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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조건을 묻다 (터울, 숨쉬는책공장, 2015.)

Dog君 2018. 1. 28. 11:57


1. 이런저런 일 때문에 대학로에 있는 책방 이음에 갔다가 샀다. 근데 내가 이걸 여태 안 샀나? 설마... 샀는데 또 산 건가;;; (안돼...)


2. 나는 운이 아주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구성하는 여러 수많은 정체성은 대부분은 사회에서 용인가능한 것 내지는 사회적으로 메이저리티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꼬추 달고 태어난 것부터가 일단 먹고 들어가는 것이고, 출신 지역, 경제 수준, 직업, 학력 등등 대부분의 정체성이 딱히 내 발목을 잡은 적은 없다. 물론 당연히 마이너리티에 속하는 것도 있다. 십자수 같은 취미라거나 약간 부족한 남성성, 그리고 그보다는 좀 덜 부족한 사회성 같은 것은, 굳이 따지자면 메이저리티보다는 마이너리티에 아주 약간 더 가까워 보이며 어찌어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만큼 심각하지도 않다. 대부분의 정체성들이 사회적으로 ‘권장되는’ 메이저리티에 속하면서, 마이너한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 묶어둘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운 좋은 인생이 또 있을까. 비트코인 수익률이 어떻고 부동산 대박이 저떻고 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게이의 연애라고 해서 무언가 엄청 특별할 것은 없다. 게이의 연애 문제 안에는 게이 고유의 문제도 있지만, 사람이면 누구나 겪은 관계의 보편적 문제도 함께 끼어 있기 때문이다. 게이 스스로가 그 과정에 임하면서, 이 모든 곤경을 자신의 섹슈얼리티 탓으로 특권화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연애야말로 그런 분별의 감각을 예민하게 시험하는 리트머스 종이 같다는 생각도 든다. 연애 안에서 허우적대는 상태만큼 자기를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때도 드물기 때문이다.

  다만 동성애자들은 세상이 전반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 자신의 게이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자신의 삶 속에 끼워 넣고 살아야 할지를 더 깊이 고민할 부담이 있다. 이성애자들의 경우 사회가 주는 섹슈얼리티와 인생의 교범이 너무 많고 확고한 것이 문제라면, 동성애자들은 그런 게 너무 없는 것이 문제랄까. 우선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한 꺼풀 인정한 연후에 게이와 섹스, 게이와의 연애를 어떻게 삶 속에 번듯이 녹여낼까 하는, 좀처럼 퍼뜩 상상되지 않는 고민의 해답들을 만들어 가야 할 숙제가 게이들에겐 있다. 거기에 대해 누가 왈가왈부하든, 이 땅의 수많은 게이들은 지금도 그들의 일상 속에서 자기 나름의 해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pp. 29~30.)


3. 다른 말로 하면, 나는 그저 운이 좋을 뿐인 것이다. 단지 그 뿐이다. 그리고 그 좋은 운 덕분에 나 스스로에 대해 별달리 고민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별 문제 없다.


  망자를 둘러싼 온갖 망집에 시달렸다. 내가 눈감고 조금만 더 오래 사귀었더라면 그 아이가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아이가 게이 인간관계 문제로 그렇게 괴로워했을 때 내 지난날을 떠올리며 조금 더 상냥하게 말했더라면, 그가 좀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 스스로도, 내 과거들을 그렇게 살갑게 대우해 준 적이 없었다. 그건 그저 처음부터 그랬던 거였고 그런 줄로 알았고, 그냥 거기에 맞춰 살았을 뿐인 것이었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사람다움과 아름답게 상품화된 시장에서 적당히 살아남는 법 같은 요령들과 이 정도면 되었지 하고 체념했던 세상의 소외, 그 모든 것들이 일시에 무너지는 광경을 보았다. 내가 터무니없이 낮게 잡았던 인간다움의 기준과 세상에 대한 기대가, 그렇게 한 아이가 죽어 가도록 방조한 힘의 일부가 된 것이었다. (p. 54.)


  그러나 연애는 ‘논쟁 가능’해야 하는 것 또한 맞다. 섹슈얼리티가 온전히 개인과 취향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은, 현대가 누리고 있는 중요한 성취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같은 문제는 그저 “허리 아래”의 남사스런 이야기로, 영원토록 까발려 논의되지 않은 채 제 부조리를 불려 왔을 것이다. 섹슈얼리티가 온전히 개인과 취향에만 속할 문제라면, 가정폭력에서의 “둘만의 문제”라든가 성폭행 가해자의 “개도 즐겼다”는 논리 또한 그 틀 속에서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이렇게 문제를 ‘논쟁 불가능’한 사적 영역으로 고착시킬 때, 위와 같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걸 끌어내는 건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고, 따라서 현대의 섹슈얼리티는 쉬이 간섭하기 어려운, 너무나 논쟁하기 어려운 문제를 꺼내어 논쟁을 시도하는 어려운 과제를 지고 있다.

  이는 연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고, 더욱이 성소수자의 연애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서로 사랑하게 해 주세요”라는 한 동성애자 부부의 외침이 2013년에 어떤 반향과 ‘논쟁’을 일으켰는지, 관련 뉴스를 본 사람들이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헌데 이렇게 마땅히 누려야 할 것 같고, 나아가 성소수자의 존재 증명처럼 세상에 과시해야 할 것 같은 연애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낯설어하는 광경 또한 커뮤니티 안팎에서 심심찮게 마주한다. 물론 끝내는 “알아서들 할” 문제라는 데엔 동의하나, 그럼에도 이 연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논쟁’할 수 있는 부분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연애를 “알아서들 하”는 데 적잖이 장애가 되는 몇몇 것들에 대하여. (pp. 32~34.)



4. 동성애를 이해한다, 이들과 함께 하겠다, 하는 말은 감히 하지 못하지만, (위 사진과 같은) 활동가들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그 때문이다. 평소의 나처럼 고민 없고 흐리멍덩한 자세는, 내 몸뚱아리 하나 건사하는 데는 편할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아주 조금씩 티 안나게 갉아먹는 일이다. 자기 정체성을 내건 그들의 싸움 덕분에, 순전히 그들 덕분에, 나는 나를 둘러싼 (당연해보이는) 조건들을 의문시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무엇인지를 질문할 수 있게 되었다.


  작년의 동성 결혼식에 비혼주의자가 와서 축하할 수 있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날의 결혼식은 이성애자에게 법적·사회적으로 허락된 결혼을 동성애자에게도 허가해 달라는 외침이었지, 모든 동성애자들이 이렇게 ‘결혼’해서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외치려는 자리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날의 핵심은 동성애자에게 허용될 ‘결혼’의 평등권에 있었지, 사회 속에서 이미 존재하는 ‘결혼’에 따른 배제에 있지 않았습니다. 동성애자가 가족을 만들기 위해 꼭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혼을 ‘포함하여’ 동성애자 스스로가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사회에 당당히 요구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p. 159.)


  모든 운동의 시작, 가령 5·18 희생자의 ‘존재’,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 보도연맹 학살자의 ‘존재’가 그렇듯이, 동성애자 운동 역시 동성애자가 ‘여기 있음’을 외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엄연히 있는 것이 마치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되는 것만큼 잔혹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 시대의 집단적 침묵’이, 동성애자 운동의 시작과 함께 조금씩 베일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동성애가 비로소 꺼내어 ‘논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p. 172.)


  그(박원순-옮겨쓴이)의 말대로, 동성애를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데 있어 “사회적 합의”가 아직 부족한 것은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합의가 부족해서 저런 헌장이 통과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저런 명목적 헌장’이라도’ 통과된 이후에야 “합의”고 뭐고를 논할 수 있는 ‘조건’이 비로소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 빨갱이로 몰려 죽은 이들에 대한 복권과 해원에 전국민적 “합의”를 기다려야 했다면, 그들은 영영 아무런 세월도 얻지 못한 채 잊혀야 했을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든 말든, 대화의 장을 보다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 나아갈 것은 나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국가보안법 연구자로서 좌익 학살의 기억을 ‘논쟁’할 수 있는 장을 그토록 집요하게 만들려던 역사문제연구소의 발기인 박원순이, 어느 날 낯을 바꾸어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논하며 헌장을 무효로 만든 것에 사람들이 아연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중략)

  농성 3일차 밤부터 시청 로비의 전기가 간헐적으로 끊기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점거농성장의 신박한 레퍼토리가 여지없이 돌아왔습니다. 농성 2일차에 서울시 비서실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팅 시간을 잡아 줄 테니 연좌농성을 풀라”는 말을 전해 왔고, 이에 연좌농성을 통틀어 사회를 보던 김조광수 감독이 자신이 겪은 일화를 말해 주었습니다. 임모 씨(임종석-옮겨쓴이)가 부시장으로 있을 때 그도 똑같은 말을 했었고, 거기에 김조광수 감독은 “우리가 예전에 투쟁할 때 그런 소리를 과연 믿은 적이 있었느냐”고 반문했을 때, 임모 씨는 “그건 반민주세력이랑 싸웠을 때의 얘기고”라 답변했다고 합니다. (후략) (pp. 189~192.) (김조광수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83학번이고, 임종석은 같은 학교 무기재료공학과 86학번이다-옮겨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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