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야구의 나라 (이종성, 틈새책방, 2024.) 본문

잡冊나부랭이

야구의 나라 (이종성, 틈새책방, 2024.)

Dog君 2024. 7. 22. 07:59

 

  사람 일이라는게 말이죠,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라서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납니다. '역사'란 아마도 그런 일들의 총집합일지도 모릅니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했던 오나라와 월나라 이야기나 열두 척으로 수백 척의 일본군을 이긴 명량해전 이야기, 국민당군에게 처절하게 개박살나고 공중폭격까지 맞아가면서 1만km 가까이 거지꼴로 쫓겨다니던 공산당군이 불과 10여년만에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했노라는 이야기 등 역사 속에는 세기의 명승부가 꽤 여럿입니다. 그러니까요, 인생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명승부는 사실 우리 곁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월요일 빼고 매일 같이 치러지는 프로야구 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야구만큼 경기 간격이 좁은 프로 스포츠도 없을 겁니다. 그런 야구경기에서는 8:0 정도로 앞서가던 팀이 막판에 승부를 뒤집는 일도 부지기수고,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몇몇 작가(투수)의 이름...) 끝내주는 팀플레이도 잊을만하면 등장합니다. 우리가 야구를 사랑하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가 아마 그것이겠죠. 매일 저녁의 야구경기에서 역전의 짜릿함도 느끼고 팀플레이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피곤하고 힘든 일상을 잠시 잊을 수 있으니까요.

 

  『야구의 나라』는 그런 야구 이야기에 역사를 덧붙입니다. 책에 빼곡하게 담긴 야구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이 이야기들이 단지 야구에 관한 가십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즐기는 야구가 동아시아의 역사와도 연결되는 것임을 알게 되죠. 서구의 낯선 스포츠인 야구가 한반도에 전파되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은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역사와 함께 진행된 것이었고, 야구로 대표되는 엘리트 스포츠가 육성된 것은 남북 대결과 한일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설명할 수 있으며, 은행을 중심으로 한 실업팀의 창단과 운영은 1960년대 관치금융의 직접적인 산물입니다. 그뿐인가요, 재일교포가 한국 야구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자이니치의 정체성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80년대의 프로리그 창단은 당대의 정치권력과 관련있고, 프로구단의 운영은 1980년대에 폭발한 소비문화와 연결해서 이해해야 하지요.

 

  어떤 사람은 야구 하나 보는 데 동아시아의 역사까지 알아야 되냐고 툴툴거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라고 하니 괜히 거창하고 무겁게 느껴지는데, 뭐 그런 것까지 갖다 붙이나 싶은 마음도 드니까요. 하지만 엠팍이니 펨코니 하는 커뮤니티들에서 실시간으로 야구 이야기들이 범람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야구를 즐기는 것이 단지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것에서 그치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우리는 야구를 즐기면서 야구를 둘러싼 무수한 이야기들도 함께 즐기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이 책을 통해 한국 야구의 근현대사를 알게 되면 우리의 일상에 깊이 파고든 야구에 또 하나의 재미가 더해질 겁니다. 스포츠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 도파민 터지는 짜릿함 말고도 더 많다는 것을, 이 책 덕분에 새삼 깨닫습니다.

 

  일제 강점기 공립고보는 조선 엘리트 학생에게 야구 문화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공립고보의 일본인 교장들은 야구부 창설과 고시엔 대회 예선전 참가에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야구를 통해 일제가 추진했던 조선 엘리트의 일본 동화 정책을 주도했다.
  물론 공립고보에 다녔던 조선인들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 1937년 기준으로 보면, 조선인 인구는 약 2,200만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공립고보와 사립고보에 다녔던 조선인을 모두 합쳐도 1만 5,454명에 불과했다. 이런 측면에서 공립고보를 통한 조선 사회의 야구 대중화는 제한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수재들이 다녔던 공립고보의 야구 전통은 한국 사회에서 야구가 명문교의 스포츠로 자리 잡는 데 매우 큰 영향을 줬다. 해방 이후 야구가 이들 학교의 교기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런 지역 명문교들은 고교 야구 전성시대를 이끄는 중심축이 됐다. 1960~1970년대 영호남을 대표하는 야구 명문교로 부상했던 경북고나 광주일고가 대표적이었다. 1977년 충청도 지역 학교로는 최초로 전국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훗날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되는 박찬호를 배출한 공주고도 일제 강점기 공주고보 시절에 야구부가 창설됐다. (38~39쪽.)

 

  식민지 조선의 야구는 이처럼 일본에 의존적이었다. 일제 강점기 야구를 후원하는 경제 권력의 주체는 거의 모두 일본인이었고, 조선의 야구 엘리트들이 선수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일본 팀에서 뛰어야 했다. 조선인이 만든 대회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성인 팀이 출전하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물론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조선인 선수는 은행이나 공기업에 취직해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팀'에서 야구를 했던 조선 야구 선수들에 대한 조선 민중의 시선은 차가웠다. 경제적인 측면만 고려하면 이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을지는 몰라도, 민족의 스포츠 영웅으로 치켜세울 만한 대상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조선 야구인들은 해방 이후 다른 종목의 선수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한국 야구 재건을 위해 전면에 나섰다. 야구가 '일본 스포츠'라는 꼬리표를 떼는 미군정 시기부터 이들의 활약이 눈부시게 전개됐던 이유다. 일본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진 조선의 야구 엘리트들에게 해방은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야구 전통은 해방 후에도 지속됐다. 이미 일제 강점기 때부터 야구부를 운영했던 인문계 명문교와 상업학교는 해방 공간의 학원 야구를 이끌었다. 일제 강점기 때 명문교를 졸업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해방 이후 야구 대회 개최와 후원에 관심을 보였다. 야구는 한국의 엘리트가 보살펴 주는 스포츠였고, 이들이 믿고 기댈 언덕은 미군정이었다. (88~89쪽.)

 

  하필이면 왜 1962년에 은행 야구 팀이 생겨난 것일까? 1962년에는 국민체육진흥법이 공푸됐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만든 이 법안에는 직장 체육의 진흥이 포함돼 있었다. 이는 직장 내에서 스포츠 팀 창단을 추진하라는 의미였따. 박정희 정권의 국민체육진흥법 공포는 1964년 도쿄 올림픽과 관련이 깊었다. 북한의 올림픽 참가가 유력한 상황이라 도쿄 올림픽에서 첫 남북 대결이 펼쳐질 가능성이 짙었기 때문이다. (...)
  문제는 당시 한국에 스포츠 팀을 창단할 만한 여력이 있는 민간 기업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스포츠 팀 창설 책무는 주로 공기업이 떠안았다. 그중 하나가 은행이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은행은 모두 정부에 귀속됐다. 시중 은행은 모두 정부가 관리했고, 이른바 관치 금융의 시대가 열렸다. (...) 정권의 입맛에 맞게 은행이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던 시기였다.
  이미 몇몇 은행은 국민체육진흥법이 공포되기 이전부터 여자 농구팀을 운영하며 은행 홍보 효과와 영업 실적 상승 효과를 경험했다. (...) 은행원들 사이에서는 "우리 팀의 성적과 인기도에 따라 예금고가 오르락내리락 한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흥미롭게도 은행들은 이후 야구 팀을 창단했다. (...) 남북 대결과 무관한 야구 팀을 왜 먼저 창단해야 했을까? 여기에는 당시 시중 은행에 야구를 교기로 하는 상업고 출신 사원들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은행에는 상업고 출신 직원들이 많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은행이 상고 출신 신입 사원을 뽑지 않거나 채용 규모를 대폭 줄일 때까지 상고 출신 행원들의 전성시대는 지속됐다. (144~145쪽.)

 

  공교롭게도 경기고와 서울고가 명감독을 모교 야구부 감독으로 영입했던 해는 추첨을 통해 뽑은 신입생이 처음으로 대학에 입학했던 1977년이었다. 이해는 경기고와 서울고가 명문대 입학자 배출이라는 측면에서 과거에 비해 그 위세가 약해지기 시작했던 원년이었다. 두 학교는 추첨으로 입학한 학생들이 모교에 대한 긍지와 애착을 갖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야구부에 대한 과감한 지원을 그 해결책 중 하나로 생각했다.
  고교 평준화로 전통 명문교의 위세가 다소 주춤했던 상황에서 신흥 명문교로 급부상하는 학교도 있었다. 그 가운데 야구를 통해 전국적으로 명성을 높였던 대표적인 고등학교는 신일고와 충암고였다. (...) (162쪽.)

 

  (...) 몇몇 중소 도시는 야구로 이름을 날렸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전북 군산과 경남 마산이다. 공교롭게도 두 도시의 야구는 상업고가 이끌었다. 야구 팬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 봤던 군산상고(현 군산 상일고)와 마산상고(현 마산 용마고)가 그 주인공이다. 중소 도시에 위치하고 있던 군산상고와 마산상고는 어떻게 해야 야구 명문교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
  이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열쇠는 상업고와 은행의 여구 커넥션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1960년대 초반 야구 팀을 만든 시중 은행에는 각 지역 상고를 졸업한 은행원들이 많았다. (...) 한국에서 4년제 일반 대학의 전체 학생 수는 1975년에야 비로소 20만 명을 넘는 수준이었다. 이 시기 고등학교 재학생 수가 100만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다수 고등학생들은 대학 진학보다는 졸업 후 취업을 선택해야 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다수의 학생들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선택했고, 그 가운데 상업고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81~182쪽.)

 

  (...) 롯데는 한국에서 야구 팀 창단을 선언했다. 롯데가 한국에서 야구 팀을 창단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일본 프로 야구 팀을 운영하며 얻은 막대한 광고 효과를 한국에서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소비재 산업인 제과업은 특히 광고가 중요했다. 한국 광고 시장에서 제과와 식품업계는 가장 '큰손'이었다. 1974년 광고 매출 현황을 보면, 식품과 제과업계가 다른 분야를 압도했다. 이 가운데 1위는 해태였다. 해태는 당시 10억 원의 광고비를 지출한 반면, 롯데는 4억 원가량의 광고비를 썼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롯데는 1970년대 중반에 한국에서의 사업 다각화 전략을 추진했고, 재일 교포가 경영하는 롯데가 한국인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얻으려면 한국에서 인기가 높은 야구가 필요했다. 실제로 롯데는 이때 종합 무역 상사인 롯데상사를 출범시켰으며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뒀던 아이스크림 사업의 한국 진출도 진행했다. (242쪽.)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한일전 승리는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의 한일전 승리와 역사적 측면에서 묘하게 닮아 있었다. 1963년과 1982년에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이 바랐던 것은 일본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이었다. 정부는 이때 '한국이 경제적 이유 때문에 일본과 굴욕적인 외교를 하고 있다'는 대중들의 원성을 두려워했다.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통쾌한 승리로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워 준 것은 야구였다. 야구는 그런 면에서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와 1983년 한일 정상회담으로 가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었다. (258~259쪽.)

 

  1982년 프로 야구 팀을 창단한 기업들은 선수 스카우트와 팀 운영 비용으로 상당한 돈을 썼다. 삼성 라이온즈의 1983년 예산은 24억 원이었고, 1984년 예산은 이보다 2억 원이 오른 26억 원으로 재벌 그룹이 운영하는 스포츠 팀 1년 예산으로는 국내에서 제일 많았다. 해태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1984년 예산도 각각 25억 원과 10억 원이었다. 누가 봐도 이는 재벌 기업의 프로 야구 팀에 대한 과잉 투자였다.
  프로 야구 팀은 예나 지금이나 수익 확보가 힘들다. 이 때문에 적자 운영을 감수하면서도 재벌들이 프로 야구 팀에 돈을 쏟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이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추측은 재벌이 야구 팀 운영을 통해 얻는 홍보 효과의 가성비가 일반 광고보다 좋았다는 분석이다. 1984년 TV 광고 가격이 가장 비싼 시간대는 저녁 8시 20분부터 밤 10시 사이였다. 이 시간대에 30초짜리 광고 1회 비용은 380만 원이었다. 이 광고를 100번 하게 되면 광고 비용은 3억 8,000만 원이고 총 방영 시간은 50분이었다. 2시간 30분가량 소요되는 프로 야구 야간 경기가 이 시간대에 방송된다고 가정하면, 광고비가 11억 4,000만 원이었다. 이를 통해 보면 프로 야구 팀을 통한 재벌 기업의 광고는 TV 광고보다 가성비가 좋았다. (272~273쪽.)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