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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사 (로버트 C. 앨런, 교유서가, 2017.)

Dog君 2018. 3. 25. 12:57


0. 두껍지 않은 책인데, 여기에 세계경제사를 다 우겨넣었다고 생각하니 대충 수박 겉이나 좀 핥고 넘어갔겠구나 싶지만, 의외로 메모해둘만한 내용이 꽤 있다.


1. 이 책은 지난 500년 간의 세계경제사를 크게 3개의 시기로 나눈다. 첫번째는 대항해시대로 촉발된 경제성장이 영국 등의 해양국가 중심으로 시작된 시기, 두번째는 미국과 그 외의 유럽 국가들이 그 뒤를 추격한 시기(여기서 추격catch-up이라는 표현을 쓴 게 좀 재미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트리컨티넨탈의 빅 푸시의 시기.


  우리는 과거 500년을 세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의 중상주의 시대(mercantilist era)이다. 이 시대는 통합된 세계 경제를 만들어낸 콜럼버스와 다 가마의 항해로 시작되어 산업혁명으로 끝이났다. (중략) 유럽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획득하고 관세와 전쟁으로 다른 국가들이 그들과 무역하는 것을 막는 방식으로 무역을 늘리고자 했다. 유럽의 제조업은 식민지의 희생을 대가로 발전했지만, 경제 발전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다.

  이는 두번째 시기인 19세기 추격(catch-up)의 시대에 변화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했을 즈음, 영국이 산업을 선도했고 다른 국가들을 경쟁에서 압도했다. 서유럽과 미국은 경제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네 가지 표준적인 정책 묶음으로 이를 이룩하고자 했다. 국내의 관세를 철폐하고 교통 인프라스트럭처를 건설하여 전국적으로 통합된 시장을 창출하는 것, 영국과의 경쟁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에 대해 관세를 도입하는 것, 통화를 안정시키고 산업에 투자할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은행에 면허를 부여하는 것, 노동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대중 교육을 확립하는 것.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이 정책들은 성공적이었고, 이 지역의 국가들은 영국과 함께 현재의 선진국 클럽이 되었다. 몇몇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이 정책들을 불완전하게 도입했고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중략)

  20세기에는, 이전에 서유럽, 특히 독일과 미국에서 성공적이었던 정책들이 아직 발전되지 못한 국가들에게는 덜 효과적이었음이 드러났다. 대부분의 기술은 선진국에서 발명되는데, 그들은 더욱 더 비싸지는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자본을 사용하는 기술을 개발한다. 이 신기술의 대부분은 저임금 국가에서는 비용 면에서 효율적이지 않지만, 그것은 그들이 선진국을 따라잡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현대적 기술을 어느 정도 도입했지만, 선진국들을 따라잡을 만큼 급속하게 도입하지는 않았다. 20세기에 서구와 격차를 줄인 국가들은 경제 도약을 위해 계획과 투자 조정을 사용하는 빅푸시(Big Push)와 함께 이러한 기술을 급속히 도입했다. (pp. 8~11.)


2-1. 특히 두번째 시기부터는 능동적이고 직접적인 힘이 의도적으로 경제성장을 촉진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사용된 일련의 행위/정책 묶음을 이 책에서는 '표준모델'로 정의한다. 그러니까 이말인즉슨 세계경제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간접적인 배경보다는 보다 직접적인 행위/정책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미겠다.


2-2.이 책에서 말하는 '표준모델' 그 자체는 이들 국가 이후에도 줄곧 강조된다. 예컨대 대중교육의 확립과 그에 따른 식자율의 상승이 경제성장과 어떠한 상관관계를 갖는지는 이미 상식 아이겠냐. 남은 문제는 그 '대중교육'의 정도가 어느 정도까지여야 하는가, '대중교육'을 확립하고 보급하는 과정은 어떠한가, 하는 정도일 것 같다. 식자율 문제는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공부하고 있는 주제와도 어느 정도 연결되는 바가 있어서 밑줄도 몇 개 더 긋고 그랬다.


  미국의 산업화는 또한 19세기 경제 발전의 ‘표준 모델(standard model)’을 구성했던, 경제 발전을 지원하는 4개 정책에 기초했다. 첫째는 대중 교육이었다. 이 방향으로의 커다란 진보는 식민지 시기에 이루어졌고 19세기에 더욱 진전되었으며, 경제적 동인이 이를 더욱 강력히 추동했다. 다른 3개 정책들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제조업에 관한 보고Report on Manufactures』(1792)라는 저작에서 최초로 제시했다. 시장 확대를 위한 교통 개선, 통화 안정과 신용 공급을 보장하는 국립은행,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관세였다. (후략) (p. 128.)


  제도, 문화, 지리는 언제나 경제 성장의 배경에 숨은 요인이었던 반면, 기술 변화, 세계화, 경제 정책은 불균등 발전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p. 29.)


3. 마지막 빅 푸시의 시대는, 추격의 시대에 비해 좀 더 시장개입의 정도가 커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라나 모르겠다. 경제적 격차를 단시간에 좁히기 위해, 수요-공급의 흐름에 발맞추지 않고 인위적으로 산업구조 재편에 개입하는 것 정도? 두번째 추격의 시기와 어떤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 책에서는 양자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세기에 서구 선진국들이 세계의 다른 지역들과 격차를 더욱 벌렸지만, 몇몇 국가들은 이러한 경향과는 반대로 이들을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일본, 대만, 한국, (덜 완전하지만) 소련이었다. 중국도 곧 비슷한 경로를 따를 것이다. (중략) 규모가 큰 국가들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선진국 경제의 모든 요소-제철소, 발전소, 자동차, 공장, 도시 등-를 한꺼번에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빅푸시(Big Push) 산업화이다. 이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부른다. 수요와 공급이 있기 전에 모든 것을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공장이 철판을 사용하기 전에 제철소가 건설되어야 한다. 또 작업할 철강이 사용 가능하기 전에, 그리고 제품에 대한 유효수요가 있기 전에 자동차 공장이 건설되어야 한다. 모든 투자는 보완적인 투자들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대한 계획이 성공하려면 계획기구가 경제 활동들을 조정하고 그 활동들이 반드시 실행된다고 보장해야 한다. 계획기구의 역할은 서로 많이 달랐지만 20세기에 빈곤에서 탈출한 대규모 경제들은 이러한 과업에 성공했다. (pp. 208~209.)


ps. 내 주요 관심분야인 철강 관련 디테일을 메모.


  1870년경에는 근대적인 제철업도 유럽의 대륙에서 확립되었다. 18세기 이전에는 철광석을 녹이고 제련하는 데 숯을 사용했다. 산업혁명 시기에 숯이 정제한 석탄인 코크스로 대체되었고, 이는 산업혁명의 가장 유명한 혁신 중 하나였다. 이 기술은 1709년 콜브룩데일 제철소의 에이브러햄 다비(Abraham Darby)에 의해 실행되었다. 1750년에서 1790년 사이에, 철판을 생산하는 데 코크스 철이 숯 철을 대체했다. 그러나 프랑스 같은 국가들에는 값싼 숯을 제공하는 광대한 삼림이 있는 대신 석탄을 드물고 비쌌기 때문에, 유럽 대륙에서 코크스 철은 숯 철을 완전히 대체하기에 여전히 너무 비쌌다. 유럽 대륙에서 코크스가 숯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코크스 용광로의 생산성을 높이는 설계 개선이 이루어지기까지 50년이 더 걸렸다. 프랑스와 독일 기업들이 가장 진보된 설계로 용광로를 건설했던 1860년대에 그러한 전환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다른 말로 하면, 첨단 제철 기술이 그곳에서 경쟁력 있는 기술의 유일한 형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첨단 제철 기술로 도약을 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유럽 대륙은 19세기 중반에는 새로운 산업들에서도 영국에 뒤처지지 않았다. 서유럽은 철도를 건설했고 유럽의 기관차는 영국 제품만큼 선진적이었다. 상철(steel)도 마찬가지였다. 1850년 이전까지 강철은 제철업에서 값비싼-그리고 드문-제품이었다. 당시 제철업은 주로 연철로(puddling furnace)에서 선철(pig iron)로부터 연철을 제련해 철판과 철로를 생산했다. 강철 생산에서 기술적 문제는 순수한 선철을 녹여서 탄소 같은 다른 요소들을 추가하는 공정을 정확하게 통제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섭씨 1500도 이상의 고온이 필요했다. 최초의 해결책은 1850년경 헨리 베세머(Henry Bessemer)와 윌리엄 켈리(William Kelly)가 각각 발명한 전로(converter)였다. 또다른 해결책은 카를 빌헬름 지멘스(Carl Wilhelm Siemens) 경이 선구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매우 높은 온도에 이를 수 있는 축열식 용광로를 만들어냈다. 1865년 피에르-에밀 마르탱(Pierrer-Emile Martin)이 지멘스 용광로로 선철을 녹여 강철을 만들었다. 소위 평로(open hearth furnace)는 평판, 철판, 구조물 형태를 생산하는 데 베세머의 전로보다 더욱 우월하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1960년대에 염기성 산소법으로 대체될 때까지 지배적인 기술이 되었다. 중요한 점은 강철의 대량 생산과 관련된 발명가 네 명이 각각 영국인, 미국인, 영국에 사는 독일인, 프랑스인이었다는 점이다. 즉 기술에 국가 간 격차가 존재하지 않았다.

  1870년경 서유럽은 가장 심각했던 기술 부족을 극복했지만, 유럽 대륙의 생산 수준은 여전히 영국에 크게 못 미쳤다. 그러나 이는 1차세계대전 시기가 되자 달라졌다. 이 시기에 서유럽과 미국 모두 제조업에서 영국을 따라잡았다. (중략) 중공업에서 영국의 지위는 훨씬 더 낮아졌다. 1850~54년에 영국은 선철 300만 톤을 제련했고 독일은 24만 5000톤, 미국은 약 50만 톤이었다. 1910~13년이 되자 영국은 1000만 톤을 생산했는데, 독일은 1500만 톤을 제련했고 미국은 2400만 톤이었다. (pp. 71~73.)


(전략) 철강은 일본이 크게 성공한 산업이었다. 철강 생산은 1932년 240만 톤에서 1943년 770만 톤으로 증가해 정점을 찍었고 이후 1945년 50만 톤으로 하락했다가 1950년 480만 톤으로 반등했다. 철강 생산의 중요한 특징은 대규모 자본집약적 제철소에서 생산할 때 비용이 최소화된다는 점이다. 1950년 철강업의 최소효율규모는 100~250만 톤이었다. 미국의 제철소는 대부분 그보다 규모가 컸지만 일본에서는 한 군데 제철소(180만 톤을 생산한 야와타 제철소)만이 그러한 규모를 달성했다. 일본의 나머지 제철소들은 50만 톤 이하를 생산했다. 따라서 당시 일본은 임금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산 철강은 미국산이나 유럽산보다 적어도 50퍼센트 이상 비쌌다. 1950년대 MITI(통산성-옮겨쓴이)의 목표는 일본의 철강 산업을 구조조정하여 모든 철강이 효율적 규모의 제철소에서 생산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MITI의 힘은 은행 시스템을 통제하는 권한과 외환을 분배하는 결정권에서 나왔고, 외환은 코크스용 탄과 철광석을 수입하는 데 필요했다. 1960년이 되자 철강 생산량은 현대화된 대규모 제철소에서 2000만 톤으로 증가했다. 1960년 이후로 MITI의 지도는 덜 직접적이 되었다. 철강 생산은 ‘새로운’ 장소에 새로운 제철소들을 건설함으로써 계속 증가했다. 이 제철소들은 모두 당시 약 700만 톤으로 커진 최소효율규모를 넘었다. 이와 반대로, 미국의 설비 대부분은 효율적 규모보다 작은 낡은 제철소였다. 일본의 제철소는 또한 기술 면에서 더욱 선진적이었다. 1970년대 중반 일본 철강의 83퍼센트가 순산소상취전로(basic oxygen furnace)에서 제련된 반면 미국은 62퍼센트였고, 일본에서는 35퍼센트가 연속주조법을 사용했지만 미국은 그 비율이 11퍼센트였다. 임금이 대폭 상승했어도 일본은 현대적인 자본집약적 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낮은 비용으로 철강을 생산했다. 1975년 일본은 철강을 1억 톤 이상 생산했다.

  누가 그 모든 철강을 구입할 것인가? 조선, 자동차, 기계, 건설 산업 등이 국내의 주요한 구입자였다. 따라서 이 산업들이 철강업에 발맞추어 성장해야만 했다. 이를 보장하는 것이 경제계획의 두번째 문제였다. 이 산업들의 생산 기술도 결정되어야만 했고, 철강 산업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자본집약적인 기술이 도입되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산업의 경우, 일본 기업들은 미국의 경쟁자들에 비해 노동자 일인당 자본량이 더욱 많았다. 또 ‘적기’ 배송으로 미완성품 비중이 훨씬 작았기 때문에 일본 자본은 더욱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생산 규모가 더욱 컸다. 1950년대 자동차 조립 공장의 최소효율규모는 연간 약 20만 대 였다. 포드, 크라이슬러, 제너럴모터스는 한 공장에서 1년에 15~20만 대를 생산했다. 1960년대에 이르자 일본의 새로운 자동차 공장은 현장 자체생산(on site stamping)과 복수 조립 라인을 함께 도입하여 최소효율규모를 연간 40만 대 이상으로 밀어붙였다. 일본의 모든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이 수준으로 생산했고 혼다와 도요타 같은 가장 효율적인 업체에서는 한 공장에서 1년에 80만 대까지 생산했다. 일본은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방식을 도입하여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산업을 만들어냈고, 그 산업은 제품에 경쟁력 있는 가격을 매기면서 동시에 고임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 (pp. 21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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