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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 푸른 역사, 20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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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 푸른 역사, 2016.)

Dog君 2017. 5. 15. 19:59


1-1.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공동체의 붕괴, 신자유주의로 인해 매일매일 강요되는 무한경쟁, 산업화로 인한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응?) 등등. 우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들과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수요가 점점 커지는 것은 아마도 이런 강퍅한 세상에서 잠깐이라도 인간답게 사는 법이 뭔지 알고 싶은 우리들의 몸부림 아닐랑가. 인문학, 특히 역사학을 강조하는 건 뭐랄까... 이제는 그냥 하나의 트렌드가 된 것도 같다. 빌 게이츠는 매년 여름휴가 때마다 역사책을 읽는다고 지 블로그에 자랑질을 했고, YES24 독자들은 2016년의 책으로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을 뽑았고, 마크 저커버그 역시 2015년 한 해 동안 어마무시한 역사책들을 읽었다고 자랑 페북질을 했다.


이런 책을 매 주 1권씩 읽었다고 한다. 페이스북 CEO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훠얼씬 더 한가한 것 같다.


1-2. 암튼간에...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역사역사역사역사역사역사역사...하다가 밥도 역사적으로 먹고 똥도 역사적으로 싸야 할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째 막상 역사학을 전공한다는 연구자들의 삶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역사 팔아먹고 사는 설민석도 잘 나가고 최진기도 잘 나가고 재레드 다이아몬드도 잘 나가는데 역사학자들의 삶은 대체 왜 그러냐...하고 내지르고 나면 뭔가 멈칫-하는 부분이 있다. 설민석도, 최진기도, 재레드 다이아몬드도, 그러고 보니 역사학자 아니구나... (뭐지 이건)


1-3. '역사'는 하나이지만, 학문으로서의 '역사'와 대중이 소비하는 '역사'의 간극은 꽤 크다. 역사학의 텍스트가 엄격한 논증 과정과 엄밀한 문장, 잘 짜여진 구성을 추구하지만 세간에서 소비되는 텍스트가 어디 그렇다든? SNS나 팟캐스트가 생산하는 텍스트란 빠르게 생산해서 빠르게 소비하는 것이 핵심인데, 표현 하나 조사 하나도 신중히 쓰기 마련인 역사학자가 그런 문법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저자가 페이스북에 쓴 글을 모은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는 그에 대한 중요한 실험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1. 역사학자가 SNS에 글을 쓴다는 건 무슨 뜻일까. 논문과 달리 문장의 길이를 줄이고 말랑말랑하고 쉬운 표현을 사용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여기저기 '공유'가 잘 된다는 뜻일까. 그리고 그걸 또 책으로 낸다는 것은, 그건 또 기존의 책과 무슨 차이가 있게 되는 걸까.


2-2. 가장 큰 차이는 '나'를 드러낸다는 것 아닐까. 학문적 객관성이나 논리적 엄밀성 같은 것을 추구하는 학문적 글은, 어떤 면에서는 저자가 누구인가는 딱히 중요하지 않고, 저자의 개성도 그다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SNS는 다르다. 당장 글머리에 저자의 프로필이 붙어있고, 본문 밑에 저자는 카톡하듯 댓글을 단다. (멀리서 보면 카톡을 하는 건지 댓글을 다는지 어떻게 알아봐.)


3-1. E. H. 카는 역사를 두고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나야 뭐... 이제 겨우 10년 남짓 역사학의 언저리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놈이라 정확한 뜻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가 끊임없이 조응하며 서로를 규정한다는 뜻일 것 같다. 그말인즉슨 '과거(사실)'와 '현재(역사가)'가 정확히 일대일로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건데, 에이, 어디 그게 그렇게 될리가 없다. 미안하지만 '과거'와 '현재'가 대등하게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 같은 건 성립할 수 없다. 사실(事實)을 사실(史實)로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역사가의 몫이니까. 사료를 선택하는 것도 역사가요, 해석하는 것도 역사가요, 문장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역사가다. 역사란 애초부터 '현재(역사가)'가 일방적으로 이기는 박보장기였던 것이다.


3-2. 키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에서 봤던 것 같은데... 거기서는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개인이 누구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어차피 역사라는 것이 역사가 개인의 범주를 못 벗어나는 것이라면, 거꾸로 그 역사가가 누구인지, 그 역사가가 가진 주관성이 어떤 것인지를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4. 그래서 그런가, 이 책에는 유독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다. 학부부터 교수 생활까지의 학문 여정이라거나(이 책에서 가장 '화제를 모았던', 문제의 "비주류" 표현이 여기서 나온다 ㅎㅎㅎ), 중국사 전공자의 입장에서 본 한국사의 여러 쟁점들에 관한 소회(그리고 또 '화제를 모았던', 저자의 지도교수 윤내현 교수 이야기가 여기서 나온다...), 중국 답사를 다녀온 후 쓴 기행문(내가 가장 좋아하는 "역사꾼"은 여기서 나오고 ㅋㅋㅋ 기왕 말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역사꾼"이라는 표현은 사학과에서 제도적으로 살려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ㅋㅋㅋ)까지... 글을 쓴 사람과 글의 내용이 이렇게나 밀착된 역사책이 언제 또 있었나 싶다.


5-1. 역사를 전공한 입장에서 보면, 그 중에서도 새로운 글쓰기를 고민해야 하는 젊은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의 가치는 거기에 있다. 텍스트 생산의 중심이 SNS로 압도적으로 기울어진 이 시대에 역사학이 찾아야 할 새로운 글쓰기의 형태는 무엇일까. 그거야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E. H. 카도 모르겠지.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이 책은 가치 있다. 이 책이 그 '새로운 글쓰기'를 위한 또 하나의 실험 결과를 보여주는 것 같으니까.


5-2. 연구자의 입장에서 그 실험에 동참하고 싶은 동시에, 독자의 입장에서 이런 결과물을 계속 더 읽고 싶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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