들이 서로 간에 짝짓기와 번식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없을 때, 이 두 개체군은 유전자를 교환할 수 없다느 개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두 개체군은 서로 별개의 진화 궤도를 따라가며, 따라서 별개의 종들이 된 것이다. 만약 당신이 생물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고 그때 종의 정의를 암기해야 했다면, 그때 당신이 배운 것은 마이어의 생물학적 종 개념이었을 것이다. "종은 실제로 또는 잠재적으로 서로 짝짓기하는 자연적 개체군의 집단이며, 다른 그러한 집단과는 번식으로 격리되어 있다."
  마이어의 정의는 직관적으로 옳다고 느껴진다. (...)
  그러나 질서를 부여하고 혼동을 제거할 의도로 했던 이 일은 또 다시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마이어가 시동을 건 이 일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종에 대한 상충하는 수많은 정의와 그에 대한 끝없는 논쟁으로 이어졌으며, 아마 진화의 난제들 가운데 가장 업신여김 당하는 문제일 이 문제는 결국 '종 문제'로 불리게(그리고 미움받게) 되었다.
  마이어의 정의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여러 문제가 제기되었다. 하나는 실질적인 문제였다. (...) 만약 페트리접시에서 이 벌레들이 짝짓기하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야생에서도 짝짓기를 할지 안 할지는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며 이 딱정벌레들은 정말로 같은 종일까? 그리고 또 박물관의 분류학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죽어 있고, 핀으로 고정되어 있거나 납작하게 눌린 표본들의 짝짓기 가능성을 시험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훨씬 더 큰 또 다른 문제도 명백히 대두됐다. 요컨대 짯짓기로 번식하지 않는 생물도 많다. 박테리아나 진딧물, 일부 도마뱀, 사시나무, 나비란 등의 유기체는 그냥 자신과 똑같은 복제물(원한다면 클론이라고 표현해도 된다)을 만들어내고, 복제된 작은 암컷 도마뱀 또는 작은 식물 개체가 모체 식물에서 떨어져나와 독립적인 삶을 시작한다. (...) (158~160쪽.)

 

  그것은 실로 엄청나게 멋진 일이었다. 단지 아주 많은 양의 숫자 계산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비약적 발전이 있었다. 200년 동안 직관의 안내를 따라왔던 분류학이 이제 정량적 과학이 된 것이다. 분류학은 이제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판단과 지시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칼과 미치너는 설명의 책임을 스스로 떠안았고, 관료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자신들의 절차를 '투명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자신들이 형질들을 정확히 어떻게 선별했으며, 그 형질들을 정확히 어떻게 부호화했고, 데이터를 정확히 어떻게 분석하여 결과를 얻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 거기에 신비란 전혀 없었고, 격렬한 논쟁도 필요 없었다. 이제 수수께끼 같은 종들도 원하기만 한다면 순수하게 수치로써 정의할 수 있게 됐다. (...) 이런 식으로 계속되면서 직관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것은 진보의 길이었고, 완전히 새로운 방법이었으며, 마침내 주관성의 늪에서 탈출할 방법이었다.
  소칼과 미치너의 연구는 방법론의 도약 그 이상이었다. 대담한 움직임이었고, 너무 예상치 못한 것이어서 방심하고 있던 전통적 분류학자들 혹은 우리의 영웅인 진화분류학자들의 뒷통수를 쳤다. 아니, 그보다 더 나빴다. 분류학의 팬티를 끌어내려 그들의 치부를 노출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숫자를 기반으로 한 이 생명의 나무가 일단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공개되자 과학으로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획으로서 진화분류학의 작동 방식을 옹호하기가 무척 어려워졌고 결국에는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움벨트가 은신할 곳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주관성, 그리고 생명의 질서에 대한 감각과 직관, 그러니까 움벨트가 준 모든 선물이 과학으로서 분류학을 행하는 일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되었고 심지어 명백히 틀린 일이라고 여겨졌다. 태고부터 항상 인류를 생명의 세계에 굳건히 뿌리내리게 해주었던 우리 움벨트에 관한 모든 것이 공개적인 과학적 검증의, 심지어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 (284~285쪽.)

 

  (...) 200년 전 분류의 거장 린나이우스의 손에서 분류의 과학이 탄생한 이래 소칼과 스니스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내내 분류학은 눈에 분명히 보이는 것에 의지해왔다. 생명의 분류는 생물들의 외양, 그러니까 새의 부리 길이부터 생쥐의 털 색과 꽃잎의 수, 열매의 유형에 이르기까지 겉으로 보이는 모든 측면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기반으로 행해졌다. 분류학은 처음부터 항상 외양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분자생물학자들의 성공으로 과학자들은 사실상 분류학자들에게 생물의 외양은 무시해도 되며 오히려 무시하는 게 좋겠다고, 이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단백질과 DNA뿐이라고 제안하고 있었다. (...)
  아아, 분류학자들은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그렇지만 나머지 과학자 공동체는 분자, 특히 DNA의 사용에 대한 믿음을 갖기 시작했고, 거기에는 충분히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윈 이후 분류학자들이 내내 그랬듯이) 진정한 진화적 관계, 모든 생명의 계보를 찾아내고자 한다면 유전물질 자체, 그러니까 모든 생물의 모든 새 세대에게, 조상에게서 후손에게로 전해 내려온 바로 그 분자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 DNA에 일어난 변이, 그러니까 염기서열에 일어난 변화는 조상에게서 후손에게로 전해지며 오랜 세월 서서히 축적되므로, 한 유기체의 DNA에서 나타나는 유사성과 차이점은 지금까지 알려진 그 어떤 것보다 실제로 가깝거나 먼 진화적 관계에 잘 부합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움벨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주 오래전 다윈이 분류학자들에게 추구하라고 촉구했던 생명의 진화적 질서를 판단할 때 분류학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막강한 도구였다.
  하지만 아무리 논리적이라도 분류학자들이 참고 받아넘기기는 어려운 얘기였다. 자기 움벨트의 작동에서 작은 부분 하나 포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이처럼 커다란 무엇(자연 질서를 판단하는 데 인간의 감각이 가장 우선한다는 생각)을 단념한다는 것은 또 어떻겠는가. 이제 그들은 소중한 주관성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들이 실제로 보고 감각하고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한 의존까지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할 테고, 시험관에게 바통을 넘겨줘야 할 터였다. (312~313쪽.)

 

  원래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된다. 생명에 대한 더 깊은 과학적 지식은 생명 세계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과학과 상식을 조화시켜야 한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우리가 생명의 진화적 분류를 더 잘 이해하게 되면 "과학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서로 일치하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
  하지만 과학의 진보는 언어의 일치나 상호 이해의 증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진정한 과학적 분류는 생명 세계의 자연적 질서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시각과 정반대 입장에 선다. 그 분류는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사실 틀렸다고 말한다. 과학은 단지 자신의 정확함을 주장하는 것만으로 똑바로 우리 앞을 막아섰고, 언제든 우리가 샛길로 빠지려 할 때마다 끼어든다. 우리는 모두 과학의 옳음을 지나치게 확신한 나머지 이런 일까지 허용했다.
  이제 너무 많은 사람이 생명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잃었다. 그 결과 대학 학장부터 정부 행정관, 연방 자금 지원처의 장들까지 생명 분류 연구에 시간이나 돈을 낭비하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보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박물관과 대학은 생물의 분류와 명명에 집중하는 유일한 과학자들인 분류학자들의 직위를 없애고 있다. 한편 전 세계 대학들은 동물학 및 식물학 수집물들을 내다 버리고 있다. 실제 생물들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로 인한 끔찍한 결과는 분류학자들, 생명을 분류하고 명명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종족이 그 수가 줄고 사멸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움벨트를 내던져버리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고 있다. (375~376쪽.)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