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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달리다 (배순탁, 북라이프, 20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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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달리다 (배순탁, 북라이프, 2014.)

Dog君 2017. 5. 21. 21:35


1. 라디오 녹음을 하러 갈 때마다 주현이 형은 나에게 책과 CD를 얼마씩 안긴다. 이 책도 그 중 하나. 음악을 듣는 폭은 무척이나 좁지만 나도 분명 90년대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 건 맞으니까. 그래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2. 몇몇 명사를 바꿔치기하면, 여기서 말하는 내용 중 대부분은 여전히 나와 일치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의 가사가 방황과 고뇌로 점철된 사춘기를 관통하고 있던 나에게 그 무엇보다 큰 울림을 줬다는 것이다. 비장미로 넘치는 다음의 노랫말들이 나의 사춘기를 음악으로 대변해줬다고 하면 과장일까.

(중략)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고등학생에게 이 얼마나 매혹적인 표현이요, 문장이었던가 말이다. 누군가는 허세 쩐다며 거부감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대책 없는 낭만주의를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나라기보다는 ‘우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와 같은 ‘90년대의 아이들’의 학창 시절은 신해철의 정서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했으니까 말이다. 이 관계의 실재(實在)를 비극적으로 증명한 것이 신해철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끝도 없이 늘어선 팬들의 조문 행렬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pp. 26~27.)


(전략) 뭐 그리 어렵게 음악을 하느냐고, 좀 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좋지 않겠느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2000년대 이후 한국대중음악계에 만연하기 시작한 가장 큰 질병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의마저 애매모호한 대중이라는 존재를 절대선으로 상정하고 음악을 창작하는, 아니 거의 쏟아내다시피 하는 풍토.

  자본이라는 포악한 괴물에 의해 한국대중음악계는 잠식당한지 오래다. 그중에서도 대중이라는 이름은 자본주의가 가장 편하게 쓰곤 하는 위선의 가면이다. 이게 무조건 그르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대중을 위하여’라는 캐치프레이즈 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시즘적 슈퍼 갑질을 보라. (p. 42.)


  부족한 그들을 단련해준 건 8할이 ‘라이브’였다. 그러면서 로큰롤 무대에 대한 감각을 키워나갔다. 사람들은 보통 감각을 천부적인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감각을 만드는 건 반복된 훈련이다. 처음엔 이렇게 해볼까 했던 것을 반복적으로 훈련하면, 특정 상황이 됐을 때 감각은 본능적으로 터져나온다. 생각은 창의적으로 하되 반복, 또 반복하는 것. 크라잉 넛은 아마도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라이브 횟수에 있어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밴드일 것이다. (p. 68.)


  이 글을 쓰고 있는 2014년의 <바람이 분다>와 2005년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것 같았을 때 들었던 <바람이 분다>는 말 그대로 천양지차다.

  낭만적인 음악이었다면 섣부른 낙관주의를 미끼로 유혹했을 것이다. “곧 누군가 좋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이소라는 거짓 위로하지 않는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고 내면의 격랑을, 그 엇갈림과 사무침을, 자신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진실을 고통스럽게 토해낸다.

  장밋빛 미래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괴로운 현재만이 도돌이표처럼 중첩되어 쌓여갈 뿐이다. 그야말로 진짜 이별인 것이다. 자전하는 슬픔 속에서 이소라는 이별과의 전면전(全面戰)을 불사한다. 이 와중에 희망 따위 존재할 리 없다.

  낭만의 한계를 넘고 서정에 육박한 뒤, 이소라의 음악이 숭고함에까지 도달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희망은 언제 숭고해지는가. 희망, 희망이 없을 때 가장 숭고해진다. 소중한 의미를 지녔던 무언가가 점점 색이 바래고 소멸되어 갈 때 희망은 그와 반비례하며 간절해진다. 흥미로운 사실은 적어도 이소라의 노래 속 화자의 경우, 고통스러운 현재를 호소할 때에도 그것이 치유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봉니다는 점이다. 아니, 더 나아가 그들은 적극적으로 그 증상을 ‘향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사랑과 이별이라는 과정 속에서 우리 모두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기에 차라리 이별 뒤의 증상을 향유하면서 조금이라도 떳떳해지기를 욕망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마치 좌심방과 우심방처럼 서로의 슬하에서 왕복 달리기를 할 뿐이다. 사랑인가 싶어 기뻤더니, 차라리 헤어지고 죽어버리자는 심정의 이별이 성큼 찾아와 있다. 여기가 바로 지옥이다. (pp. 112~113.)


  ‘월간 윤종신’이 큰 반응은 아니지만, 매달 꾸준히 챙기는 팬들이 늘어가면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바로 그가 음악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음악의 생활화’라는 그의 언급이 다시 호명되어야 한다. 고통은 창작의 중요한 원천이지만 그것이 생활화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고통을 동력으로 음악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세상을 일찍 떠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불멸의 천재’라는 수식을 얻은 것을 생각해보라. 역으로 긴 인생에서 음악을 생활화하려면, 그것을 즐길 줄 아는 태도가 필수적일 것이다.

  윤종신은 “음악은 나에게 놀이”라는 표현으로 이를 압축한다.

  예능이든 음악이든, 그에게는 그저 하나의 놀이터인 것이다. 사람들은 쉽게 타인에게 즐기라고 충고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대개의 사람들은 음악이라는 것을 특수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특별한 행위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을 음악(가)에 대한 오랜 선입견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면, 그는 어떤 의미에서 자그마한 혁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p. 231~232.)


  그날 이후로 방송을 제외하면 <No Surprises>를 부러 듣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라디오헤드의 <No Surprises>를 다시, 겨우 들어냈다. ‘들었다’가 아니라 겨우 들어’냈’다. 문법에 맞지는 않지만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 다들 하나씩은 있지 않은가.

  소중한 의미를 지녔던 무언가가 점점 색이 바래고 소멸되어 가는 게 무서워서, 생기발랄한 시대를 함께했는데 그것이 잊혀지는 게 두려워서, 아니, 사실은 그렇게 잊어가는 내 자신을 바라보는 게 싫어서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는 것.

  그런 사람, 그런 음악, 다들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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