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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수바드라 다스, 북하우스, 202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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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수바드라 다스, 북하우스, 2024.)

Dog君 2024. 6. 14. 19:13

 

  어떤 독자에게는 이 책이 딱히 새삼스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서구중심주의와 근대에 대한 비판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좀 그랬습니다만, 막상 책을 들춰보니 이 책이 거명한 10개의 키워드가 사뭇 범상치 않게 느껴졌습니다.

 

  과학, 교육, 문자, 법, 민주주의, 시간, 국민, 예술, 죽음, 공동선.

 

  이들 키워드 중에는 제목만 보고도 내용이 짐작가는 것이 있었던 반면 완전히 낯설게 느껴진 것도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문자와 예술 같은 키워드가 꽤 낯설었습니다. 저 스스로 서구중심주의에 비판적이라고 자부하고 나름대로 공부도 좀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말이죠.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주는 지적인 만족감은, 당연하게 느끼는 것을 낯설게 만들어준다는 점에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 삶 속의 서구중심주의와 '근대'를 논할 때 이렇게 다양한 키워드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책 중반부를 넘어가면 독자로서는 살짝 막막한 마음도 듭니다. 우리 삶에서 서구중심주의적이지 않은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아이고, 서구중심주의는 우리 삶의 원죄 같은 것일까요? 그렇기에 우리는 그 바깥의 삶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걸까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무턱대고 '반(反, anti-)서구'가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반서구주의를 내세웠던 것들, 예컨대 크메르루즈니, 이슬람 근본주의니 같은 것들 중에서 무엇 하나 멀쩡했던 것들이 없으니까요. 서구문화의 과도한 규정력에 저항하는 것이야 좋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인권이나 자유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까지 죄 갖다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서구중심주의와 '근대'지상주의를 진정으로 벗어난다는 것이, 무턱대고 반대로만 한다고 되는 일은 아닐겁니다.

 

  진정한 '탈(脫, post-)서구'는, 조지 레이코프가 절대로 생각하지 말라고 그렇게나 강조했던 '코끼리'처럼, 이들 10개의 키워드에 전혀 구애받지 않으면서 새로운 테제를 상상하는 순간에 비로소 달성할 수 있을 겁니다. 서양 문명을 "흥미로운 아이디어"라고 생각해버리거나 "유럽을 (하나의) 지방으로 만드는 것"(by 디페쉬 차크라바르티) 등에 그런 실마리가 있을 것 같네요. 그러니 진정으로 이 책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은, 이 책의 내용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 때라고 하겠습니다.

 

  쓰고 보니 약간 불가의 선문답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만, 바로 그 지점이 이 책을 약간 삐딱하게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서구중심주의 비판이라는 의도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여전히 이 책이 막상 비서구의 경험을 담아내는데는 부족하지 않나 싶거든요. 방송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탈서구 담론조차 서구의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건가 싶은 것이죠. (여기서 참고할만한 것이 파르타 채터지Partha Chatterjee의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 비판입니다. 앤더슨의 민족주의론은 흔히 탈민족주의의 텍스트로 읽히지만, 채터지는 'Who's Imagined Community?'라는 글에서 앤더슨의 이론이 피지배자의 상상력을 도외시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물론 방송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게 저자의 잘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책이 던진 화두에 적극 응답하는 것은 비서구에 살고 있는 우리 스스로의 책무겠지요. 그러니 이 책을 시작으로 좀 더 많은 분들이 보다 자유롭게 탈서구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더 많은 것을 상상할 때, 비로소 우리의 언어로 우리를 설명할 수 있는 단초도 찾을 수 있겠지요.

 

  골턴 컬렉션은 인간의 과학적 노력의 일부다. 이는 이성의 힘과 경험주의의 경이로움을 기리며 세운 조그만 기념비다. 이 컬렉션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물학을 진전시키기 위해 골턴이 사용했던 물건, 장치, 원형 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실험하며 수집하고 분석했던 갓류 식물의 씨앗이 들어 있으며, 이런 실험들은 상관관계와 평균회귀라는 수학적 원칙들을 확립했다. 오엽 배열기도 있다. 이는 골턴이 직접 고안한 기계로, 통계학적 원칙으로서의 회귀를 설명한다. 장차 유전학으로 향하게 될 수학적인 창을 열어준 것이었다. (...) 도구들을 한데 모아놓고 보면 서양 과학이 지니고 있던 가장 심각한 오해가 드러난다. 바로 인간을 어떤 식으로든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다는 오해 말이다. 우리의 의식, 감정, 그리고 공유된 경험이 만들어내는 드넓고도 미처 헤아릴 수 없는 영역을 어떤 식으로든 차트 속 일련의 숫자들로 축소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오해 말이다.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 : 과학」, 41쪽.)

 

  (...) 이제 인류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가지 특정한 방식으로만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 그 자체의 방법을 통해서만 말이다. 비서구 지역 출신인 사람들, 특히 인종적으로 백인으로 취급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도 인간이라고 얘기한다면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리 없다. 그 사람들을 믿을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책임이 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다. 인종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그 연장선상에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이는 일도 사실상 무의미하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인종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끔 만들 것이며, 과학이 이들의 알리바이다. 과학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게 해준다.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라는 말은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더 광범위한 역사적 맥락을 조금 더 자세한 살펴보자. 그러면 과학의 기반, 특히 인종 과학의 기반이 더욱 깊은 목적에 복무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백인이라는 것, 그리고 문명화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강력해진다는 뜻이 된다.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 : 과학」, 48쪽.)

 

  (...) 이들은 서양의 주요 작품은 영구하고 중립적인 선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비판하는 것은 무지하거나 또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그렇지만 이번 장에서 줄곧 살펴보았듯이, 서양의 교육은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자국에서나 해외에서나 말이다. 서양에서 벌어진 교육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는 이론이라기보다는 차이를 기술하는 도구에 가까웠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특히 계급의 차이, 그리고 한편으로 과학과 관련해서 살펴봤던 것처럼 이른바 인종 사이의 차이를 말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맞서 싸워야 하는 지식의 독점이다. (...) 교육이 곧 세뇌, 구체적으로는 제국의 긍정적인 역할, 유익함, 중요성을 세뇌하는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다. 그리고 가장 일궈내기 쉬운 변화 가운데 한 가지는 바로 백인의 교육과정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박식하고, 교육 수준이 높고, 문명화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을 형성해낸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과 더불어서 말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 교육」, 86~87쪽.)

 

  롤스의 정의 이론은 '모두에게 공정을'이라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이 어느 정도로 작동하는 가는,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공정'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나아가 '모두'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달려 있다. 마그나 카르타에 봉인을 하라며 존 왕에게 요구했던 남작들 입장에서는 그 문서에 쓰인 '사람'의 정의는 본인들로 한정이 되어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부유하고 대단한 특권을 누리는 엘리트 계층 말이다. 인클로저 운동이 만들어낸 다양한 청원을 통과시킨 국회의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보기에 체로키족은 전혀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을 몰고 가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몇 세기 동안 이어질 주변화와 차별의 길을 걷게 하며 동물처럼 대하는 행동이 합당하다고 느꼈다. 법이 얼마나 유용하건 결함이 있건 간에, 법이 지닌 추상적인 속성은 정의도 추상적인 세상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저기 어딘가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처럼 여겨지도록 말이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의 사법 시스템은 딱 이를 만들어낸 권력자들의 수준까지만 좋거나, 아니면 딱 그만큼까지 나쁜 경우가 많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깨어나서 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 상황은 바뀔 리 없어 보인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 : 법」, 158~159쪽.)

 

  고대 아테네 사람들이 선거에 의구심을 품었던 것은 무척 일리가 있어 보인다. 선거에서 당선되어 관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말이다. 오늘날에는 '과두제 집권층oligarch'이라는 말 앞에 '러시아'가 붙는 일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이는 러시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이든 옛날이든, 제한된 소수가 통치한다는 관념은 보편적이었다. 선거에 이겨서 지배력을 독점한다고 해서, 그 소수의 지배층이 훌륭한 통치를 선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실제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은 서로 다른 능력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최근 우파 정당들은 만약에 선거에서 이기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욱 극단적인 입장들도 포용할 수 있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
  당연한 얘기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적합한가에 관한 철학적인 우려는 바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였으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진압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특히 몇 세기 내내 인간 이하라고 여겨진 사람들을 상대로 말이다. 미국에서는 이것이 지능과 문맹률 시험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는 사람들,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해 설계한 것이었다. 여성에게도 똑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다양한 주장들을 활용했다. 여성은 오랫동안 선거권을 거부당했다. 선거권을 행사하기에는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나 필요한 요소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거나, 접근이 어려운 투표소라거나, 제한적인 투표 시간 같은 다른 요소들과 결합함으로써, 19세기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학자였던 알렉시 드 토크빌이 밝혔던, 억압적인 다수결주의가 통치할 수 있다는 우려는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는 자기 복제를 위해 설계된 것으로만 보일 정도다. 여기에는 기존의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것도 포함된다. (「민중에게 권력을 : 민주주의」, 188~189쪽.)

 

  공장 시스템의 형태를 갖추고 등장한 제조업은 단순히 경제를 혁명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 제조업은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산업화 이전에는 사람들은 노동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여가를 어느 정도 융통성 있게 관리할 수가 있었다. 일은 계절에 따라 이루어지며, 날씨, 수확물, 일광 시간에 따라 좌우되었다.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쓸 수가 있어서, 심지어는 밤 시간도 쪼개어 두 번 잠을 자면서 그사이 몇 시간을 깬 채로 보내고는 했다. 공장을 바탕으로 삼는 제조업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사람들은 말하자면 24시간 내내 일해야 한다는 기대를 받았다. 혹사당하면서 노동을 하고, 손가락과 팔을 잃고, 이윤을 향한 갈망과 기계에 희생되었던, 이 시스템 속에서 착취를 당한 사람들, 산업 노동자들, 특히 많은 아동 노동자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노동자들은 여기서 또 다른 것도 잃게 되었다. 자신들의 시간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자신들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잃은 것이다. (「시간은 돈이다 : 시간」, 209~210쪽.)

 

  이런 식의 노골적인 제도적 차별은 과거의 유물이니, 안전하게 역사 속으로 보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애석하게도 이런 상황은 오늘날에도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지속된다. 브렉시트가 일어나기는 했어도, 영국과 같은 편에서 싸웠던 국가의 후손들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에 맞서 싸웠던 나치 군인들의 (사상적인 후손까지는 아닐지언정) 생물학적 후손인 독일인들이 영국에 들어오기가 여전히 훨씬 더 쉽다. 내 얘기를 믿어도 좋다. 나도 영국과 같은 편에 섰던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국가는 당신을 원한다 : 국가」, 249쪽.)

 

  스튜어트 홀은 이렇게 적었다. "제국은 흥망성쇠를 겪는다. 그렇지만 대영제국이라는 형상은 영원히 이어질 운명인 것만 같다. 지구의 수많은 다양한 구석구석에서 제국의 깃발은 내려졌다. 그렇지만 집단 무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펄럭이고 있다." 홀에 따르면 이런 집단 무의식이 낳은 결과는 바로 백인 엘리트 계급, 중산층, 노동계급 모두를 본능적인 교훈주의가 더해진 본능적인 애국주의와 연결 짓는 포퓰리즘이었다. 바로 이런 포퓰리즘이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에 몇몇 영국인들의 감상 속에 흘렀던 것이다. "우리는 '떠나겠다'고 투표했는데, 당신은 왜 아직 여기 있는가?"라고 말이다.
  민족주의자들에게 크나큰 위협은 뿌리 없는 범세계주의자다. 민족주의자들은 이민자들이 충성을 모른다고 여긴다. 그들은 국가의 경계, 법, 또는 비전들이 지니는 신성함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그런 비전들이 제아무리 인종차별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
  영국인이란 어떤 의미인가라는 관념안 아주 명확하다. 이곳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또는 그 연장선상에서 영국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민족주의를, 영국이라는 국가와 영국의 공로를 향한 열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할 필요가 없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와 결부되어 나타나는, 민족주의가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앞서 살펴보았던 영국의 제국주의적인 과거와 그에 따른 민족주의적인 재앙을 떠올려본다면 일종의 난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옳건 그르건 간에 국가를 지지한다고 밝히라는 요구를 받는다. 국가가 잘못을 저질렀던 그 모든 시간을 견디며 말이다. (...) (「국가는 당신을 원한다 : 국가」, 264~266쪽.)

]

  (...) 어떤  식으로든 간에 이른바 서양의 진보와 발전이라는 환상 너머를 보아야 하며, 세상을 사고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방식을 향해 눈을 떠야 한다. (...)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내용을 바탕으로 삼아 자기 자신에게 점점 더 좁은 한계를 설정하기보다는, 무언가 더 크고 나은 것의 일부가 되는 일이 어떤 의미일지를 상상하기 시작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 되어라. 그렇지만 공동체와 주변 사람들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어쩌면 그렇게 해야 문명과 같이 우리를 가르는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일에 초점을 맞춰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한배를 타고 있다 : 공동선」, 376쪽.)

 

교정. 초판

74쪽 밑에서1줄 : 집중했고. -> 집중했고,

240쪽 1줄 : 민주주의의가 -> 민주주의가

256쪽 2줄 : 클래리지스에 -> 클레리지스에

256쪽 밑에서9줄 : 알렉산데르 -> 알렉산다르

328쪽 8줄 : 티본안을 -> 티본앙주를

357쪽 밑에서2줄 : 베넥딕트는 -> 베네딕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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