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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冊나부랭이

시골에서 로큰롤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15.)

Dog君 2018. 2. 6. 15:03


1-1. '음악'이라는 것을 처음 인식하게 된 순간을 기억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가 이런저런 노래를 골라서 공테이프에 녹음해 만든 저 나름의 편집음반이 있었고, 거기에 수록된 Rage against the Machine의 'Killing in the Name'과 'Know your Enemy'를 들었을 때였다. 정말이지 뭐랄까, 오른쪽 귀로 들어온 소리가 왼쪽 귀를 뚫고 나가는 듯한 느낌이랄까.


* 그 때 그 편집음반 이름은 '잡곡나부랭이'였고, 그 이름은 지금 이 블로그의 카테고리명으로 잘 쓰고 있다.


1-2. 그리고 음악잡지도 가끔 사보고 하면서 조금씩 내가 아는 것을 늘려나갔다.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서브'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샘플러CD라고 해서 노래 몇 곡을 담은 CD를 부록으로 줬다. 아마 그 CD가 처음으로 가져 본 '내 CD'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CD를 통해 이상은에 입덕했다.


2. 내가 나고 자란 진주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구 30만 남짓 되는 지방중소도시를 못 벗어나는 처지라서 내가 누릴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은 그 정도가 최선이었다. 딱히 잘 사는 집이 아닌지라 수중에 용돈도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적극적인 것도 아니어서 다른 큰 도시에 가서 공연을 보거나 하는 일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고향을 떠나려고 발버둥쳤던 것은 그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그런데 무정하게도 도카이텔레비전에서는 〈리브 영!〉인지 뭔지를 방영해주지 않았던 탓에 나는 살아 움직이는 마크 볼란을 볼 수 없었다. 아아, 분해라, 분해 죽겠다. 나는 어째서 기후 따위에서 태어난 건가. 신은 너무 불공평한 게 아닌가. 오쿠다 소년의 상경 계획은 아마 이때 시작된 게 아닐까 싶다. 록 하면 도쿄, 기후 같은 곳에 있으면 안 된다. 도시와 시골의 격차는 외국 문화에 있어 특히 현저했다. 외국 영화만 해도 마이너한 작품은 지방의 경우 재개봉관에조차 오지 않았다. (p. 64.)


3. 오쿠다 히데오도 그랬던 모양이지. 그가 나고 자랐다는 기후현 가카미가하라(各務原)시라는 곳을 찾아보니, 2014년 현재 인구가 14만 조금 넘는 아주 작은 도시다. (뭐야, 진주보다 작네.) 그 한정된 자원을 쪼개고 쪼개서 음악을 듣던 시절의 이야기가,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발랄한 문체로 가득 채워져 있다. (사실 오쿠다 히데오는 그간 단 한 권도 책을 사 본 적이 없던 것을, 순전히 주현이 형 때문에 읽게 되었다.) 하하, 이 양반, 정치적으로는 나와 생각이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적어도 삶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은 나랑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아. 하하하. 좋아, 재미있어.


4.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막귀를 못 벗어나고 있다. 음질에 딱히 민감한 것도 아니고, 감식안이 좋은 것도 아니다. 나는 암만 들어도 좋은지 모르겠는데 남들은 세기의 명반이라고 한다거나, 내 귀에는 좋아서 막 챙겨듣는데 남들은 시큰둥하다거나, 그런 경우가 왕왕 있다.


  시청회, 참 많이 갔다. 케이블을 바꾸면 소리가 이렇게 또렷해진다느니, 오디오 보드를 깔면 소리가 이렇게 두드러진다느니. 모여드는 사람들은 당연히 마니아이다 보니 소리의 변화에 “오오”하며 탄성을 지른다든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신다. 나도 따라서 귀에 신경을 집중해보는데......

  전혀 모르겠다.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건가. 봐요, 보컬이 전면으로 나왔죠? 알곘냐, 그런 거. 베이스 소리가 알알이 도드라져 들리는 것도 다르잖아요? 몰라, 알 같은 게 어디 있다는 건데? 회장 구석에 우두커니 선 나는 완전히 이교도였다.

  어느 날, 나는 사장에게 털어놓았다.

  “사장님, 전 음의 차이를 전혀 모르겠습니다.”

  “쉿, 아는 척하고 있어.”

  지시는 간결했다. (p. 11.)


  《Northern Lights - Southern Cross》는 1976년 초에 일본에서 발매되어 음악 잡지마다 절찬했던 앨범이다. 그때까지 더 밴드의 노래는 영화 〈이지 라이더〉의 삽입곡 〈The Weight〉를 들은 적이 있는 정도였는데, ‘꽤나 흙내 나는 컨트리 록이군’ 하는 인상을 받았다. 수수하고 고리타분해서 적극적으로 듣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뉴 뮤직 매거진〉(NMM)에서 야부키 노부히코가 100점을 준 데다, 오구라 에이지와 나카무라 도요도 칭찬을 퍼부었던 터라 ‘언젠가는 들어봐야겠군’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르바이트비를 받은 것을 계기로 《Northern Lights - Southern Cross》를 샀다. 그래서 기대에 부푼 가슴으로 바늘을 얹고 들어봤는데......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라도 알면 그나마 태도를 정할 수 있을 텐데, 그것조차 알 수 없으니 나는 그냥 문외한이었다. 물론 여러 번 들었다. 도요 선생이 칭찬하는 앨범인데 당연히 좋을 것이라고 믿으며 몇 번씩 반복해서 들었다. 그래도 알 수 없었다. 아니, 결코 나쁜 것은 아니었다. 곡도 연주도 좋았다. 하지만 어째서 다들 입을 모아 그렇게 절찬을 하는지 그걸 알 수 없었다.

  나는 내 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번에는 더 밴드의 데뷔작 《Music From Big Pink》를 사서 들어봤다. 이쪽은 에릭 클랩턴이 충격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데릭 앤드 도미노스를 결성했듯이 여러 뮤지션에게 영향을 미친, 당시 이미 명반이라 이야기되던 앨범이다.

  이건 더 알 수 없었다. 첫 곡인 〈Tears Of Rage〉의 도입부를 듣고 오쿠다 소년은 ‘대체 뭐냐, 이거’ 하며 머리를 싸안았다. 일부러 못 부르는 척하는 건가? 할 마음은 있는 건가? 앨범 전체에 감도는 헐렁함이라고 할지, 소박함이라고 할지, 카타르시스의 부정이라고 할지, 그때까지 듣던 록과는 정반대의 벡터는 나를 튕겨낼 뿐이었다.

  이걸 모르면 록 마니아가 될 수 없나. 큰일인데. 장차 음악평론가가 되고 싶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건만...... (pp. 259~261.)


5.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는 프로페셔널한 음악감상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기실 요즘 시대에 나처럼 꼬박꼬박 CD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 아니냐. 감식안이나 심미안 같은 거 없으면 어떠냐. 훌륭한 리스너는 못될지언정 성실한 리스너 대열에는 확실히 낄 수 있다. 그거면 됐다.


Mardi Gras / Creedence Clearwater Revival

이 밴드를 C. C. R.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인 뿐이고, 미국에선 ‘크리던스’라고 부른다. 앨범 중에서 〈Someday Never Comes〉만 명곡이고 나머지는 졸작. 괜히 샀다고 후회했다. 〈Someday Never Comes〉를 듣고 싶은 사람은 유튜브로 들으시라. 여담인데, C. C. R.의 대표곡 〈Have You Ever Seen The Rain〉의 ‘비(Rain)’는 베트남전쟁에서 사용된 네이팜탄을 말한다는 게 일본에서는 정설처럼 돼 있지만, 저번에 옛 멤버가 음악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어, 그래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라고 해서 왕년의 팬들이 전원 휘청했다. (p. 41.)


  외국 영화와 외국 팝송과 청바지는 시골 중학생이었던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였다.

  십중팔구 내 인생 방침은 중학교 1학년 여름에 정해졌을 것이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 남이 안 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 체제와는 반대편에 서고 싶다, 소수파로 있고 싶다, 모두가 오른쪽을 보고 있을 때 나만은 왼쪽을 보고 싶다. 청개구리라고 한다면 “네, 맞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지만, 나는 아저씨가 된 지금도 베스트셀러 책은 읽지 않고, 브랜드 물건 따위 사지 않고, 권위를 믿지 않는다. 문학상을 타면 여러모로 편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런 거 하나도 안 고맙거든’ 하는 어린애 같은 오기가 있다. 그럼 받지 말라고? 아니, 상금은 탐나니까. (pp. 57~58.)


  시카고 멤버 일곱 명은 지금도 안 보고 말할 수 있다. 로버트 램, 테리 카스, 피터 세트라, 대니얼 세라핀, 제임스 팬코, 월터 패러자이더, 리 로크네인. 스리 도그 나이트 일곱 명도 말해줄까. 대니 허턴, 코리 웰스, 척 니그런, 마이클 올섭......

  그런 에너지를 어째서 영어 단어나 역사 연호 암기에 쏟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쓴웃음이 날 뿐이지만, 당시에는 록에 관해서라면 뭐든 다 알고 싶었다. <뮤직 라이프>에는 부문별 인기투표의 중간발표가 실려 있었는데 낯선 외국 이름이 줄줄이 나열된 명단을 시험공부 할 때보다 더 열심히 보며 ‘멜 샤커는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의 베이시스트’ ‘더그 클리퍼드는 C. C. R.의 드러머’ 하고 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여간 멍청한 중학생이었다. (p. 73.)


  밴드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록에 대해 아는 게 많다고 레퍼토리에 대해 조언을 부탁받는 일은 자주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상담자는 다른 학교 다니는 친구다.

  “오쿠다, 학교 축제 때 밴드를 할 건데 뭐 좋은 곡 없냐?”

  “편성은?”

  “기타 둘에 베이스랑 드럼”

  듣자 하니 기타 둘 다 리드를 치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그럼 위시본애시나 BTO(바크먼 터너 오버드라이브)가 좋을걸.”

  나는 친절한 마음으로 두 밴드의 레코드를 빌려주었다. 그러자 둘 다 마음에 든 듯 위시본 애시와 BTO의 곡을 번갈아 연주하는 터무니없는 밴드가 되었다. 하나는 영국의 음영을 갖춘 서정적인 밴드, 또 하나는 캐나다 약쟁이가 좋아하는 태평한 로큰롤 밴드. 최소한 날이라도 나누어서 연주해라 싶지만, 학교 축제는 1년에 한 번 뿐이거니와 고등학생이 남들 앞에서 연주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게다가 여러 곡을 익히지도 못한다). 그 탓에 〈Blowin’ Free〉와 〈Roll On Down The Highway〉를 이어서 연주하는 지리멸렬한 무대가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뭐, 고등학생이 원래 그럴 것이다. 전체를 보지 못한다. (pp. 213~214.)


  1976년 12월, 레인보가 처음으로 일본을 찾았다. 오랜만에 우어. 오쿠다 소년은 흥분했다. 하드록은 졸업한 게 아니었냐고? 무슨 그런 말을, 중학교 때 그렇게 신세 졌던 리치 블랙모어 아닌가. 내게는 소집 나팔이 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달려가지 않으면 사나이 대장부가 아니다. (p.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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