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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지식과 사회 (박명림, 나남, 20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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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지식과 사회 (박명림, 나남, 2011.)

Dog君 2024. 7. 23. 17:04

 

  각 잡고 쓴 연구서나 논문이 절대로 빠뜨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연구사 정리'죠. 이게 있는지 없는지만 봐도 이 책이 주된 독자로 상정한 것이 전공 연구자인지 비전공 독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연구사 정리'란 어떤 책과 논문이 다루는 주제가 과거에는 어떻게 연구되었는지를 정리하는 과정입니다. 기존의 연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공백이 어디인지, 혹은 기존의 연구가 무엇을 주장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순서죠. 저희 식으로 표현하자면 '골리앗'을 세우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 『역사와 지식과 사회』는,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한국전쟁 연구사 정리'입니다. 그런데 연구사 정리라는게 박사논문 정도에서도 길어봐야 10여 쪽 남짓 나오는 것이 상례인데, 어쩌다가 이 책은 연구사 정리만으로 책 한 권이 너끈히 나오게 된 걸까요. 아마도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이 그만큼 어마어마한 것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사회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영향이 컸으니까요.

 

  이 말은 달리 말하면, 한국전쟁을 생각하는 우리의 관점도 그만큼 간단치 않다는 뜻입니다. 일견 한국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대승부로만 보입니다. 그러니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 역시 딱 두 진영으로만 나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생각만큼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일례로 저희가 예전에 읽었던 『마을로 간 한국전쟁』만 떠올려봐도 그렇습니다. 그 책은 한국전쟁의 세세한 디테일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이념이 아니라 각 마을 공동체 안에 내재했던 복합적인 갈등구조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주장하거든요.

 

  지난 수십여 년 동안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이 책을 따라서 찬찬히 훑어오면,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과거 냉전 시대의 그것에 비해 훨씬 다양해졌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여론 구조 역시 그만큼 다양해졌다는 뜻이라고 봐야겠지요. ('역사와 지식과 사회'라는 제목도 이와 관련이 있을 거구요.)

 

  그렇다고 이 책을 '한국전쟁 연구사 정리'라고만 정리하고 넘어간다면, 이 책은 비전공 독자보다는 한국현대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에게만 어울리는 책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이 전문연구자가 아닌 비전공 독자에게도 충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 연구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통해 우리사회가 얼마나 다양하고 포용적이고 성숙해져 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이는 현상을 관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장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연구가 이분법에 갇혀 있는 이상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이분법적으로 획일화될 수밖에 없겠죠. 반대로 한국전쟁을 폭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사고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사고체계도 그만큼 다양하고 폭넓게 확장될 수 있을 겁니다.

 

  1980년대 내내 학계와 현실운동 모두에서 민주주의와 함께 분단, 민족주의, 민족자주, 통일문제 등 광의의 민족담론(民族談論)은 반공담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안적 언술체계가 되었다. 이때 운동과 지식은 상호 필요와 상호 강화를 주고받으며 맞물려 돌아갔다. 이제 민족담론은 '정의와 열정의 도구'로서 뿐만 아니라 '비판과 실천의 무기'로서 인식되었다. 정념(情念)에서 과학으로의 전이였다. 최초 해방과 분단에 대한 재인식으로부터 출발한 비판적 지식작업들은 점차 현대한국의 모순구조의 최종적 결절로 인식된 한국전쟁으로까지 연결되었다. 분단국가의 근본존재이유(raison d'etre)가 공산주의의 침략을 저지했다는 반공인식에 근거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전환은 대안적인 지적 도전이 급기야 분단질서 및 국가의 정당성 자체를 파열시키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남북한의 출발점이었던 해방·분단·한국전쟁에 대한 재인식은 단순히 그 사태들에 대한 재해석을 넘어 남한과 북한의 체제정통성, 식민시대 민족운동세력의 평가, 국가형성 과정, 전후 남북한의 사회발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미국과 소련, 냉전과 국제질서 ... 등 거의 모든 문제를 과거와는 전혀 달리 보게 되는, 때로는 반대로 인식하게 되는 근본적 사유구조의 전환을 의미했다. 분단극복과 자주 의식의 저변은 민족주의였고, 따라서 가장 극적으로 재해석된 대상은 한국의 현대사 및 정체성과 가장 밀접히 연결된 북한과 미국이었다. 분단과 통일의 대상은 북한이었고, 종속과 자주의 대상은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45쪽.)

 

  특별히 자료수집 과정에서 해외에 소장된 자료의 발굴과 국내반입에 기여한 방선주의 역할은 하나의 지성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국사편찬위원회, 국방부 국방군사연구소(군사편찬연구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등 국내의 여러 해외자료 수집기관에게 초인적 의지로 방대한 양의 초기 한국과 한국전쟁 자료를 복사하여 제공했다. 그의 자료제공은 많은 양의 자료집들로 출간되어 국내의 연구자들이 미국에 가지 않거나 단기적으로 체류하면서도 주요 자료를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방선주는 자신이 직접 여러 잡지에의 기고를 통해 미국 내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를 소개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자료와 연구, 미국과 한국을 지식적, 공간적으로 연결하는 학문적 가교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그의 손을 거친 자료를 보지 않은 80년대의 연구자는 거의 없었다.
  (각주) 방선주는 지난 30년 동안 개인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양과 질을 갖는 자료를 발굴하였고, 이 중 약 300책 정도가 출간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점에서 한국정부가 그에게 2007년 3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요한 것은 적절한 학문적 예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연합뉴스, 2007년 4월 4일). 필자는 매번 방학이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나아가 자료를 수집할 때마다 자료발굴과 수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현대한국과 한국전쟁 연구에서 방선주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한국학계와 세계학계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4~65쪽.)

 

  수용, 학습, 극복의 과정과 관련하여 여기에서 한국전쟁 연구의 학지정리에서 매우 중요한 용어의 문제를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이른바 전통주의(traditionalism)와 수정주의(revisionism)라는 오래된 관행적 분류도식을 말한다. 필자가 이해하기에 적어도 학문적 수준에서 냉전시대 당시의 한국전쟁 또는 현대한국 연구의 집합적 흐름과 경향을 그렇게 부르기는 어렵다고 본다.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는 기본적으로 전후 냉전질서, 또는 미국(과 소련)의 외교정책에 대한 시각을 말하는 것이지 한국전쟁 연구와 직접 관련 있는 설명체계의 유파는 아니기 때문이다. 미소의 외교정책과 냉전에 대한 해석이 곧 한국전쟁 이해와 같은 것 아니냐고 주장하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한국전쟁에 대한 관점, 이론, 해석, 분석틀의 독자성을 고민한다면 위의 용어와 분류도식은 사용하기 어렵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최근 일부에서 말하는 한국전쟁 연구의 신전통주의니 신수정주의니 하는 표현 역시 옳은 분류가 아니다. 도대체 신전통주의의 핵심은 무엇이며, 또 신수정주의의 요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같은 남침 주장일지라도 김일성과 내부요인을 강조하면 신수정주의이고, 스탈린과 외부요인을 강조하면 신전통주의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학문에서 이러한 모호한 개념규정과 작위적 분류는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동일한 연구에 대해서조차 논자에 따라 신전통주의로 분류하거나 반대로 신수정주의에 포함시켜 논의하는 것만 보아도 이러한 분류가 얼마나 자의적이며 도식적인 지적 혼란의 산물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한국전쟁에 관한 한 전쟁의 발발원인에 한정하여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용어인 전통주의나 수정주의가 모두 객관적 사실에 바탕한 지적 엄격성보다는 이념적 편향에 경도된 분류였기 때문에 발생한 개념적 방법적 혼란이었다. 더욱이 탈냉전 이후 신전통주의나 신수정주의와 같은 용어는, 원인과 발발의 거의 모든 역사적 사실이 드러난 현금에는, 해석의 영역이 아니라 사실의 차원에서는, '그 자체로는' 성립될 수 없는 용어이다. 또 전쟁의 원인과 발발을 다루지 않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전쟁 연구의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훨씬 더 많은 한국전쟁 연구들은 아예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신전통주의와 신수정주의의 범주 자체를 의식할 필요조차 없다. 즉 전쟁의 전개, 학살, 생활사, 기억, 기념, 유산, 영향...에 관한 연구는 이러한 이념적 용어 자체를 적용할 수가 없다. (66~67쪽.)

 

  우리는 인간들의 경험이 반드시 사태를 이성적으로 보지 못하게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경험의 충격은 강하면 강할수록, 충성이건 저항이건, 인간을 그에 긴박되게 만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충격이 크고 경험의 공유범위가 넓을수록 이것은 더욱 그러하다. 이 과정에서 정밀하게 탐색되거나 분석되어야 할 주제들은 충격에 압도되어 방임될 수 있다. 북한과 김일성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크면 클수록 실제의 사태에 대한 객관적 사실구성과 논리적 추론, 정교한 이론에 의한 해석은 소홀히 하게 된다. 증오가 과학으로 나아가려는 이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오를 유발하는 체험의 통과를 기다려 이성적 사유를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겠다. (112쪽.)

 

  언론과 정부의 노력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 이유는, 학문적 연구의 쟁점은 학술적 논의를 거쳐 극복되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비슷한 수준의 과거연구를 반복하는 것은 이미 그 수준을 훨씬 지나 있는 연구의 존재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즉 정부와 언론의 끈질긴 민중사관과 수정주의 극복 노력은 거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현실의 변화, 새로운 자료의 입수와 공개, 그리고 수준 높은 연구의 제출만이 기존 시각을 극복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 입증된 것이었다.
  실제로 학문과 권력의 관계는 국제적 차원에서도 평가 가능하다. 냉전시대 해외 한국학의 수준 또는 발달문제와 관련하여, 이념의 문제를 넘어 학문적 차원에서 볼 때, 한국의 권위주의 정부의 직접적인 재정후원을 받은 상당수의 연구들이 그렇지 않은 독립적 연구들에 비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돌아보면 이 문제는 자명해진다. 민주화 이전 오랫동안 제임스 팔레(James Palais)와 커밍스, 에커트(Carter Eckert)를 비롯한 독립적 연구들이 한국학의 정점 내지는 권위로 평가받은 연유는 학문적 수준과 함께 그 독립성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한국정부의 재정후원을 받은 적지 않은 미국 내 기관과 학자들의 정치적 이념적 연구들이 이들의 연구수준을 뛰어넘지 못한 것은 출발부터의 비학문적인 목적 때문이었던 것이다.
  정치적 연구들의 완전한 실패를 보여주는 전범은 북한의 학문이었다. 자기 체제와 지도자, 주체 이념을 세계에 수출하려 시도한 북한의 숱한 영문저작들이 받은 평가는 외려 목적한 바와는 반대로 세계적 웃음거리에 가까울 정도였다. 김일성과 한국전쟁, 주체사상에 대한 북한의 연구들은 권력으로부터 분화되지 않은 학문의 최악의 사례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즉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적 연구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반면실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국제 한국학에서 이 문제는 남한의 민주화와 북한의 남북경쟁 탈락을 계기로 거의 모든 연구가, 비록 남한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을 받더라도, 현저하게 탈정치화, 탈이념화, 탈권력화라는 바람직한 길을 보여주고 있다. (176~177쪽.)

 

  차제에 식민지 근대화 테제에 대해, 한국전쟁 연구와의 높은 관련성 때문에라도, 몇몇 핵심적인 문제만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적어도 네 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지 산업화에 불과한 사회변화를 식민지 근대화로 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산업화를 근대화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옳은 접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근대화에는 산업화뿐만 아니라 국민국가 건설, 민주주의, 자유, 평등, 주권, 개인성 등 훨씬 많은 요소들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한 일제 식민지기 동안의 한국에서는 거의 거꾸로 진행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근대화의 진행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이자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식민지 근대화에서 말하는 근대성·근대화는 당시에는 일본식 근대성·근대화, 또는 군국 전체주의 근대성·근대화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전일적이지 않았고 식민통치 중반을 지나면서는 '이미' 미국식 근대성 및 소비에트 근대성과 심각한 경쟁관계에 돌입해 있었다. 식민통치 후반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특히 이 경쟁관계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국제관계 변동에 따라 후자로의 대체가 불가피한 조건이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폭력적으로 강요되던 일본식 근대화는 한반도에서 후자로 신속하게 대체되었다.
  셋째로 근대화의 양적 변화가 초래하는 질적 비용, 즉 인간적 비용(human cost)에 대한 고려가 너무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때 말하는 인간은 민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인간 삶의 양적 질적 변화의 측면을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과 관련된다. 전체주의 근대화는 이 점에서 비판받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말해 근대화의 양적 변동에 수반되는 인간적 측면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면, 식민지 근대화의 인정은 당연히 그 근대화가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사회갈등과 계급갈등, 민족운동에 대한 인정의 토대 위에 후자를 함께 고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로 한국 및 북한의 전후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말하는 전후 한국의 경제발전과의 상관성에 대한 오류의 문제이다. 신속하게 일본 식민통치의 잔재를 극복한 북한은 말할 필요도 없고, 한국의 경제발전 역시 토지개혁, 세계체제 편입, 자본주의 시장경제 도입, 탈식민 국민교육, 수출주도 발전전략의 채택을 포함해 일본 식민통치의 잔재를 극복한 종전 15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경제발전이 가능하였다는 점이다. 즉 식민유산의 지속이 아니라 식민잔재의 극복 정도와 한국의 산업발전은 거의 비례하였음을 알 수 있다. (253~254쪽.)

 

  만약 (...) "그러니까 과거는 묻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것 아니냐"는 식의 문제의식이라면 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관용의 정신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으나, 문제는 관용은 진실을 규명한 연후에 가능하다는 점이다. 동시에 피해자의 자발적 동의가 전제되지 않을 때 가해자의 관용 주장은 또 다른 폭력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가해를 자행한 국가가 나서서 먼저 관용을 말해서는 안 된다. 피해를 당한 국민이 먼저 그럴 때 비로소 국가는 사과를 한 뒤 그들의 관용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 (300~301쪽.)

 

  (...) 역사와 사회과학의 결합 노력은 정말 중요하다. 현 단계에서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진지한 대화를 위한 노력의 필요성은 가장 강조되어야 할 요소의 하나일 것이다. 일반이론화(generalizing theory)의 시도와 구체적인 역사서술(historiography) 사이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회(과)학이 기초자료를 무시하는 오류를 저질렀다면, 역사학은 유용한 사회(과)학적 방법과 개념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해왔다. 또 사실의 홍수 속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도 이론의 도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점과 관련해 다시 베버로 돌아가면 객관적 연구를 위해 이론은 필수적이지만 또한 불변의 진리는 아닌 것이다. (...)
  그리하여 그는 결국 "성숙해 가고 있는 과학이란 이념형이 경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또는 '유개념'으로 생각되는 한 실로 항상 이념형의 '극복'을 뜻한다"고 언명한다. 모든 연구에서 너무도 중요한 이념형의 타당성과 극복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상체계란 우리들이 우리들의 관심의 범위 내에 그때그때마다 끌어들인 사실들의 혼돈 중에 우리들의 그때그때마다의 지식상태와 또 그때그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개념형성물에 근거해서 질서를 가져오려는 시도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사회생활을 다루는 과학의 역사는 언제나, 개념구성을 통해 사실들을 사상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이렇게 하여 획득한 사상상(思想像)은 학문의 시야가 확대되고 이동함으로써 없어진다―와 그렇게 변한 기초 위에서 개념들의 새로운 구성 간의 끊임없는 교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역사적 개념들의 내용은 필연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 개념들은 그때그때마다 반드시 예리하게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동안 국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경향은 서구학문과는 반대의 길을 갔던 것이 사실이다. 역사학의 자료발굴과 사실정리가 이루어진 토대 위에서 사회과학의 이론화와 해석의 시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의 선제연구와 문제제기가 있은 연후에 역사학의 추격이 진행되는 역(逆)의 형태였던 것이다. 한국현대사는 물론 북한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과 현대한국에 대해 열화의 추격단계를 벗어나 넓고도 깊은 독자적인 역사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이제부터 이러한 역의 경향은 바로잡아져야 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 우리는 본격적인 융합연구에 착수하여 한국전쟁 연구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366~373쪽.)

 

  우리는 지금 반세기 전의 부정적 교훈을, 긍정으로의 수정과 전환 없이 민주주의 아래서 왜곡된 방식으로 재연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남남갈등이라는 이름으로 넘어갈 것이 아니라 이것은 냉정하고도 두렵게 직시되어야 한다. '수구꼴통', '친북좌파'라는 상호규정 속에는 이미 증오와 적의가 넘쳐나며 어디에도 한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사람과 생각에 대한 공존과 존중의지는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의 폭력공간이 열리고, 또 그러한 수단이 주어졌을 때 '수구꼴통'과 '친북좌파'를 척결하기 위한 행동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우리는 이미 한국전쟁으로의 이행 이전에 그러한 언어의 전쟁이 먼저 시작되었음을 명백하게 목도한 바 있다. 전쟁을 통한 평화가 정당하지 않고 가능하지 않듯, 갈등을 확대하려는 이념공격은 그 자체로 평화파괴행위인 것이다. 그 점에서 탈냉전시대 한국전쟁 연구는 (과거와 같은) '정체성 확인'의 연구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정체성 확대'의 연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380~381쪽.)

 

  나는 이 두 분[랑글루아(Charles Victor Langlois)와 세뇨보스(Charles Seignobos)]의 제자였다. 그들 두 분은 모두 내게 깊은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내가 받은 교육은 두 분의 가르침과 업적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두 분 다 역사가의 첫 번째 의무는 성실성이라고만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학문의 진보는 학문에 종사하는 세대와 세대 간의 불가피한 대립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분들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간직한 채 필요할 경우 아무 거리낌 없이 그분들을 비판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날인가는 나의 제자들이 나를 비판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Marc Bloch, 정남기 옮김, 《역사를 위한 변명》(서울: 한길사, 1979),  p. 24.) (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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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쪽 13줄 : 이대근 저작은 -> 이대근의 저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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