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본 인 블랙니스 (하워드 W. 프렌치, 책과함께, 2023.) 본문
빌 게이츠는 자신의 블로그인 게이츠 노트(http://www.gatesnote.com/)를 통해 종종 책을 추천하곤 합니다. 대중적 영향력도 그렇지만 골라주는 책도 대체로 다 재미있는 편이어서 저도 종종 들여다봅니다. 여기서 추천된 책은 거의 예외 없이 국내에도 곧장 번역되어 나오는데요, 『본 인 블랙니스』는 2023년에 휴가 추천 도서로 선정된 책입니다.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는 유럽 근대의 형성에서 아프리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이른바 '대항해시대'를 추동한 힘도 아시아와 아메리카보다는 아프리카에서부터 찾는 것이 더 옳다...는 정도로 책 내용을 정리합니다. 실제로 이 책은 그간 우리가 잘 몰랐던 아프리카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 풍성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컨대 카이로를 방문한 말리 제국 황제의 행렬이야말로 유럽인들로 하여금 대양으로 나서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은 그간 어디에서도 듣기 힘들었던 이야기죠. 이로부터 시작되는 이 책의 대항해시대 이야기는 대체로 아시아와의 교역이나 아메리카 '탐험' 정도로 정형화되어 있던 기존의 그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애초에 제가 가졌던 기대는 이미 상당히 충족되었습니다. (일단 여기서 합격점 들어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이런 정도의 요약은 너무 겸손한 정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책이 훨씬 더 도전적이고 논쟁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책은 근대 유럽이 거둔 거대한 성취가 기실 아프리카를 착취한 결과임을 줄곧 강조합니다. 별달리 새롭지 않은 내용 같지만, 몇 세기의 시간과 대륙 단위의 공간에 기반하여 역사를 논하는 빅히스토리에서 이런 정도로 근대 유럽의 지배와 착취를 지적하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총, 균, 쇠』 류의 지리결정론 정도에서 멈추는게 대부분이죠. 여러 차례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근대 유럽의 성취를 말하면서 지리결정론을 근거로 드는 것은 비겁한 변명이라고 봅니다. 근대 유럽의 성취가 지리적 조건 덕분에 우연히 얻어 걸린 것일 뿐이라는 지리결정론이나 백인의 문화적·인종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고약한 서구중심주의도 아닌, 근대 유럽의 성취는 가혹한 지배와 착취로 인한 것임을 잊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아프리카가 지배의 착취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프리카가 서구에 비해 뒤떨어져서가 아니라 오히려 풍요로웠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책은 말리 제국의 황제 만사 무사가 대규모 방문단을 끌고 카이로를 방문한 일을 매우 중요한 역사적 계기라고 평가합니다. 카이로를 방문한 만사 무사가 많은 노예를 부리고 아낌없이 황금을 써대는 모습을 통해 유럽은 아프리카가 얼마나 풍요로운 곳인지를 깨달았다는 거죠. 이를 계기로 유럽은 15세기에 이미 아프리카와 황금 및 노예 무역을 시작했고, 이후에는 설탕 플랜테이션까지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예 무역과 이에 기초한 설탕 플랜테이션은 아메리카에서도 그대로 이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이 그저 '유럽이 아프리카를 착취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무엇보다, 대규모 노동의 조직화·분업화는 노예 노동과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선취된 것이었다는 주장은 흥미롭습니다. 근대적 노동의 특징으로 꼽히는 분업화와 조직화 등은 흔히 산업혁명 이후 근대적인 공장노동을 통해 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만 유럽의 바깥에서 근대적 노동규율의 또다른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설명에는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네요.
이것 말고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상품화된 설탕이 공급되면서 유럽(특히 영국)인의 섭취 열량이 비약적으로 늘었고, 그 덕분에 노동 시간이 길어지고 강도가 높아졌으며, 그만큼 토지와 노동력도 '절약'되었고, 커피나 차 같은 음료의 보급에 기여하여 위생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끓인 물이 필요하니까!) 커피숍이 사회적 공론장으로 기능하며 정치적으로도 영향을 주었다는 (헉, 헉)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역사의 연쇄에 책장이 술술 넘어갑니다. 왜 아프리카에서만 노예 무역이 활성화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나, 아이티 혁명이 근대 정치에 끼친 영향력 같은 것도 마찬가지구요. 거시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미시적인 사실들의 연쇄를 설명하는 디테일까지 갖추기가 쉽지 않은데, 그 까다로운 걸 이 책이 해내는군요 ㅎㅎㅎ
이 여행의 또 다른 치명적 결과이자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은 무사가 노예를 과시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 초래한 문제이다. 무사가 금을 보란 듯이 뿌렸을 때처럼, 무사가 노예를 부리는 모습 역시 매 순간 주목을 받았고, 이를 통해 근동 지역에서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는 흑인 남녀 노예를 한없이 보급할 수 있는 원천으로 유명해졌다. 이런 소문은 이후 5세기반 동안 이 지역에 악령처럼 달라붙었다.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약 300만 명의 흑인 노예가 인신매매를 당해 사하라사막을 건넜거나 동아프리카를 거쳐 홍해와 인도양 지역으로 이송되었다. 그 외에도 100만 명이 세네감비아Senegambia(세네갈강과 감비아강 사이의 지역―옮긴이)와 어퍼기니Upper Guinea를 거쳐 아메리카로 이송되었다. 두 지역 모두 중세시대 대규모 사헬 지역 국가들의 영향 아래 있던 중심지였다. 이렇게 노예로 인구를 유출하는 일은 대부분 말리 제국 이후에 발생했고, 말리 이후 들어선 송하이 제국이 무너진 뒤에 더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송하이는 나이저강이 남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큰 강줄기 아래에 자리해 있으며 팀북투에서 강을 따라 260마일(약 418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고대 도시 중심지였던 가오에 기반을 둔 제국이다. 가나가 말리의 기세 앞에 무너졌던 것처럼 송하이는 1591년 사하라사막을 건너 침범해온 모로코에 패배했다. 만사 무사가 근동외교를 펼친 주된 이유는 바로 이런 사태가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송하이의 패배는 서아프리카 역사에서 큰 분기점이었다. (...) 송하이는 오늘날의 말리, 니제르Niger, 세네갈, 감비아, 기니, 라이베리아 지역의 대부분을 지배하며 아메바 형태의 지형을 차지한 거대 제국이었다. 이 제국의 몰락으로 서아프리카에서는 정치단위가 급속하게 파편화되었고, 작은 나라나 부족들의 흥망이 계속되면서 전쟁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런 만성적인 혼란과 분쟁 상태가 결국은 초기 대서양 노예무역의 한 배경이 되었다. (53~54쪽.)
이런 설명은 역사서술에서 상투적으로 반복되었다. 매우 자주 접하기 때문에 미리 프로그래밍된 설명 같은 인상을 주는데, 마치 기능키를 이용해서(복사, 붙여넣기를 하여―옮긴이) 쓴 역사서술 같다. 교과서마다 볼 수 있는 매우 단순한 설명이기 때문에 거역하기 어렵게 하는 힘을 갖고 있지만, 여기에는 한 줌의 진실도 없다. 진실의 모조품일 뿐이며, 전혀 진실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는 거의 거론되지 않는 '대항해시대'의 아주 초기 단계, 15세기가 시작되던 첫 수십 년, 포르투갈인이 서아프리카 남쪽으로 조금씩 경계를 넓혀 가고 무어인의 땅을 넘어 흑인의 세계로 진출하던 시대를 유럽인이 아프리카 주변을 항해하면서 직물원단을 입찰하던 시대 정도로 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대륙은 걸림돌로 제시되고, 아프리카 무역은 부차적인 것으로 잠시 언급될 뿐이다. 이런 연출 속에서, 1488년 디아스가 희망봉에 도달한 뒤, 아프리카는 대체로 이야기에서 갑자기 뒤로 밀려나거나 완전히 사라진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실제로 아시아로 가는 항로의 개척에 그렇게 열심히 집착했다면, 디아스의 과업 이후 왜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바스쿠 다 가마가 디아스의 행로를 따라 항해하도록 임명을 받고 캘커타까지 가도록 지원을 받았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61쪽.)
일찍이 1440년대에 노예제에 관련해 발생했던 포르투갈인과 아프리카인의 접촉은 모두 해변에서 펼친 기습공격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는 약탈을 일삼는 무사세력에 기초해 수립되었다. 그 나라의 패기만만한 팽창 계획의 핵심에는, 전쟁에는 항상 보상이 따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중요하게 자리해 있었다. 엔히크는 비용을 많이 들여서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하며 황금을 찾았지만, 금은 거의 거두어들이지 못했고, 황금 공급망에 대한 통제권도 거의 확보하지 못했다. 황금을 향한 탐험에 소모된비용이 점점 쌓이면서, 탐험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소득원을 찾아야 했다. 도식적으로 간단히 설명하면, 황금 때문에 포르투갈은 노예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노예는 수익성이 높은 새로운 산업인 설탕 산업의 팽창을 추동했다. 설탕만큼 세계를 바꾸어놓은 생산품은 역사상 거의 엎으며, 설탕 생산 과정에서 역사상 기록적인 인적 피해를 낳은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1440년대는 탐험의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소강상태로 보이지만, 포르투갈의 황금 탐험에서도 중요한 일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베리아반도인들에게서 제국주의에 대한 정치적 구상이 싹트고, 이후 수백 년 동안 대서양 세계에서 형성되어갈 인종에 대한 사고방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이 시기가 의미 없지 않고, 오히려 상당히 중요한 시기였다. (...) 1441년 한 원정대의 지도자였던 곤살베스Antào Gonçalves는 그가 무어인이라고 지칭한, 낙타 한 마리와 걷고 있던 한 사람과 작은 싸움을 벌였다가, 해 질 녙에 같은 장소로 되돌어왔다. 그곳에서 곤살베스는 한 여성을 포획하고는, 그 여성을 "검은 무어인 여성"이라고 묘사했다. 일부에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여성을 어두운 피부색의 아프리카인에게 집중된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의 형성과정에서 등장한 최초의 사례 혹은 첫 번째 희생자였다고 보고 있다. 이는 그녀가 아메리카로 이송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 이 사례가 중요한 것은 그녀의 인종에 특별한 의미를 덧붙였기 때문이다. 인종은 유럽인 사이에서 노예화의 적격성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이는 갈수록 중시되었다.
(...) 그리고 독자들 모두 잘 알고 있듯이 훨씬 더 수익성 높은 아프리카인 포획이 곧 시작되었다.
(...)
주라라는 같은 인류가 멀리서 잡혀와 긴 항해 끝에 노예로 팔려가는 고난을 지켜보는 경험이 가져다준 감정적 고통을 계속해서 더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
그러나 비슷한 부분에서, 그는 3년 전 곤살베스가 '검은 무어인 여성'을 잡으면서 그리기 시작한 차별선에 굵게 덧칠을 했다. 그는 배에서 갓 내린 포로들을 보며, "놀라운 광경"이라고 했다. "일부는 백인에 잘생기고 몸매도 좋고 꽤 괜찮은 편이다. 좀 별로인 이들은 피부색이 표범을 닮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에티오피아인처럼 검고, 얼굴도 몸도 흉하다. 마치 남반구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유럽인의 첫 탐사 대상이 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향한 낙인이 144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흑인은 유난히 비천하며 문명이 선사하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피부색으로 돌렸다. (...) 흑인을 노예로 징발하는 것을 정당화하고자 포르투갈인은 일찍부터 위의 두 가지 논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이후 십여 년 동안 이 지역에서 강한 국력의 아프리카 사회들과 조우하면서, 그곳으로 처음 진출한 유럽인은 그런 관점들을 누그러뜨려야 했을 것이다. 먼 타국에서 현실적인 힘의 한계를 인정해야 했고, 최소한 임시로라도 노예제와 관련해서는 지역 법을 따라야 했다. (96~100쪽.)
1480년대에 아프리카에서 마침내 금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포르투갈은 아시아로 가는 길을 찾는다는 야심찬 모험을 사실상 중단했다. 오랫동안 '대항해시대'에 유럽인의 팽창 동기는 아시아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라고 설명되어왔다. 이것이 표준화된 설명으로 선택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교황으로부터 아프리카 대부분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은 포르투갈이 가장 서두른 것은 아프리카의 금을 계속 지켜내는 일이었다. 엘미나에 교역을 위한 성채를 세운 것이 그 증거이다. 또한 포르투갈이 그곳과의 교역을 위해 정성을 쏟아 다량으로 만들어낸 공급 상품과 방어를 위한 군수품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황금해안을 벗어나서도 포르투갈의 주된 관심은 아프리카에서 다른 황금 공급 지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에는 금속이 풍부하다고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은 결국 양이 한정된 상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포르투갈은 팀북투까지 사절단을 파견했다. 세네감비아에서 강 상류 쪽으로 200마일(약 322킬로미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길이었다. 이렇게 한 것은 사헬에서 오는 황금 시장을 독점하겠다는 희망을 여전히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인도로 가는 길을 여는 것이 15세기 말 포르투갈의 최우선 목표였다면, 1491년 중앙아프리카에 있는 콩고 왕국으로 또 다른 본격적인 외교사절단을 파견하는 데 그렇게 많은 힘과 노력을 쏟은 것은 아주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일이 된다. 이는 사제와 예술가가 대거 참여한 프로젝트였고, 엘미나보다 더 큰 규모로 경제적 유대를 수립하고자 파견된 것이었다. 콩고는 포르투갈이 엘미나에서 교역하면서 접했던 작은 왕국들보다 훨씬 크고 더 권위 있는 정치체였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이곳과의 교류를 통해 막대한 상업적 수익을 왕실 도점으로 금방 거두어들일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이에 비해, 인도로 혹은 남아프리카로 가는 것은 더 위험한 투기로 보였다.
앞서 본 것처럼, 1488년 디아스가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이래 거의 9년 동안 포르투갈은 이 사업을 이어가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얻는 수익이 이례적으로 높았던 것이다. 게다가 리스본이 마침내 디아스 탐험의 후속작업을 시작했을 때, 선발된 선장은 이 새로운 해양의 시대를 헤쳐 나온 경험과 업적이 있는 노력한 인물이 아니었다. 책임자의 지위는 왕실이 그 사업에 부여하는 비중을 반영하기 마련인데, 바스쿠 다 가마는 궁정의 하급관리였다. (137~138쪽.)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의 황금을 발견한 것은 대단한 업적이었지만, 이후 계속 이어졌던 극적인 성취들 중 첫 번째 쾌거일 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황금무역은 더 수익성 높은 새로운 아프리카인 노예무역으로 대체되었고, 이후에는 아프리카 대륙과 인접한 섬들에서 포르투갈인의 설탕 생산 호황이 이를 대체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설탕 호황은 훨씬 더 큰 국면으로 들어갔고, 정말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된다. 이 설탕 생산에는 오로지 아프리카인 노예 노동력만 이용되었는데, 이런 방식의 생산은 작은 섬 상투메에서 시작되었다. 고메스의 선원들이 1471년 상투메섬을 발견했다. 그들이 콰메나 안사와 회합을 가진 뒤였다. 이후 1485년 이 섬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고, 큰 소득을 올리는 실험장으로 만들어져 훗날 브라질의 플랜테이션 농업에 도움이 되었다. 어떻게 계산을 해도, 이 모든 것은, 에스파냐가 아메리카에서 얻은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 횡재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포르투갈이 에스파냐보다 시간상 조금 앞서 있었다. 그러나 장차 유럽에 이런 행운이 떨어지게 만든 핵심 회전축은 상조르즈다미나 성채와 이곳에서 나온 풍부한 황금이었다. (...) (141~142쪽.)
(...) 설탕 생산에 기초한 근대적 플랜테이션이 어느 정도 확고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상투메섬에서였다. 이 섬의 대농장주는 마데이라 혹은 카나리아제도에서 사탕수수 재배자가 했던 새로운 시도들을 거의 그대로 따랐지만, 거기에 마지막으로 몇 가지 세부사항을 덧붙였다. 상투메섬 플랜테이션들은 다은 섬들에 비해 규모가 훨씬 컸고, 기본적으로 더 산업화되었다. 상투메섬에서 이룬 가장 중요한 혁신은 그곳에서 강제로 일하게 된 인간의 삶에 미친 영향, 그리고 향후 500년 동안 지구적 차원의 경제, 사회, 지정학을 형성하는 데 미친 영향, 이렇게 두 가지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여기서 제일 눈에 띄는 것은 해외 시장에 수출할 농작물 가공 생산에서 완전히 인종화된 노예제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상투메섬의 플랜테이션은 흑인 아프리카인 노예 노동력을 폭력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기획되었고, 오로지 폭력적 지배를 통해서 운영되었다. 이는 근대성과 떼어놓을 수 없는 살인기제임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이 모델은 상투메의 항구를 통해 곧 신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이 모델에는 온갖 그로테스크하고 무자비한 것들이 내재해 있었다. (160~161쪽.)
선주민 노동력을 길들이는 일이 현실에서 한계에 직면하자, 포르투갈인은 인디언을 아프리카인으로 대치하는 것을 고려했다. 아프리카인 노예 수백만 명이 아메리카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이후 이어진 역사가 우리도 잘 아는 그대로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아프리카인이 오지 않았다면, 신세계 어느 곳도 그렇게 활성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번창한 식민지들이 없었다면, 유럽의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 그리고 사실 유럽 전체가 이렇게까지 부유하고 강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부와 권력은 아메리카 전역에 흩어져 점점 커지고 있던 유럽인 디아스포라들과 결함되어 있었다. 그런 부와 권력이 없었다면, 애매하기는 하지만 불가피한 용어인 '서구the West'에 무엇이 남았겠는가? 현재가 주는 무게가 워낙 무겁기 때문에 이를 상상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이렇게 맞물려 있는 일련의 발전들이 없었다면, 유럽은 지리적·문명적으로 막다른 길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삼아 신세계를 살 만하고 수익을 내는 곳으로 만들어 장악하지 못했다고 해도, 유럽이 아시아와 이슬람 세계에 있는 앞서가는 세계문명의 중심지들 뒤로 계속 뒤처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해볼 만한 여지는 거의 없다. (232~233쪽.)
(...) 19세기 초, 바베이도스섬의 한 플랜테이션을 관찰한 이에 따르면, "사탕수수를 심기 위해 구멍을 파는 흑인들이 호미를 들고 재빠르게 집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이 강하게 압박을 당하며 빠르게 이동할 때에는 밀집대형을 한 보병대처럼 무서워 보였다. ... 그런 격렬한 노동이 장시간 계속되었다. 그런 일을 계속 반복적으로 하면서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놀라웠다." 전문화를 강조하고 시간을 크게 고려하는 작업 조정과 같은 경영 기술들은 근대의 조립라인을 예언하는 사례였다. 이런 경영기법은 밭에서만이 아니라, 제당소에서도 적극적으로 구현되었다.
(...)
이러한 장면은 산업화가 어떻게 처음 발생했는지에 대해 우리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을 재고하게 한다. 표준적인 역사서술은 산업화의 기원을 영국의 랭커셔 지역에서 찾는다. 그곳에서 투자자이자 기업가였던 이들이 각자의 집에서 베틀을 갖고 일하던 사람들에게 임금을 주어 자신들의 회사를 위해 직물을 생산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이 이른바 선대제 노동조직 방식이 큰 수익을 올렸고, 이에 더해 처음에는 수력, 이어서 증기 등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을 응용한 더 새롭고 더 큰 생산으로 점차 투자가 진행되었다.
역사학자가 이런 산업화 과정의 다른 뿌리를 찾아보기 위해 영국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카리브해에서 중요한 선구적 변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리고 이 시대 대규모로 통합된 제당소는 농장과 공장이 처음 합쳐졌던 세계였고 그 시대 가장 큰 기업의 일부이기도 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산업화에 대한 전통적 서사를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화로 이행하는 과정에 이 통합된 제당소가 특별히 기여한 점은 노동 분업, 전문화, 철저한 동시 진행 작업을 시작했다는 정도이다. 이 모든 것이 산업화의 특징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 (272~273쪽.)
《대분기》는 상품화된 설탕의 공급이 비약적으로 증대하면서 영국의 식단에 놀라운 발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영국인이 매일 먹는 식사의 칼로리가 극적으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큰 변화가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가능했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특히 바베이도스섬과 이를 따라한 카리브해의 영국령 설탕 섬들이 생산자로 큰 걸음을 내딛으면서 그런 변화가 시작되었다. 포메란츠의 가정에 따르면, 값싼 설탕을 통해 칼로리 섭취가 늘어나면서 영국의 초기 공장노동자의 노동 시간이 길어졌고 노동 강도가 높아졌다. 설탕이 없었다면, 영국은 새로운 칼로리를 제공할 식량을 얻기 위해 훨씬 더 큰 토지와 훨씬 더 많은 노동력을 투여해야 했을 것이다. 포메란츠보다 15년 앞서서, 인류학자 시드니 민츠는 《달콤함과 권력》에서 사탕수수와 그 부산물이 영국의 식습관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 민츠의 추정에 따르면, 1800년 영국의 칼로리 섭취에서 설탕의 비중은 2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19세기, 즉 역사적인 영국의 팽창이 있던 세기의 말로 가면, 이 수치가 14퍼센트까지 올라갔다. 이는 어떤 유럽 라이벌 나라보다 높은 수치였다. (...)
오늘날의 영양사라면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포메란츠의 주장처럼 이런 칼로리의 증대가 영국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값싼 설탕이 영국 식단으로 들어오면서 케이크, 타르트 등 과자류만 폭증했던 것은 아니다. 이는 커피처럼 카페인이 함유된 음료에도 길을 열어주었다. 커피 역시 아메리카 여러 곳에서 노예가 재배했다. (또다른 자극성 식품인 코코아도 마찬가지다.) 커피의 광풍에 이어 한 세기 뒤에는 영국에서 차가 국민 음료가 되었다. 물 공급이 비위생적인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많은 영국인이 당시까지 에일 맥주를 선호했다. 일하는 낮 시간에 에일 맥주를 마시기도 했는데, 이는 난동까지는 아니어도 무기력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설탕의 전성시대는 위생적인 음료에 기반을 둔 새로운 기민성의 시대를 열었다. 커피나 차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끓인 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위생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설탕이 미친 영향에 대해 포메란츠가 탐구하지 않고 남겨둔 또 다른 중요하고 놀라운 내용이 있다. (...) 사회 자체의 성격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바베이도스섬의 비약적 발전과 설탕혁명의 시대가 오늘날 시민 사회라고 부르는 영국의 발전과정에서 있었던 근본적 변화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뜨겁고 달고 활력을 주는 음료들을 구할 수 있었던 덕분에 최초의 커피숍이 등장했다. 1650년 옥스퍼드에서였다. 이는 곧 런던으로 빠르게 번져나가 그곳에서 여러 개의 커피숍이 문을 열었다. 이는 독일에서 막 발명된 매체인 신문이 빠르게 확립되는 데 일조했다. 커피숍 같은 모임장소와 신문처럼 정기적으로 인쇄된 정치 뉴스의 가용성이,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말한 근대의 공론장을 낳았다. 이는 계몽주의 시대에 나타났던 공공의 사안을 공유하면서 향상된 의식의 등장과 시민의 참여를 언급하는 멋진 방식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커피숍 같은 장소에서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와 신문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이 대등하게 한자리에 모여 공공의 사안을 놓고 비판적인 논의를 하는 일이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82~284쪽.)
(...) 왜 아프리카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기꺼이 노예무역에 내주었는가?
인신거래의 세부사항은 지역에 따라 꽤 다양했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일관된 원리들이 있다. 그중 첫 번째는 아프리카 사회 자체들에 영향을 주었던 가내 노예제 혹은 내부 노예제의 오랜 역사가 앞서 여럿 있었다는 점이다. 세계적으로 전근대 사회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는 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전쟁에서 패배한 라이벌 집단에서 노예를 잡아왔고 노예를 정치적 포상으로 여겼다. 분명한 경제적 목적으로 노예를 잡거나 구매하는 관행은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예를 들면, 이는 16세기 송하이 제국과 콩고 모두에서 볼 수 있었다. (...) 이는 황금해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노예는 장거리 무역의 짐꾼으로 이용되었다. 그들은 황금과 상아를 해안으로 운반했고, 수입품을 내륙으로 날랐다. 앞서 본 것처럼 서아프리카 서안에 서식하는 체체파리와 체체파리가 옮겼던 치명적인 트리파노소마 기생충 때문에 이 지역에는 짐을 나르는 가축이 없었다.
(...) 해안 지대에 살던 아프리카인은 유럽인이 가장 탐내는 것이 흑인의 몸이라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포로들을 경쟁 이웃국가에서 데려오는 한, 해안을 따라 작은 나라들로 갈라져 있던 사회들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포로를 판매하는 것에 대해 도덕적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 아프리카인이 내부적으로 어떤 결속력이나 공동체의식을 가졌을 것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오늘날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인 디아스포라의 구성원들이 널리 선전하며 공유하는 정체성 같은 것은 분명 없었다. (...) 대륙 간 장거리 무역과 연관성이 아주 빈약했던 중앙아프리카에도 노예제 관행이 있었고, 노예제와 관련된 상업 형태가 이미 존재했다. 이는 16세기에 유럽인의 노예에 대한 수요가 강력하게 등장했을 때 지역 시장들이 재빠르게 부응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해준다.
아프리카 사회들에서 노예제가 확산되어 있었던 것에 대해 여러 설명과 논쟁들이 발전해왔지만, 아직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오래된 한 설명에 따르면, 전근대 아프리카에서는 인구밀도는 아주 낮았지만 토지는 광대했는데, 이런 조건에서 지배자는 강한 중앙권력을 가진 큰 통치조직을 형성하기 힘들었다. 이는 특히 정기적으로 대량의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 아프리카와 같은 환경에서는 확대된 친족 네트워크에서 혹사당했거나 불만을 품게 된 구성원들이 쉽게 밖으로 빠져나가 다른 곳에서 나름의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지배자는 광대한 공간에서 억압적 수단을 이용해 권력을 행사하기가 힘들었다. 대신 지배자는 노예 등 외지인을 자신의 사회로 결합시키는 방법을 모색했다. (...)
학계의 또 다른 이들은 토지의 사적 소유 개념이 부족했거나 토지를 공유하는 관행이 여러 아프리카 사회에 있었는데, 이것이 인신매매를 부추겼다고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바로 '사람'이, 살아 있고 대체가능한 자본의 중요한 형태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노예가 유럽인과의 무역에서 자본으로 사용되었고, 이 패턴은 사람을 자본으로 보는 기존의 인식 때문에 좀 더 쉬워졌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보았다. (...)
물론 유럽인이 토지재산을 중시하는 뿌리 깊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고 해서, 신세계 유럽인 플랜테이션 사회들에서 아프리카인 노예를 대체가능한 자본 항목으로 취급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333~337쪽.)
(...)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중세 말 아프리카의 정치 지형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다양했다. 아프리카는 아주 작은 나라들로 가득했고 대부분이 단명했다. 이는 사회과학자들이 무국가상태stateless라고 말하는 다른 많은 사회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세 말 근대 초에 콩고에서, 그리고 그 남쪽에 있던 은동고에서, 그리고 현대의 말리와 나이지리아가 포괄하는 지역들뿐 아니라 서아프리카 해안 지대(가나, 세네감비아 등)에서부터 광활한 내륙에 이르기까지 여러 다른 지역들에서 볼 수 있었던 모습은 복합적이고 실질적이며 상당한 역량을 갖춘 나라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인이 오지 않았다면, 아프리카의 정치 지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그들은 언제 황금무역에, 그리고 언제 노예무역에 매진했겠는가? 여러 가능한 대안적 결과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중앙아프리카 서부 대부분의 지역에서 점진적인 정치적 통합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은 그리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통합은 다른 세계와 마찬가지로, 피 흘리는 정복 과정뿐 아니라 평화적 동맹과 점진적 합병에 기초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아프리카에 상대적 자율성을 개발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좀 더 주어졌다면, 이후 세계경제로 통합되기 위해 훨씬 잘 준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전환을 협상할 때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는 능력을 더 잘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나리오 아래에서, 우리는 베를린협약 이래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아프리카 대륙 전반을 짓누르고 있는 극심한 분열을 피할 수 있었을 아프리카를 상상해볼 수 있다. (...) (408~409쪽.)
데스론데스와 그의 동료들이 출발점에서 36마일(약 60킬로미터)을 행진한 후 뉴올리언스에 들이닥치면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조건이 전반적으로 자기들에게 불리하다는 점도 분명하게 알았다. 이기든 지든 간에, 그들의 봉기가 부분적으로는 후세에게 큰 충격을 전달하고 자유의 향기를 공기 중에 퍼뜨린다는 생각으로 그들은 힘을 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피를 많이 흘리고, 요란하게 소문을 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자유를 얻기 위해 흑인은 무엇이든 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역사가 그들을 기억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446~447쪽.)
(...) 아이티 혁명은 상당한 복잡성과 공포와 원대함을 모두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세계사적 사건이다. (...) 아이티 혁명은 유럽이 대서양 전역에 수립할 노예제를 종식시키고, 세계적 차원에서는 반식민주의를 촉발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신생 미국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표준 역사 교과과정에서 근대성의 탄생과 서구의 부상을 다룰 때, 전통적으로 제외시켜왔던 이야기들이다. (474쪽.)
교정. 1판 1쇄
301쪽 밑에서8줄 : 르클레르Charles Victor Emmanuel Leclerc
480쪽 밑에서10줄 : 르클레르Charles-Victor-Emmanuel Leclerc (301쪽과 480쪽 표기 다름)
487쪽 밑에서8줄 : 헨리 넬슨Henry Nelson
558쪽 4줄 : 헨리Henry (487쪽과 558쪽에 아들 이름 표기가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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