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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의 탄생 (오카다 데쓰, 뿌리와이파리, 200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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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의 탄생 (오카다 데쓰, 뿌리와이파리, 2006.)

Dog君 2024. 5. 24. 08:44

 

  부제는 '튀김옷을 입은 일본근대사'라고 되어 있지만, 육식肉食으로 보는 일본근대사라고 하는게 좀 더 정확하겠습니다. 근대 이전의 일본에서는 육식이 터부시되었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인처럼 큰 체형을 갖기 위해 육식이 장려되었고 이 과정에서 돈가스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상식에 가깝습니다. (이 책에는 안 나오는, 비슷하면서도 약간 덜 알려진 이야기도 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도 젊은 시절에 서구에 대한 열망으로 억지로 쇠고기를 먹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돈가스에는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의 역사와 망딸리떼가 오롯이 녹아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책에서 든 스키야키나 단팥빵도 마찬가지구요.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음식이 어디 하나둘이겠습니까. 당장 부대찌개부터 떠오르구요, 서양의 샌드위치가 중식과 만나 태어난 멘보샤, 근대 동아시아 교류의 직접적인 결과인 짬뽕(굽시니스트 참고!)과 짜장면도 빼놓으면 섭섭합니다. 요즘은 음식의 유래에 대한 이런저런 '썰'들이 식당 벽 한구석에 붙어 있는 걸 많이 보는데요, 이런 것들까지 다 그러모으면 어지간한 역사책 한 권은 너끈히 나올 거 같습니다. ㅎㅎㅎ 우리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음식에 얽힌 이야기도 함께 먹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가 음식을 먹는다는 것도 곧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일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음식을 먹을 때는 그 음식에 얽힌 각자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당장 저만 해도 이 책에서 단팥빵 이야기를 읽을 때, 일본근대사보다는 제 개인적인 기억이 더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잠깐 고영의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를 인용해볼까요.

 

  빵은 1960년대 후반 시작한 산업화와 드디어 맞아떨어졌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에 따르면 공장에서 나온 빵은 건설현장, 공장, 농촌에서 참으로 요긴했다. 손 씻을 것도 없이 봉지만 뜯으면 참 또는 끼니가 해결됐다. 수분이 덜한 만주 계통은 동네 구판장에 방치해도 한참을 팔 수 있었다. 일에 쫓기던 도시 서민과 농어민 부모는 공장 빵 한 봉지를 자녀에게 쥐어주고는 일터로 달려갔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풍경이다. (고영,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포도밭, 58쪽.)

 

  저는 단팥빵을 떠올릴 때면, 기름때에 찌들어 시커멓게 된, 고된 노동으로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힌, 제 아버지의 손이 자동으로 함께 떠오릅니다. 제 한쪽 손에는 절반쯤 뜯은 빵봉지를, 나머지 한 손에는 손때라도 묻을까봐 조심스레 뜯은 우유를 쥐어주며 "두 손에 단디 잡고 무야 된다이. 안 체하그로 꼭 우유하고 같이 묵고."하고 당부하던 그 손이요. 아마 당신이 드실 때는 똑같은 그 손으로 빵을 허겁지겁 입 안에 밀어넣기 바빴을 겁니다. 고영의 이 책을 버스에서 읽다가 이 대목에서 갑자기 눈물이 왈칵 터지는 것을 꾹꾹 눌러 참느라 혼났습니다. ㅎㅎㅎ

 

  여러분들은 오늘 무엇을 드시면서, 무슨 기억을 떠올리고 계신가요. 그리고 무슨 추억을 만들고 계신가요.

 

  (...) 정부가 1872년에 육식을 해금하고 서양요리를 예찬하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이자 서양음식은 빠른 속도로 엘리트층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민중에게는 여전히 소원한 존재였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의 수많은 고민과 궁리의 결과로 메이지 시대로부터 60년이 지난 쇼와 시대 초기에 돈가스가 탄생하면서 육식은 서민생활 깊숙이 스며들었다. 밀가루, 계란 빵가루로 입힌 세 겹의 튀김옷이 뜨거운 기름과 고기를 격리시켜 육즙이 유출되는 것을 막고 육질을 부드럽게 유지한다. 그리고 빵가루에 적당히 스며든 기름이 풍미를 더해 사각사각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양식의 왕자王者 돈가스의 탄생, 그리고 돈가스가 그 발상지 우에노上野와 아사쿠사淺草에서 전국으로 급속하게 퍼진 일이야말로 일본 서민이 서양요리를 소화하고 흡수했음을 나타내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17쪽.)

 

  육식이 해금된 지 한 달쯤 뒤인 1872년 2월 18일, 흰 천으로 온몸을 휘감은 자객 열 명이 천황의 거처에 난입해 네 명이 사살되고 중상 한 명에 다섯 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진술서에는, 이들은 "현재 이방인이 들어온 이후 일본인이 오로지 육식을 하는 고로 땅이 모두 더러워지고 신이 있을 곳이 없음에 즈음하여 (중략) 이방인을 몰아내고 신불神佛과 제후의 영토를 예전과 같이 지켜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만백성 위에 군림해 곡물의 이삭으로 제를 올리고 고대 이래로 육식을 금지한 역대의 천황을 내팽개치고 외세에 눌려 육고기를 해금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정진결재(精進潔齋: 육식을 끊고 근행을 하여 몸을 깨끗이 하는 것―옮긴이)를 신조로 한 산악山岳신앙을 지닌 그들은 육식 재개는 용서할 수 없는 행위이자 사회혼란의 원흉이라며 구질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29쪽.)

 

  (...) 막부 말기에 쇠고기요리를 고안해 평판이 좋았던 식당이 있었다. 분큐文久 연간(1861~1864) 무렵의 일이다. 요코하마의 스미요시초住吉町 고초메五町目와 이리에마치入江町 근처의 둑에 그다지 손님이 들지 않는 '이세구마'라는 술집이 있었다. 어느날 술집 주인은 어디선가 요코하마의 외국인거류지에서 쇠고기를 먹는 것이 유행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쇠고기가 인기를 끌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최초의 쇠고기요릿집을 열면 어떨까 하고 아내와 의논했다. 하지만 '양이론자'였던 아내는 펄쩍 뛰며 오열했다. "그런 부정탈 장사를 하시려면 저와 연을 끊어주세요." 이렇게 부부싸움이 계속되자, 어떤 사람이 가게를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아내가 밥집을, 다른 한쪽은 남편이 쇠고기요릿집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대로 해보았더니, 쇠고기요릿집은 연일 초만원인데 밥집은 파리만 날렸다. 결국 아내도 칸막이를 떼어내고 부부는 화해했다. (...) (43~44쪽.)

 

  정부와 지식인들은 국민의 체력을 향상하고 음식문화의 근대화를 꾀하려면 쇠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연일 선전해댔다. 신정부는 1869년(메이지 2년)에 쓰키치築地 우마회사牛馬會社를 설립해 쇠고기를 판매하고 보급하는 데에 발벗고 나섰고, 궁중에서는 젖소를 몇 마리 기르고 천황이 우유를 마시면서 우유의 효용을 강조했다. 식육처리장은 인가가 없는 곳에 만들고, 병들고 부패한 소는 매매를 금지했다.
  육식을 장려한 것은 정부뿐만이 아니었다. 1872년에 당시의 쓰루가敦賀 현에서 쇠고기요릿집 개점을 앞두고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돌자, 현청은 "쇠고기는 건강 증진, 활력 보강, 자양강장에 좋은 음식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관습에 얽매여 쇠고기를 먹으면 심신이 부정탄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수상한 자가 있다. 이것은 문명개화의 길을 방해하는 행위고,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다"라고 이례적인 경고문을 내놓고 있다. 그리고 육식을 방해하는 자는 그 마을의 관리로서 자격이 없다고 규정하는 등 철저한 육식장려책을 취했다. 시가滋賀, 와카사若狹, 에치젠越前 등지는 특히 불교도가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64~65쪽.)

 

  육군 군의관 모리森는 1884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육군의 식량을 유럽 각국의 것과 비교해보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육군의 식량은 정백미가 기본이었는데, 군대 안에 각기병이 만연해 골치를 앓고 있었다. 해군 군의총감 다카기 가네히로高木兼寬는 빵, 우유, 채소 등을 많이 먹고 밥을 줄이는 식이요법을 시도했다. 그러자 각기병 증세가 조금 완화되었다. 각기병은 서양의 군대에는 없는 병이었다. 다카기는 군사식량을 서양식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모리 린타로는 『일본 병식론 대의』를 써서 이 제안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 책은 "동양 인민의 음식은 종류는 많을지언정 주식은 생선과 쌀이다. 서양 인민의 음식은 체레아리엔(보리의 일종)으로 만든 찐떡(빵)과 소, 양, 돼지 등이며 생선과 쌀은 아주 가끔 먹을 뿐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토지는 벼를 심는 데 좋다. (중략) 쌀처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찾기가 힘들다"고 한 데 이어, "혹자는 '쌀을 수출하고 다른 곡류 및 식육을 수입하면 어떨까' 라고 하는데, 물론 이치에 어긋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 인민의 생활은 오랫동안 외국인의 손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리는 『일본 병식론 대의』에서 일본인의 식사인 밥이 서양식보다 유리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① 일본인은 체격은 작지만 근육의 발육이나 체력은 서양인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② 서양식을 조리하는 기계(빵 굽는 가마 등)는 해군 군함에는 설치하기 쉬워도 육군의 전쟁터에는 설치하기가 어렵다. ③ 육군 병사의 수(5만 명)는 해군의 수(5,000명)보다 열 배나 많다. 따라서 짧은 시간에 병사들에게 서양식을 공급하기 어렵다. ④ 육군 신병은 밥에 익숙해 있으므로 갑자기 서양식으로 바꾸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서양식은 영양가도 다르고 소화의 메커니즘도 다르기 때문이다. ⑤ 밥, 생선, 두부, 된장의 조합으로 단백질과 지방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일본식이 영양학적으로 뒤질 이유는 전혀 없다 등을 들고 있다. (82~83쪽.)

 

  이 대목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 모리 린타로의 병식론과 육식을 장려하고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육식론을 비교해보자. 후쿠자와의 육식론에는 일본의 농업정책과 쌀농사 폐지론이 들어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① 일본은 농경지가 적으므로 농업을 국가의 기반으로 해서는 안 된다, ② 쌀이 부족하면 외국에서 수입하면 된다, ③ 밥을 먹는 것보다 고기를 먹는 것이 더 낫다 등이다.
  두 사상의 차이에는 서구화를 철저하게 추구하는 육식장려론과 전통적인 쌀밥에 집착하는 쌀밥 우위론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도회파'와 '농촌파'의 차이였다. 도회파는 서양의 근대화를 뒤쫓아 따라잡기 위해서는 모든 점에서 서양을 따라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논농사를 폐지해서라도 목축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촌파는 논농사가 목축보다 훨씬 뛰어다나고 강조했다. 이것은 극단적인 서구화와 일본 전통에 대한 재평가 사이의 대립이었다.
  이런 대립은 ① 서양인보다 빈약한 체격에 대한 열등감 ② 육식이 영양학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판단 ③ 먹고 나면 오랫동안 속이 든든한 쌀밥의 우위성 ④ 탄수화물의 과도한 섭취 ⑤ 단백질 섭취의 필요성 등등의 생각들이 혼란상태에 빠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이것들을 절충한 화혼양재 사상이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서민들은 본격적인 서양요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밥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일양절충의 '양식'을 만들어냈다. '돈가스'가 양식의 스타로 등장하고, 빵은 밥을 대체하는 대신 밥과 역할이 겹치지 않는 독특한 '단팥빵'의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먹을거리의 탄생은 일본 음식문화의 특이성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생각할수록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85~86쪽.)

 

  (...)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와 지식인은 육식을 장려하고 서양요리를 적극적으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육식은 위(정부, 지식인)로부터 아래(서민)로 퍼져간 것이다.
  그러나 서민들이 실제로 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은 일본식으로 변형시킨 쇠고기전골과 스키야키부터였다. 따라서 서양음식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서양식 재료인 쇠고기에 친숙해진 정도에 불과했다. 그 후 다양한 형태로 서양식 조리법을 습득하고 나서, 서민들은 밥에 어울리는 양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양식의 개발은 그야말로 아래서부터 위로 진행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육식이 해금되고 60년의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서민들의 손에 의해 '돈가스'가 탄생하게 되었다. (150쪽.)

 

  한편 다이쇼 시대에서 쇼와 시대에 걸쳐 아주 융성했던 카페도 서민들에게 양식이 보급되는 데 한몫을 했다. 메이지 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 카페가 속속 등장했다. 1911년에 도쿄 교바시 히요시초日吉町에 서양식의 '카페 프랭탕'이, 긴자 오와리초尾張町 한 구석에 '카페 라이온'이, 미나미나베초南鍋町에 '마페 파우리스타'가 문을 열었다. '카페'는 문자 그대로 커피를 파는 곳이다. 일본에서는 1888년, 도쿄 시타야下谷 구로몬초黑門町에 개점한 '가히사칸可否茶館'이 그 시초라고 한다.
  카페의 기능은 '커피를 파는' 가게'가족 동반으로 양식을 즐기는' 가게→'미인이 서비스하며 양주를 파는 가게'로 바뀌어 갔다. [그림 19]에서 보는 것처럼, 다이쇼 시대의 한 카페 광고전단 에는 '편안하게 맛있는 양식을 드실 수 있는 양식집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꼭 한번 오세요. 서양요리 카페 산스이'라고 되어 있다.
  메뉴에는 비프커틀릿, 비프스테이크, 멘치보(햄버거스테이크), 스튜비프, 라이스카레, 커피 등이 있었다. '돈가스'는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카페에 술이 나오게 되면서, 가족동반으로 양식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대신 문인이나 화가, 연극인이 등장해서 독특한 문예론을 펼치는 장이 되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카페는 여류문학의 발상지가 되어, 하야시 후미코林文子, 우노 치요宇野千代, 사다 이나코佐多稻子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성장했다. 카페가 다이쇼 시대부터 쇼와 시대 초기까지 서민들에게 양식을 보급한 공로는 지대했다. (242~244쪽.)

 

  (...) 일본과 마찬가지로 서양의 음식을 처음 접했을 중국과 한국에서는 왜 '양식'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일까.
  예를 들어 상하이는 국제도시로서 외국문화와 접할 기회가 많았고, 광둥요리도 토마토케첩, 우유, 빵, 기타 서양식 재료나 조미료 등으로 서양요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또 한국에는 일본이 통치한 불행한 시대에 카레라이스가 보급되었고, 한국전쟁 때 미국의 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전통적인 민족요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은 양식도 출현하지 않았다.
  (...) 필자는 일본에 양식이 뿌리내린 또 하나의 이유로 '일본인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잡식성이 강한 민족이라서, 동남아시아와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처럼 고유의 에스닉(ethnic, 민족) 요리가 형성될 여지가 없었다'는 점을 들고 싶다. 이런 특징은 일본의 음식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만약 일본이 다른 나라처럼 고유한 민족음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다양한 외래음식을 일본화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음식에 대한 주체성이 없기 때문에, 전 세계의 음식을 흡수하고 동화해서 향유하는 기술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같은 젓가락문화권인 중국이나 한국의 음식문화와 비교해볼 때 근본적인 차이라 할 수 있다. (264~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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