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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법정에 선 식민지 조선 여성들 (소현숙, 역사비평사, 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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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법정에 선 식민지 조선 여성들 (소현숙, 역사비평사, 2017.)

Dog君 2017. 8. 25. 11:00



1-1.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냥 어려운 것도 아니고 졸라리 어렵다. 사람들 하는 말 보면 되게 쉬울 것 같은데, 우리 각자가 열심히 싸우면 금방이라도 세상이 뒤집어질 것 같은데, 그게 참 어렵다. (약간 유식해 보이는 효과를 위해서 미셸 푸코를 끌어 들이자면) 푸코가 말하길, 우리 각자의 신체가 권력이 작용하는 거점이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우리 각자가 기성질서에 각자 몫만큼만 개기면 당장 세상이 바뀔 것도 같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아니 왜.


1-2. 바깥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벌이 뭐 같고 가부장제도 뭐 같고 돈만 아는 세상도 뭐 같은데, 그렇다고 그 질서를 박차고 바깥으로 나가면 훨씬 더 크게 망할 수 있거든, 그러니까 바깥으로 쉽게 못 나가는 거다. 학벌주의가 싫다고 당장 학교 때려치고 나가면 뭐 대단한 수라도 있는감. 뉴스나 SNS에 보면 학벌에 구애 안 받고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가 간혹 나오기는 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 이야기고, 내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그렇게 되겠나. 당장 멀쩡한 직장 다니면서 근근이 입에 풀칠하며 살던 사람이 돈만 아는 세상 엿먹으랍시고 직장 때려치는 거 상상할 수 있겠니? 그거 어지간한 각오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낸다. 당장 이번 달 공과금은 뭘로 내며, 학자금 상환은 우짤라고.


2. 나는 “이혼 법정에 선 식민지 조선 여성들”을, 질서를 깨고 바깥으로 나가는/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었다. (식민지 시기 전공도 아니고, 젠더 문제에 대해서 특별히 고민을 많이 해 본 것도 아닌지라 학술적으로 접근할 깜냥은 못 되고… ㅠㅠ) 이 책은 식민지 시기의 이혼 소송을, 가부장제 하에서 억눌려 있던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발화하고 공유하며 더 나아가 자신의 존엄을 위해 적극적으로 분투하는 과정으로 본다. 이혼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1910년대에 이혼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것이나 이혼의 사유로 규정된 "동거할 수 없을만한 학대와 모욕"의 의미가 무수한 이혼 소송을 거치며 점차 확대되어 간 것 등이 죄다 이름 모를 여성들의 분투가 있기에 가능한 거였다.


3. 그러면 그 분투는, 변화의 최첨단에 있었던 (이른바) ‘신여성’만의 것이었을까. 뭔가를 바꾸기 위해 싸우는 거, 최첨단에 있는 소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이 책의 중요한 포인트다. 흔하디 흔한 일상을 살아가던 흔하디 흔한 (이른바) ‘구여성’ 역시 제 삶의 존엄을 위해 이혼 소송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살짝 빌려서 표현하자면 '1882년생 김지영들의 이혼 법정 분투기'라고나 할까.


4. 이들의 분투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혼 소송 자체의 부담감과 이혼 후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삶의 무게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이혼 소송 비용이 보통의 도시노동자 월급의 2배 정도였다고 하니 이미 그것부터가 부담이었을 것이고, 소송에서 이긴다 해도 양육권이나 재산권을 행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혼 후에는 주변의(심지어 자기 가족까지 포함해서!) 냉대와 질시를 감내해가며 제 삶을 건사해야 했을 것이다. 자기 존엄을 지키기 위해 가부장제 질서를 깨고 그 바깥으로 나간 댓가는 결코 녹록치 않은 것이었다.


5. 우리가 그 ‘1882년생 김지영’들을 잊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들이 싸워서 얻어낸 딱 그만큼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책에서는 법에 규정된 "동거할 수 없을만한 학대와 모욕”에 대한 해석의 범위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점차 확대되는 과정을 꽤 길게 서술한다. 그건 그냥 이혼의 양상이 변화하는 것 정도로 그치는게 아니라, 그간 가정 내의 문제로 용인되었던 가정 폭력과 학대가 마침내 문제시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뿌리뽑혔다”라고까지는 못하겠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권리와 평등이 (물론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나마 이 정도라도 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 ‘1882년생 김지영’들이 체제의 안과 밖을 오가며 삶의 무게를 감내하고 싸운 결과이다.


6. 이 책은 이혼 문제만 다루고 있지만, 이게 어디 이혼 문제에만 해당되겠나. 세상이 좀 더 나아지는 과정이 아마도 다 그럴 것이다. 우리 삶은 어떻게 해서 더 나아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가 이 책에 들어있다.


ps. 지금 이 순간에도 체제의 안과 밖을 오가며 분투 중인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1882년생 김지영’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 옆의 ‘김지영’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김지영’이 꼭 특정한 성을 의미하는 건 아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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