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일본사 시민강좌 (이재석 외, 연립서가, 2024.) 본문
일본.
참... 애증의 이름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는 이웃입니다만 '이웃사촌'이라 할만한 관계는 또 아닌 것 같습니다. 가깝게는 식민지배의 역사가 있고, 좀 멀리 가면 임진왜란의 경험도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했고, 조선 초에도 대마도 정벌이 있었습니다. 하나 같이 유쾌하지 않은 것들이잖습니까. 그런데 또 양국의 역사가 갈등과 충돌로만 점철된 것도 아닙니다. 고대 이래로 누천년간 축적된 한일 교류의 경험은 물론이고, 임진왜란 이후 수백년간 꾸준히 파견된 통신사(通信使)의 존재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국과 일본은 갈등과 화합을 거듭하며 여태 이러고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우리는 일본을 말할 때 마냥 객관적이고 엄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감정이 치밀어오르기 마련이죠. 하긴, 과거사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까지 불거지곤 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일본에 대해 엄정한 자세를 취하는게 어떻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의외의 역설이 생깁니다. 한국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외국(外國) 중 하나이며, 따라서 한국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도 일본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도, 일본사에 대해 차분하게 정리된 책은 정작 찾기가 힘들지요. 뭐라도 있을까 싶어서 서점에 가서 책을 좀 찾아보면 마땅히 마음에 드는 책이 안 보입니다. 쉽게 읽을만한 책은 감정과잉인 경우가 많고, 신뢰할만하고 권위있는 역사학자가 쓴 책은 너무 딱딱해서 좀체 손이 안 갑니다.
이번에 읽은 『일본사 시민강좌』는 그런 독자에게 가장 적절한 선택지일 것 같습니다. 의도한 결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의 제목을 듣는 순간, 오래 전부터 역사에 관심을 가져왔던 독자는 자연스럽게 『한국사 시민강좌』를 떠올릴 겁니다. 『한국사 시민강좌』는 이기백 선생이 주도하여 1987년에 창간된 반연간지로, 2012년 50호를 마지막으로 내고 종간하기까지 한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보다 쉽게 전달하는데 목표를 두고 간행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한국사 시민강좌』는 시대순으로 나열한 통사(通史)가 아닌, 매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를 중심으로 특집을 구성했죠. (고대사 관련 특집이 꽤 많은게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일본사 시민강좌』도 꼭 그러합니다. 일본의 역사를 기계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우리가 한번쯤은 궁금해했고 또 관심을 가질 법한 이야기들로 목차를 구성했습니다. '천황(天皇)'이라는 명칭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불러야 할지, 오다 노부나가와 다케다 신겐 같은 이들이 활약했던 전국(戰國)시대는 어떤 시대였는지, 우리보다 훨씬 긴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일본 기독교의 교세가 여전히 미약한 이유는 무엇인지, 메이지 유신 이후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갈등이 식민지의 헌병경찰제도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등등. 이런 주제들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입니다만, 이웃한 일본과 이웃사촌으로 잘 지내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기도 합니다. 내가 아닌 타자를 이해하고 그들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표피만이 아니라 그 저변에 깔린 심성까지 이해해야 하니까요.
이것은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닌 태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들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자체가 일본이라는 사회를 이해하고 타자와 평화로이 공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잖습니까. 바로 이러한 태도야말로 '시민'이 갖춰야 할 덕목이겠지요.
그런데 총이 전래된 의의를 살필 때 조금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총이 전래된 것을 곧바로 유럽 선진 문물이 도입된 것으로 등치시켜 파악하는 관점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일부이기는 하나, 유럽 신무기인 총을 가장 빨리 받아들인 일본이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세기에 들어와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 근대화를 가장 먼저 달성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어요. 총의 전래를 가지고 '선진 문물'을 수용한 일본과 그렇지 못한 '뒤처진' 다른 동아시아 국가라는 도식으로 파악하는 관점입니다. 이런 주장은 사실에 맞지 않습니다.
'유럽에서 전래한 총'이라 하면 보통 유럽인이 직접 배를 타고 와서 일본에 총을 전해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 실제 일본에 온배는 유럽 배가 아니라 중국 배였습니다. 100여 명의 선원도 대부분 중국인이었지요. 오봉이라는 중국인과 일본인이 필담한 것도 그런 사정이 있었던 거예요. 더욱이 다네가시마에 전해진 총도 방아쇠를 당긴 후 천천히 발사되는 유럽형 완발식緩發式 화승총이 아니었습니다. 동남아시아에 널리 보급된,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총알이 바로 나가는 순발식瞬發式 화승총이었지요. 즉 애초에 유럽 총이 아닌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개량된 총이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총은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매개로 전해졌으므로 유럽인의 역할만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관점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16세기 포르투갈 세력은 아직 동아시아 바다를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인들은 이미 형성된 기존 교역질서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배에 포르투갈인도 편승했던 거지요.
(...)
총의 전래에 왜구를 매개로 형성된 동아시아 교역망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을 간과한 채 총의 전래를 오로지 유럽 선진 문물의 도입이란 도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요. 동아시아 지역 내 실제 상황을 무시한 유럽(또는 일본) 중심 사관이라 할 것입니다. (박수철, 「'전국시대', 총과 은 이야기」, 150~154쪽.)
이처럼 나가시노 전투의 성격에 관해 총과 말의 싸움이었다거나 또는 신구 세력의 싸움이었다는 등 다양한 평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승패의 본질은 사실 양자의 경제력 차이에 있었습니다. 교토와 오사카, 사카이 등 지역은 지금 한국으로 비유하면 서울·경기 지역에 해당하는 경제적 선진 지역이에요. 당시 이 지역은 다양한 세력들의 이해관게가 얽혀 있어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앞서 승려들로 구성된 네고로지라는 용병 집단도 언급했지만, 그 외에도 교토의 엔랴쿠지延曆寺와 나라의 고후쿠지興福寺 등 오래된 종교 세력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신흥 종교 세력이라 할 혼간지本願寺 등과 연계해 잇키一揆(반란·봉기)를 일으킨 백성 세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고대 이래 전통적인 권위를 지닌 천황 및 공가公家와 현실 권력을 지닌 무로마치 쇼군과 이를 추종하는 세력도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전국시대가 본격화되었을 때 어떤 세력도 이 지역을 독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부나가가 등장하여 여러 다양한 세력을 하나씩 격파하거나 흡수·제압하면서 결과적으로 기나이 전체를 장악하게 됩니다. 나가시노 전투 때 노부나가가 대량의 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이곳의 경제력과 기술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당시 일본은 화약의 원료였던 염초를 제조할 수 없어 초석을 모두 해외에서 수입해야 했고, 노부나가가 지배한 사카이라는 국제 항구를 통해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간토 지역의 다케다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노부나가의 나가시노 전투 승리 이면에 경제력의 본질적 차이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박수철, 「'전국시대', 총과 은 이야기」, 166~167쪽.)
물론 무에 관여한다고 해서 맨날 전쟁만 벌인 것은 아닙니다. 전쟁에 나가지 않을 때는 각종 성을 쌓는 데 동원되었습니다. 오사카성, 구마모토성 등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일본 각지의 성은 대부분 이 시기에 축성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대건설의 시대'라고도 해요. 지금도 그렇지만 건설 업종이 활발해지면 대체로 경제는 호황기입니다. 경기는 좋아지고 사회는 활기차게 돌아갑니다. 성들이 만들어지자 무사 가신들이 주군의 성 주변에 모여살게 됩니다. 그런데 무사들끼리만 생활할 수 없으니까 각종 물자를 공급할 상공업자(조닌町人)도 옮겨와 살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도시가 만들어졌고 농촌에는 백성(농민)들만 남았습니다. 지배층인 무사[兵]와 피지배층인 백성[農]이 신분적으로 공간적으로 서로 분리된 채 살아가는 매우 독특한 사회가 나타났습니다. 이를 '병농분리'사회라고 하는데, 에도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질 중 하나입니다. 바로 16세기 '전국시대'라는 큰 사회 변화의 귀결이었습니다. (박수철, 「'전국시대', 총과 은 이야기」, 180쪽.)
오랜 기간 그리스도교를 금지해 온 역사뿐만 아니라, 메이지유신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국가신도'와 천황제 역시 그리스도교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일본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근대국가 체제를 만들려고 했으므로 1889년에 반포된 헌법 제1조에도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동치한다."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제3조에는 "천황은 신성하여 범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함으로써, 천황에게 사실상 신격神格을 부여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천황과 그리스도교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비록 헌법에서는 신교信敎의 자유, 즉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이 자유는 어디까지나 "일본 신민의 안녕을 방해하지 않고, 신민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 한에서" 허용되는 자유였습니다. 신神인 천황과 그 천황의 동치를 받는 신민臣民의 관계를 해치지 않는 한에서만, 그리스도교의 활동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박은영, 「일본인은 왜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가?」, 374쪽.)
쓰다주쿠대학 도서관에 있는 한 전시실에는 우메코가 처음 미국으로 갈 때 입었던 기모노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황후를 만났을 때 받은 교시의 원본도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쓰다 우메코의 삶이 처음부터 얼마나 국가에 의해 기획된, 〈트루먼쇼〉 같은 삶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양처현모가 아니라, 여성의 전문직 취업과 사회 진출을 목적으로 하는 진정한 고등교육의 길을 고집해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쓰다 우메코의 활약은, 일본 정부가 이와쿠라 사절단에 여자 유학생들을 함께 보낼 때 의도했던 것을 훨씬 뛰어남는 결과였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선진 국가를 경험하고 돌아와서 여자교육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에서 국가의 의도에 부응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쓰다 우메코를 단순한 어용 엘리트 지식인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드는, 일본인일 뿐 아니라 한 명의 여성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다양한 고민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그의 인생은 일본 정부에 의해 계획된 '선'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무수한 고민의 '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트루먼뿐 아니라 우메코도 영화의 세트장에서 걸어나온 것입니다. (이은경, 「최소한의 '근대 일본 여성 분투기'」, 477쪽.)
그런데 일본에서는 1925년 보통선거법이 시행될 때 그와 함께 '치안유지법'이라는 또 하나의 법률도 제정됩니다. 이 법은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악법으로 악명이 높은데, 쉽게 이야기하면 남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폭력이나 범죄가 아닌 '사상'을 통제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입니다. "국체를 변역하거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를 처벌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국제國體'라는 말이 참 애매합니다. 좁게 보면 천황제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넓게 보면 위로는 천황이 정점이 되어 국가를 통치하고 아래로는 남성인 호주가 각 '이에', 즉 집안을 다스리는, 일사불란한 국가의 시스템 전체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국체에 대한 해석의 범위가 넓고 모호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만약 여성들이 참정권과 같이 남녀평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면 이 역시 국체에 대한 변혁을 시도하는 행동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 여성들은 남녀평등이라는 보편적인 이념을 주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이 더욱 적극적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할 기회로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합니다. '당연히' 주어야 하는 게 아니라, '필요'하니까 주자는 식의,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이 일본 사회에 더 유익한 일이라는 실용적인 관점에 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평소 부선 단체의 여성들은 정부나 지자체가 요구하는 여러 봉사나 사업 참여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본격적인 전시체제하에서는 어떻게 될까요? 충성스럽고 쓸모 있는 국민임을 입증해야겠지요. (이은경, 「최소한의 '근대 일본 여성 분투기'」, 495~496쪽.)
결국 정부군은 사쓰마의 반란군에게 전쟁 시작부터 어이없이 박살이 나고 맙니다. 비록 정부군이 근대적 무기인 총으로 무장했지만, 사무라이들이 칼을 빼 들고 달려들자 기백에 눌려서 총도 내버리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거지요.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정부는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총에 천황가의 상징인 국화 문양을 새겨 넣고, 천황이 지급한 총을 내버리는 자는 엄하게 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달라진 거라고는 병사들이 총을 버리고 도망가는 대신 총을 들고서 도망가게 되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징병으로 조직된 군대가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는 가운데, 당시 신정부 쪽에서 유일하게 싸울 만한 전투 조직이 있었습니다. 바로 경찰이었지요. (이승희, 「제국의 헌병,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다」, 523~525쪽.)
물론 일본에 정보기관이 헌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스파이 양성기관인 육군나카노학교陸軍中野學校나 동남아 지역 등에서 스파이전을 벌이기 위해 조직된 몇몇 특무기관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실적은 없었고 그 활동도 대체로 특정지역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러일전쟁 때부터 태평양전쟁 때까지 정보기관으로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 조직은 역시 헌병이었습니다. 이처럼 헌병은 경찰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국가안보도 수호하는 등 굉장히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아울러 헌병은 일본 육군이 식민지와 점령지를 지배하는 과정에서도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헌병은 이론적으로는 광범위한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 본국에서는 그 권한을 상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육군이 대만, 조선, 만주 등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점차 헌병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고, 그렇게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이윽고 전시체제하에서는 일본 본국에서도 헌병이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조선은 헌병이 치안을 장악하는 헌병경찰제도를 본격적으로 적용하고 강화하는 실험장의 역할을 했던 곳이었습니다. (이승희, 「제국의 헌병,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다」, 541~542쪽.)
(...) 이토는 부임 전부터 당당하게 군부를 향해서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에 대한 지휘권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무리 통감이라고 하더라도, 문관이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는 것은 일본 육군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습니다. 만약 식민지에서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무관이 아닌 문관에게 내어주면, 이것이 하나의 전례가 되어 장차 군부가 계속 문관에게 종속되어 버릴 가능성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일본 육군은 천황에 직례되어 있어, 군 통수권에 관한 명령은 오직 천황에게 귀속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통감도 천황에 직접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천황 앞에서는 육군과 통감이 대등한 지위에 있으며, 군 통수권에 속하는 지휘권을 문관 통감이 행사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육군은 이토의 요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더더군다나 조선에 파견되어 있던 하세가와 사령관은 자기가 차지해야 할 통감 자리가 이토에게 넘어가게 된 것에 대해서 개인적인 반발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이토가 조슈번 출신의 대선배이고 국가의 원로였지만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처럼 육군 측의 반발이 거세지자, 심기가 불편해진 이토는 군대의 지휘권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통감으로 부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토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천황이 직접 개입했습니다. 일본 제국의 헌법상 군대는 천황에게 직례되어 있으므로, 천황의 권한으로 국가 원로인 이토에게만 한정적으로 지휘권을 부여하는 것을 인정해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통수권을 지닌 천황까지 나서자, 군부도 어쩔 수 없이 이토에게만 한정한다는 조건을 달고 군대의 '지휘권'이 아닌 '사용권'을 내어주었습니다. 이 사용권은 통감이 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군대에 출병 등르 요구하면 군이 그렇나 요청에 대해 자체적으로 한 차례 검토를 한 후에 요청사항에 응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용권'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면서까지 문관에게 '지휘권'을 내어주기를 꺼렸던 것입니다. (이승희, 「제국의 헌병,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다」, 552~553쪽.)
이렇게 헌병은 1907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경찰권을 행사했습니다. 아직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기 이전이고 조선 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외국인 일본의 헌병이 조선의 민중들을 대상으로 경찰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한 일본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에서 내부 경무국장을 맡고 있떤 마쓰이 시게루松井茂였습니다. 마쓰이는 법학자 출신으로 영국법, 그중에서도 특히 경찰법을 연구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헌병의 권한이 보통경찰의 영역에까지 계속 확대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일본이 영국과 마찬가지로 어엿한 근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법치라고 하는 시스템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면, 그 법치 시스템이 위협받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라를 통치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치안 유지 업무는 문관이 통제하는 경찰에게 맡겨야지, 군사조직인 헌병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쓰이가 대한제국의 경무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토 통감의 헌병 확장 노력에도 불구하고 헌병과 경찰을 완전히 통합하는 헌병경찰제도는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10년, 일본 내각이 조선 병합을 본격화하는 '한국에 대한 시정 방침'을 각의 결정하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병합에 대비하기 위해 현역 군인이자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제3대 통감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문관과 무관으로 나뉘어 있었던 경찰 기구도 군 중심으로 일원화되어, 사실상 헌병이 지휘하는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결국 조선 경찰의 사무를 일본에 위탁한다는 형태로 경찰권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가게 되고, 육군대신이 통감으로 있는 통감부에서 '경찰관서 관제'를 공포하면서, 헌병사령관이 경무총감을, 헌병대장이 경무부장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대하던 마쓰이는 경무국장 자리에서 물러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헌병이 경찰을 지휘 감독하는 '헌병경찰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이 모델로 삼았던 프랑스식 헌병제도와 비교하더라도 헌병에게 훨씬 큰 권한을 부여한 것입니다. 이렇게 일본군 헌병이 조선의 경찰권을 완전히 장악해 경찰기구를 일원화한 지 두 달 만에,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해 버렸습니다.
(...)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이후, 헌병의 악명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특히 데라우치의 후임으로 한세가와가 제2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헌병을 앞세운 무단통치의 폐해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심지어 일본의 매스컴뿐 아니라 법학자까지도 비난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1919년, 드디어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으로 표출된 민중의 분노가 특히 집중된 대상이 바로 헌병경찰이었습니다. 그래서 헌병분견소와 주재소가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승희, 「제국의 헌병,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다」, 562~565쪽.)
『굶어죽은 영령들』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군은 '전사'보다도 '전병사戰病死'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전병사'는 전쟁터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죽은 것이 아니고, 병에 걸려서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용어는 청일전쟁 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청일전쟁 당시 죽은 일본군 병사 중 교전으로 인해 사망한 비율은 30퍼센트에 불과하고, 나머지 70퍼센트는 사실 배탈이 나서 죽었습니다. 요동, 만주 등으로 전개한 일본군 병사들이 현지에서 길어온 물을 마시고 이른바 물갈이라 부르는 배탈이 났는데, 설사가 멈추지 않아서 결국은 탈수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다고 합니다. (...) 청일전쟁에서 배탈로 수많은 병사를 잃은 일본은, 10년 뒤 러일전쟁 때에는 이를 교훈 삼아서 배탈에 잘 듣는 약을 만들어서 가져갑니다. 그 이름이 '러시아를 정벌하는 환약'이라는 뜻에서 '정로환征露丸'입니다. 이 약은 지금은 '정벌할 정' 자에서 '바를 정' 자로 바뀌었지만 발음은 똑같은 '정로환正露丸'으로 여전히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근대 일본에서는 전사와 함께 전병사 개념이 사용됩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진행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군인들은 무려 23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중에서 약 70퍼센트에 해당하는 150만 명은 전세가 이미 기울어진 1944년부터 1945년 8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사망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이 시기 군인들의 사망 원인 1위가 전사가 아닌 전병사, 그 중에서도 '아사餓死', 즉 굶어 죽었다는 것입니다. 젊은 청년을 징병해 전쟁터에 보내놓고 식량조차 제대로 공급하지 못해서 각종 질병이나 영양실조로 죽게 했으니, 이런 형편없는 병참 시스템을 가진 조직을 과연 군대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처럼 빈약한 병참 시스템을 가진 군대가 전쟁의 포로나 전장의 민간인들을 과연 어떻게 대했을까요? (...) (서민교, 「왜 전쟁에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616~617쪽.)
교정. 초판 1쇄
26쪽 밑에서 5줄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
83쪽 6줄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 (26쪽과 83쪽 표기 다름. 둘 다 맞는 표기라서 꼭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표기를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
54쪽 그림 캡션 : 756년 제작이 개시되어 752년 완성되었다 (도다이지 대불의 건립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설명이 약간씩 달라서 좀 헷갈린다. 도다이지 웹사이트에 따르면, 743년 조성 조칙 반포, 745년 조성 재개, 749년 대불 완성, 752년 대불전 완성, 의 순서인 것 같다. https://www.todaiji.or.jp/history/narajidai/)
92쪽 8줄 : 간누나카와미미노 미코토 -> 간누나카와미미노미코토 (다른 곳에서는 "미코토"를 붙여씀)
214쪽 밑에서1줄 : 기대승奇大升( 1527~1572) -> 기대승奇大升(1527~1572)
262쪽 그림 내 설명 : (두 차례 모두 "제1차"로 표기됨)
310쪽 3줄 : 성황 -> 성환
313쪽 위에서 3줄 : 2019 -> 2018
389쪽 그림 캡션 : 국립문서보관서 -> 미국 국립기록관리청 or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칼리지파크 소재 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는 한국에서 "미국 국립기록관리청" 혹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446쪽 1줄 : (문단 들여쓰기 삭제)
477쪽 밑에서6줄 : 어용 엘리트 지식으로 -> 어용 엘리트 지식인으로
561쪽 표2 : '헌병대' 글자를 가운데 정렬
561쪽 표2 : '경찰관서' 글자를 가운데 정렬
562쪽 표2 : 편안 -> 평안
616쪽 밑에서2줄 : 기른 물 -> 길어온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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