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20150508-20150511 몽골여행 1 본문
오징어엔 땅콩, 노래방엔 새우깡, 끝날 땐 비틀즈 렛잇비 하듯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짝들이 있는데, '징기스칸'의 이미지가 단단히 들러붙은 몽골이 딱 그렇지 않나 싶다. 하긴 징기스칸의 시대라는 것이 수천수만년의 몽골 역사 동안 딱 한 번 역대급 포텐이 터져서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의 영향을 받은 때였으니까 이만한 무게감도 아주 놀랍지는 않다. 징기스칸의 말발굽은, 작게는 결혼식 때 양 볼에 찍는 연지곤지에, 크게는 러시아라는 거대한 국가로 남았다.
그렇다고 '징기스칸'만으로 몽골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을 터이다. 징기스칸이 죽고 원조(元朝)가 중원(中原)에서 물러난 후에도 몽골인들은 여전히 몽골초원에서 자기들의 삶과 역사를 쌓아갔다. 몽골은 러시아에 이어 두번째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원조 좌파의 나라이자, 소련 붕괴 후 가장 먼저 '민주화'를 이룬 나라이기도 하다.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국부를 쌓고 있는 나라이자 유라시아의 중심에서 교통을 외치는 나라이기도 하다. 원자재 가격 폭락으로 울상이지만 과도한 대중(對中) 의존을 벗어나 러시아와 북한을 통해 동해 진출을 모색하고도 있다. 그러니까 '몽골'에서 '징기스칸'을 빼고 나도 남는 것이 적지 않은 셈이다.
불과 사흘 남짓 머무른 자의 서툰 인상이긴 하지만, 사실 울란바토르에서는 다른 도시만큼의 강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하노이 같은 오토바이 쓰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토처럼 잘 보존된 고졸함도 뵈지 않는다. 원자재 가격 폭락 때문인지 시내 곳곳에는 짓다 만 건물이 그득하고, 징기스칸 광장에는 할 일 없는 노인들이 한가로이 시간을 때우고 있다. 젊은이들이 이렇다할 일자리를 찾지 못해 외국에 나가서 몇 달 몇 년씩 일을 하고 돌아오는 것도 흔하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정체(停滯)는 뜀틀 앞 발구름판을 디디기 전 잠시 속도가 늦춰지는 것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냐는 물음에 딱히 대답할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 그 너른 초원 위에 놓인 한줄짜리 포장도로와, 또 끝없이 그어진 철로와,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근육형님 같은 것들을 보고 있으면 괜히 그런 생각이 든다. 저어기 저쪽으로 며칠 정도 가면 러시아요, 바이칼이요, 고비요, 중국이요 하는 말들을 듣고 있자면 이 크고 넓은 세상에서 이 땅이 가진 포텐, 그러니까 1,000년 전에 징기스칸이 역대급으로 터뜨렸던 그 포텐은 여전히 유효하지 않나 싶다.
심장도 중요하고 폐도 중요하고 간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또 중요한 것이 핏줄이다. 눈에도 잘 안 뵈는 혈전 한 조각이 사지를 마비시키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마 그때문이겠지. 몽골제국의 역사가 중요한 것이 단지 땅이 엄청 넓어서가 아니라 조각조각 쪼개져 있던 사람과 물자와 문화 사이를 잇는 케이블을 놓았기 때문이라면, 그 중요함은 여전히 퇴색하지 않은 것 같다. 단 두 개의 색으로 전세계를 칠할 수 있었던 20세기가 끝나고, 최소한 24색 크레파스 정도는 있어야 세계지도를 그릴 수 있는 시대가 됐으니까 말이다.
하늘만큼 넓어서 구름 그림자가 훤히 보이는 초원에 서면, 캐리어에 우겨 넣은 여행짐처럼 접히고 구겨져 있던 생각이 넓게 펴져서 초원에 평평하게 깔리는 듯한 느낌이 절로 든다. 집 떠나면 고생이란 생각은 여전하지만, 몇 가지를 더 보고 몇 사람을 더 만나고 몇 이야기를 더 하고 나니 내 생각이 담긴 상자가 아주 조금이나마 더 커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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