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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리뷰오브북스 14호 (알렙, 2024.) 본문

잡冊나부랭이

서울리뷰오브북스 14호 (알렙, 2024.)

Dog君 2024. 7. 29. 20:09

 

  자기 생각과 비슷한 책을 읽는 것은 일반적으로 딱히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원래 했던 생각을 그대로 반복, 아니 더 강화시키기만 하는 독서는 아집과 편견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마련이거든요. (유튜브 알고리즘처럼 ㅋ) 그런 점에서 보면 서리북 14호는, 목차만 봐서는 그렇게 막 끌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기획인 '믿음 주술, 애니미즘'이 딱히 제 취향도 아니었구요.

 

  하지만 이번에도 그런 제 생각은 그저 선입견이었습니다. '믿음, 주술, 애니미즘'이라는 주제는 단지 무속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신념 체계 전반까지 아우르는 것이었고, 학술 차원에서는 각종 유사 학문까지 다뤘습니다. 특히 유사 과학에 대한 권석준의 비평(「패턴의 자동 완성이 주는 편안함과 쏠림 -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은 유사역사학에 골머리를 앓는 역사학계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사역사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관계에 대한 검증에 더하여 그러한 생각을 가능케 하는 배경에 대한 분석도 필요할텐데, 비과학적 사고의 기저에 "패턴의 자동 완성"이라는 사고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항으로 회의주의라는 지성의 불꽃을 지키자고 말하는 권석준의 비평은 밑줄 쳐둘 가치가 충분합니다. 한국사학계에 철학적 일반화가 절실하다고 믿는 저로서는 이런 글을 통해 생각의 조각을 더 많이 얻을 뿐 아니라 또다른 동지를 만난 것 같아 너무 반갑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것을 더 명징하게 해줬다는 점에서는 정우현의 비평에 눈길이 갑니다. 사회진화론은 저도 강의시간에 꽤 비중있게 다루는 편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해도 된다는 말은, 근대의 제국주의 침략을 비판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작금의 우리 삶을 더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서도 절실하니까요. 그런 저에게도 몇몇 부분에서 논리적 구멍이 있었는데요, 그런 구멍들을 정우현의 글을 통해 꽤 많이 메웠습니다. 뭐랄까, 해상도가 도수 잘 맞는 안경을 새로 맞춘 느낌이랄까요. (진화심리학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호 잘 차려진 잔칫상 같은 서리북, 이번에도 배불리 잘 먹었습니다.

 

  패턴의 엉뚱한 자동 완성은 간혹 비과학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겨우 네 개의 유형으로 성격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어불성설임에도, 혈액형 성격론은 단순한 구분이 주는 편의성, 즉 패턴 자동 완성의 편리함으로 인해 꽤 오래 한국 사회에 만연했다. 지금은 그 자리를 MBTI 검사가 차지하고 있는데, 이 역시 확장된 혈액형 성격론에 불과하다. 그러나 학자들마저도 이러한 분류법에 종종 빠진다. (...) 이러한 패턴 완성 본능은 정보가 불확실한 영역에서는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선입견과 편견, 나아가 맹신으로의 쏠림도 자아낸다. 불확실한 정보를 메꾸기 위해 연구를 하거나 객관적인 자료를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기반 삼아 자신이 원하는 패턴에 따라 빈 부분을 메꾼다. 이것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집단에서는 더욱 강력해진다. 여러 명이 같은 패턴 완성 경향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다수의 효과에 의해 더욱 단단해진다. (...)
  저자는 기본적으로 과학적 회의주의에 기반하여, 가능한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런데 이는 사실 제도권에서 교육받은 과학자들에게는 습관 같은 것이다. 나도 과학자 커리어에 진입할 때 은사들로부터 배운 것 중 하나가 모든 과학 논문을 처음부터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지도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조차도 의심부터 하라고 배운다. 이는 동료들의 인격을 의심하라는 뜻이 아니다. 인격은 존중하지만, 그의 연구 성과가 100퍼센트 옳다고 함부로 단정 짓지 말고, 그것이 제3자에 의해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연구 방법론의 논리적 정합성이 하나하나 점검된 후에 판단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과학자와 과학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과학자는 과학이라는 인간의 문명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일 뿐이지만, 그들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탑은 빈 공간이 커지는 순간 금방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의 진보 속도는 때로는 빠른 것 같으면서도 사실 느리다고 볼 수 있다.
  저자가 빈번히 지적한 대로, 유사 과학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바로 이러한 회의주의를 배격한다는 것이다. 유사 과학 신봉자들은 의심이 곧 사람에 대한 인격적 공격이라고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던지는 질문은 학문에 대한 경시라고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제도권에서 훈련받은 과학자들은 동료일지라도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하면서 동료의 논문에 혹독한 심사평을 날리고, 동료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는 과학자들끼리 서로 싫어해서가 아니라, 과학의 진보가 그만큼 엄중함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사 과학 종사자들은 자신들의 과학이 부당하게 제도권의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유사 과학 신봉자들은 전형적인 사기꾼과는 거리가 멀다. 대부분 진지하게 자신의 학설을 설파하려 하며, 소통에도 애쓴다. 문제는 그러한 소통이 제대로 된 과학적 토론의 장으로 올라오면 합리적인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유사 과학이 사실 과학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 즉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상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권석준, 「패턴의 자동 완성이 주는 편안함과 쏠림 -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29~32쪽.)

 

  사람의 지능을 구성하는 패턴의 자동 완성 기능이 남아 있는 한,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이상한 것을 믿을 것이다. (...) 현재진행형인 과학의 허점을 노려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노리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고, 사이비 역사학은 이른바 왜곡된 국뽕의 수요를 계속 채워 줄 것이다. (...) 여전히 사람들은 기초 과학의 분투에서 얻은 작은 연구 성과보다 그것을 침소봉대하여 사업에 가져다 쓰는 광고 문구에 더 현혹될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가 존속되는 한 앞으로도 과학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연의 범위는 더 넓어질 것이며, 그 안에는 우리 자신이 포함될 것이므로, 이상한 것을 믿는 것의 여파가 사회에 주는 영향력은 점차 축소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따른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상한 것보다 과학적 사고방식과 회의주의를 더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의 불꽃이 꺼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권석준, 「패턴의 자동 완성이 주는 편안함과 쏠림 -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39~40쪽.)

 

  자연주의의 오류란 '사실(존재)'로부터 '당위(규범)'를 끌어내려는 오류를 말한다. 우리 문화는 자연적 질서가 곧 자연스러운 질서, 올바른 질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자연의 법칙 그 자체를 윤리적으로도 옳다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기 일쑤다. 이는 20세기 초 도덕철학자 조지 에드워드 무어(George Edward Moore)가 『윤리학 원리』에서 소개한 개념이다. 무어는 이 개념을 본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 철학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도입했지만, 당시 진화론에서 도덕적 판단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비판하는 데도 적극 사용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사회진화론이란 본래 다윈이 자연의 영역으로 수출했던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의 사회적 교리를 다시 사회의 영역으로 역수입한 것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과학사학자 로레인 대스턴(Lorraine Daston)은 이를 일종의 "은밀한 밀수 작전"이라 칭했고, 이러한 가치의 밀수가 종종 정치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자연주의의 오류는 단순한 논리적 오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사회적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도 이어질 위험이 있다. 자연을 사회와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모든 현대적 사고의 출발점이다. (정우현, 「도덕은 왜 유전자와 싸우는가 - 『도덕적 동물』」, 211~213쪽.)

 

  최근의 게놈 분석 연구에 따르면 생물학적 진화는 그간 생각해 왔던 것 이상으로 매우 급격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렇지만 인간의 역사와 문화는 생물학적 진화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변화함으로써 기어코 EPM(Evolved Psychological Mechanism, 진화된 심리적 기제―옮겨적은이)을 낡아 빠진 골동품으로 만들고야 만다. 고대에 형성된 EPM을 가지고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심리 기제에 쉽게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
  실제로 진화는 진화심리학 교과서에서 다뤄지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며, 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받아 예측 불허의 방향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진화심리학이 더 유념해야 할 중요한 점 한 가지는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결정하는 데 현대의 문화와 환경이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진화심리학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만의 특별한 정신적 능력이 어디서 기원하는지 설명하는 데는 미흡한 점이 많다. (...) 따라서 EPM이란 기껏해야 어떤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틀을 제공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 (정우현, 「도덕은 왜 유전자와 싸우는가 - 『도덕적 동물』」, 219~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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