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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오백리 물길여행 (권영란, 피플파워, 20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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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오백리 물길여행 (권영란, 피플파워, 2016.)

Dog君 2017. 5. 17. 16:05


1-1. 역사학에서 쓰는 개념 중에 '대문자 역사(History)'와 '소문자 역사(histories)'라는 게 있다. 영어시간에 배우기를,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고유명사는 첫 알파벳을 대문자로 쓰는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대문자 역사'라는 건 단일한 서사로 공식화되고 고유화된 역사적 경험을 의미하고, '소문자 역사'는 그런 공식화된 서사에 포함되지 않는 여러 개의 다양한 경험을 의미한다. ...라고 쓰고 나니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1-2. 좀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국사책에 나오는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에 끝난 전쟁이다. 이 사실은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국가에 의해 공인된 사실이다. 그래서 어디를 찾아봐도 한국전쟁은 딱 이렇게만, 단일한 서사로만 서술되어 있다. 이런걸 '대문자 역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대문자 역사'의 등장은 '국민국가'의 형성와 무관하지 않다. '국가' 내에 존재하는 여러 이질적인 존재를 균질한 '국민'으로 통합해 내는데 '국사(national history)'라는 단일한 경험체계만큼 좋은 것이 또 없으니까. 그런데 그게 과연 그렇기만 할까. 1950년 6월 25일 현재 경남 하동 어딘가에서 자그마한 땅뙤기 겨우 부쳐먹고 살았던 내 할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1950년 7월 말 어느 날 나타난 패잔병 무리로 시작되어, 그로부터 약 두 달 뒤에 쫓기듯 도망가는 인민군으로 끝난다. 전라도에 살았던 사람은 이거랑 또 좀 다를 것이고, 다른 동네 사람들의 경험도 또 다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공식화된 역사 서술 이외에 다양한 주체가 경험했던 다양한 '역사들'을 '소문자 역사'로 표현한다고 보면, 얼추 맞다.


1-3. 이렇게 국가 단위로 단일하게 정리된 '대문자 역사'로는 개별적인 역사경험이 갖는 세세한 결을 짚어낼 수 없다는 반성에서 '소문자 역사' 개념이 등장한다. 좀 전에 '대문자 역사'가 국민국가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대문자 역사'가 국민국가 그 중에서도 특히 수도를 중심으로 한 일부의 경험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역'이라는 단위는 '대문자 역사'가 미처 품어내지 못하는 다양한 경험을 담아낼 수 있는 소중한 돋보기 역할을 할 수 있다.


2. 강은 중요하다. 수천수만년간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인간에게 강은 그 자체로 생명줄이었다. 강에 얹혀서 농사도 짓고 밥도 먹고 세수도 하고 여름엔 물장구도 치면서 살았다. 그래서 강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그것에 얽혀 있었던 사람들의 삶을 더듬어본다는 의미이다. 남덕유산의 발원지부터 함안군의 낙동강 합수지점까지 이어지는 저자의 여정은 곧 남강을 끼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들을 살펴보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가, 이 책에는 남강에 기대어 수백년을 제각기 살았던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남강은 온전히 경남의 강입니다. 그 시작과 끝이 경상남도 행정구역 안에서 이뤄집니다. 경남 한양군 서상면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임천, 덕천강과 합류하고, 진주에서 잠시 북동으로 물길을 바꾸는 듯하다가 의령군 기강나루와 함안군 대산면 장포에서 낙동강과 합류합니다. 경남 함양·산청·진주·함안·의령 등 5개 시·군에 걸쳐 있는데 지역마다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함양지역에서는 남계천과 금호강 산청지역에서는 경호강이라 하는 게 그것입니다. 약 189km로 '남강 오백리 물길'이라고도 합니다.

(중략)

  남강은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한 소외된 강입니다. 경남사람들에게 조차 묻히고 잊혀진 강입니다. <남강오백리 물길여행>을 시작으로 경남 사람들의 삶 속에 남강이 한 발, 바짝 당겨질 수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남강의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남강을 기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p. 13.)


3. 이 책은, 지역에 소재한 출판사에서 지역 토박이인 저자가 지역의 콘텐츠를 가지고 쓴 책이다. 그래서 그런가, 소설책 아니고서는 좀체 보기 어려웠던 사투리들이 이 책에서는 천지삐까리로 쏟아져 나오는데, 몇 가지만 옮기면 이렇다.


  "지금도 기억나는 긴데 우리 어렸을 때니 해방 전인가보이. 그때는 두둑다리가 아니라 외나무다리 두 개를 걸쳐놓았던 기라요. 한 개는 가는 사람, 한 개는 오는 사람... 근데 하루는 초상이 나서 생이(상여)가 강을 건너 가는데 이기 낭패인기라. 상두꾼들이 앞뒤 양쪽에서 잡잖은가벼. 난중에는 생이를 지고 양쪽 사람이 외나무 하나씩 걸어 나갔다아이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우찌 건너가나 구갱혔다아이요." (p. 89.)


  노인은 계속 못 알아먹겠다는 표정으로 끔벅거린다.

  "찬새미라 카던데. 찬새미요!"

  그러자 옆 양파밭에서 일하던 아지매가 소리를 지른다.

  "요래 상구 가가지고 조래 사아앙구 올라가모는 된다카이." (pp. 190~191.)


4. 내가 자꾸 이렇게 '세세한 결'이니 사투리 같은 걸 이야기하는 건, 그게 엄청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역사'를 말하지만, 그 역사란 대체 누구의 경험이고, 우리가 그것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건 또 무엇일까. '민족'이나 '국가' 단위로 추상화된 역사 속에서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은 대체 어디에 반영되어 있을까.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 여전히 풀리지 않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가 어쩌면 이 책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형평운동가 백촌(柏村) 강상호(姜相鎬, 1887~1957) 선생은 현재 진주성 앞 남강을 따라 줄지은 장어거리쯤이 집이었다. 소년운동가 강영호(姜英鎬, 1896~1950) 선생의 집이기도 하다. 이들 형제는 진주의 부호였던 강재순의 아들들이다. 아버지 강재순은 3·1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따로 활자화해서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강상호 선생은 맏이로 일제시대 백정들의 신분 해방운동이었던 형평운동을 이끌었다. 강영호 선생은 아동문학가이자 진주 소년운동을 주도했다. 이 형제들은 모두 인ㄱ나의 존엄성을 지키고 차별받는 이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p. 284.)


5. 강상호와 강영호 형제도 그렇다. 최초의 백정해방운동이었던 형평운동을 이끌면서도 가능한 제도권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던 강상호는 식민지시기의 항일운동의 외연과 내포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다. 방정환보다 몇 년 먼저 어린이를 위한 기념일을 만들었던 강영호는 지역의 사회운동이 어떻게 국가 단위의 사회운동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사례들이야 널리고 널렸다, 아직 한국의 역사연구는 서울 중심을 벗어나지 못한 형편이고, 지역사가 정년퇴임 이후의 소일거리 정도에 멈춰있는 곳도 아직 왕왕 있는 편인걸 생각하면, 이런 작업들은 여전히 더 많이 필요하고, 나는 거기에 목말라 있다. 그러니까 이런 책을 펴낸 출판사와 저자에게 땡큐베리머치 라는 것이 오늘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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