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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창비, 20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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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창비, 2011.)

Dog君 2018. 4. 12. 16:25


1. 흐르는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 시간에 몸을 맡기고 하루하루 살다보면 예기치 않게 이런저런 역할을 부여받기도 한다. 그 '시간'과 '역할'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건 안 되어 있건 상관 없이 말이다. 물론 그것을 떠안는 속도는 각자 조금씩 다르지만... '역할'을 떠안은 부모와 '시간'을 떠안은 아이의 이야기. 소설이라 떠안는 속도를 매우 극적으로 강조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 인생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 나는 그 속도를 적극적으로 지연시키며 살아왔다. '사회인'으로서의 지위와 책무를 떠안기 싫어서 대학원에 갔고(꼭 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이유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다), 부모님으로부터의 경제적 자립도 꽤 늦은 편이고,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되는 것도 여지껏 유예하는 중이다.


ps. 마지막 즈음을 읽을 때는 갑자기 전철에서 콧날이 시큰해져서 큰일날뻔했다.


  “대수야, 자?”

  “아니.”

  “넌 얘가 어떤 애였으면 좋겠어?”

  “음…… 남자아이?”

  “아니, 그런 거 말고. 성격이나 장래희망 같은 거 말이야.”

  아버지는 잠시 머뭇댔다. 보호자인 본인도 아직 뭐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바람을 가져도 되는지, 그럴 자격은 있는지 자신할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신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했다.

  “어…… 나는, 얘가 꿈이 있는 아이였음 좋겠어. 너는?”

  어머니가 서글서글한 눈망울에 기대를 한껏 담아 말했다.

  “음…… 나는 얘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였으면 좋겠어.”

  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어머니를 나무랐다.

  “야, 그거 쉬운 일 아니다.”

  어머니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왜? 아기들한테는 그것만큼 쉬운 일이 없을걸?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만들면 되잖아.”

  아버지는 여전히 ‘아내’라기보다는 ‘여자친구’처럼 느껴지는 어머니를 향해 모로 누웠다. 그러곤 어머니의 배를 어루만지며 그늘진 얼굴로 속삭였다.

  “애가 우릴 좋아할까?”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등 위에 자기 손을 포갰다.

  “글쎄……”

  “애가 원하는 걸 우리가 다 해줄 수 있을까?”

  “그러게……”

  두 사람은 한동안 컴컴한 허공을 바라봤다. 창밖에선 서서 잠든 나무들이 짙은 한숨을 토해내고, 마당 앞 키 큰 작물들을 바람의 방향에 따라 머리채를 흔들며 산이 꾸는 꿈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싸구려 벽지가 발라진 시멘트 벽 너머로 옆방 사내의 코 고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잠시 후, 아버지가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응.”

  “뭘 잘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말이야,”

  “응.”

  “건강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잠시 눈을 굴렸다. 그러곤 너무 차분해서 어딘가 슬프게 들리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거면 되겠다.” (pp. 35~37.)


  몇해 전, 이웃의 한 여자가 우리집에 찾아와 이런 말을 했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다면서요?”

  “네.”

  “그런 건 병이 아닙니다.”

  “네?”

  “그런 건 메씨지지요.”

  그녀 옆에는 낡은 성경책과 묵주가 놓여 있었다.

  “아주머니.”

  아버지가 말했다.

  “쟤는 메씨지가 아니라 아름입니다. 한아름이라고요.”

  순간 나는 내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순하고 둥근 이름이 부끄러웠지만, 동시에 ‘아버지도 이제 다 컸구나......’ 하는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십대 가장 시절, 어른들이 뭐라 그럼 그게 다 자기 잘못인 양 고개만 푹 숙였던 아버지는, 이제 우리 가족을 향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는지 그날밤 술을 진탕 먹고 들어왔다. 한 손에는 한 판에 천원 하는 만두 꾸러미를 들고서였다.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닌데, 그날따라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내 방으로 와 힘도 없는 내 다리를 베고 누웠다. 그러고는 양 볼을 부풀리며 헤헤 웃었다. (pp. 47~48.)


  장르나 두께와 상관없이 종이와 활자로 된 거라면 어떤 거든 좋았다. 곤충, 식물, 어류 도감은 물론 가슴을 쿵쿵 밝고 가는 시집과 귀싸대기를 맞은 것처럼 정신을 얼얼하게 만드는 사회과학 책까지. 그중에는 더러 난데없고 계통없는 입문서도 끼어 있었다. 『바둑 첫걸음』 『골프란 무엇인가』 『초급일본어』 『전기공학의 기초』 『처음 만난 클래식』 『알기 쉬운 페미니즘』...... 돌이켜봄 나도 왜 읽었는지 모를 책들이었다. 나는 전기공학을 공부했지만 전구 하나를 갈아끼울 때도 식은땀을 흘렸다. 나는 히라가나를 외웠지만 일본에 간 적이 한번도 없다. 얼핏 봐서 나의 독서는 지식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지구가 망한 뒤에 혼자 살아남게 될 사람의 조바심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필드 한번 나간 적 없는 골프는 그렇다 쳐도, 지구에 혼자 남은 사람이 사용하려 한 페미니즘이란 무엇이었을까. 물론 누군가는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거다. 조막만한 녀석이 대체 그 많은 걸 언제 다 읽었냐고고.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할 터였다. 사람이 오랫동안 혼자 있게 됨, 뜻밖에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무엇무엇 해야지’라는 결심이 아니라,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러고 있더라고 깨닫는 식으로 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단연 소설이었다.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이야기부터 이국의 젊은 작가가 이제 막 선보인 데뷔작까지, 세상에서 가장 인기있는 유형의 이야기부터, 그런 유형이랄까 기준이랄까 하는 것에 신경질이 나 오로지 선배들을 엿먹일 맘으로 쓴 실험적인 작품들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각 나라의 저자들과 노는 사이, 그리고 미처 읽어보지 못했고 어쩌면 영영 읽지 못할 책들이 마구마구 쏟아지는 사이, 나는 꽤 늙어버렸다. 혹은 늙은 채로 그들과 같이 놀았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러할 뿐 내겐 노인들의 지혜나 경험이 없었다. 내가 먹은 나이 속엔 겹겹의 풍부한 주름과 부피가 없었다. 나의 늙음은 텅 빈 노화였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오래 산 사람들의 인생이 궁금했다. 혹은 나만큼 늙지 않은 이들의 감각이랄까 고민 같은 것도 알고 싶었다. 다행히 책 속에는 모든 것은 아니어도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pp. 52~53.)


  돌이 지나도록 ‘엄마’ 소리를 않던 내가 입이 터진 건 반년 뒤의 일이었다. 누구나 겪은 평범한 과정 중 하나지만 어머니를 펄쩍 뛰게 할 만큼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긴 침묵을 깨고 건넨 첫마디였으니, 마음 같아선 ‘어머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얼마나 심려가 많으셨습니까?’와 같은 온전한 문장으로 운을 떼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 나온 건 단순하고 평범한 한마디, ‘엄마’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뒤부터 나는 모든 사람을 귀찮게 할 정도로 종알거리고 다녔다. 집안일로 피곤한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번씩 반복되는 ‘엄마 이건 뭐야?’라는 말 속에서 핼쑥해져갔다. 한번은 잠든 외할아버지를 가리켜 ‘엄마 이건 뭐야?’라고 묻는 내게 성가신 듯 ‘응, 암것도 아녀’라고 대꾸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반복하게 될 ‘왜?’라는 질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p. 70.)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나는 그 찰나의 햇살이 내게서 급히 떠나가지 않도록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그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누구도 본인의 어린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특히 서너살 이전의 경험은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거니까, 자식을 통해 그걸 보는 거다. 그 시간을 다시 겪는 거다. 아, 내가 젖을 물었구나. 아, 나는 이맘때 목을 가눴구나. 아, 내가 저런 눈으로 엄마를 봤구나, 하고. 자기가 보지 못한 자기를 다시 보는 것. 부모가 됨으로써 한번 더 자식이 되는 것. 사람들이 자식을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않을까? (후략) (pp. 79~80.)


  “어머님 말씀으론 정확한 병명을 안 게 네살 때라고 하시던데요?”

  “네.”

  작가 누나가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는 아까보다 기가 빠져 보였다.

  “괜찮다면 그때 얘기를 좀 해주시겠어요?”

  “언제요?”

  “아름이가 아프단 걸 처음 알게 되셨을 때요.”

  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오랜 침묵으로 사람들을 긴장시키더니, 속으로 뭔가 결정한 듯 천천히 입을 뗐다.

  “아, 그날 일이라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작가 누나가 다소 기대 어린 목소리로 추임새를 넣었다.

  “네.”

  “봄이었는데, 골목에서 추어탕 냄새가 나더라고요.”

  승찬 아저씨 낯빛에 살짝 불안한 기운이 스쳤다. 하지만 아버지는 조금 전과 달리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예, 그날요. 그렇게 큰 병원은 처음 가보는 거라 애 엄마도 저도 잔뜩 긴장했었어요. 초행길은 그 자체로 엄청 피곤하잖아요. 길도 모르고, 병원 구조도 복잡하고,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시끄럽고. 그래도 동네 병원서 일년 돼도 모르던 걸 서울서 알았어요. 알고도 믿지 못했죠. 그래서 처음엔 별 느낌이 없었어요.”

  “그러셨어요?”

  “네, 내가 뭘 느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아름인 옆에서 계속 침 흘리며 종알거리고. 일단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점심때가 됐으니 애 밥을 먹여야겠다는 거였어요.”

  작가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계속하세요.”

  “애 엄마랑 병원을 나와서 밥집을 찾다, 그냥 근처에 있는 추어탕집에 갔어요. 신을 벗고 들어가는 데였는데, 우리가 좀 늦게 왔는지 손님이 거의 없더라고요. 근데 옆에 어린 아기랑 젊은 부부 한쌍이 있었어요. 애가 기는 걸 보니까 한살쯤 된 거 같았는데, 이쁘더라고요, 통통해가지고.”

  “……”

  “예전엔 어린애들 보면 그냥 애구나 했는데, 낳고 보니까, 저만큼 키우는 데 얼마나 씻기고 입히고 먹였을지, 얼마나 혼났을지가 다 보이더라고요. 아가씨도 시집가면 아마 그럴 거예요.”

  작가 누나가 조그맣게 웃었다.

  “네.”

  “부모 얼굴을 보니까 애한테 홀딱 빠져 있더라고요. 멀찍이서 애한테 자꾸 컵 굴리고, 애가 컵을 밀어내면 자시 주워 또르르르 굴리고. 그렇게 계속 장난치며 웃더라고요.”

  나는 아버지가 왜 내 얘기는 않고 딴 아이 얘기만 자꾸 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생각보다 아버지가 말을 잘한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어른이었구나, 우리 아버지......’

  승찬 아저씨도 그때서야 조금 안심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름 엄마랑 저는 검사결과도 있고 해서, 별말 없이 음식만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아름이는 수족관에 코를 박고 있고. 평소처럼 쓸데없는 질문 막 해대고. 근데 자꾸 신경쓰여, 옆에가. 이상하더라고.”

  “왜요? 아버님?”

  “그게, 우리도 나중에 알았는데, 그 부부가 말을 못하더라고요. 한참 뒤 둘이 수화하는 거 보고 나서야 알았어요.”

  “아……”

  “그리고 그때 알았어. 애 아버지가 왜 자꾸 애한테 컵을 굴렸는지.”

  카메라 주위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작가 누나가 적극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왜 그런 것 같으셨는데요......?”

  “말을 걸고 싶었던 거지. 얼마나 부르고 싶겠어, 자기 애 이름을. 내가 그 농아 부부였대도 불러보고 싶었을 것 같아요. 살면서 한번이라도, 소리내서 말이에요. 그때그때 반응해주고. 얘기도 하고. 애기 땐 더하지. 안 그렇겠어요? 애들은 자기 이름 듣고 자라는데.”

  작가 누나는 긍정하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다 곧 주문한 음식이 나왔어요. 우리 식구는 묵묵히 밥을 먹었고요. 그리고...... 그게 다예요.”

  “네?” (pp. 156~159.)


  “할아버지?”

  “응?”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언제 할아버지라고 느끼세요?”

  “글쎄……”

  장씨 할아버지가 가만 생각에 잠겼다.

  “그게 말이지, 예전에는 나도 오륙십 먹은 양반들이 무지 나이 많은 이들처럼 느껴졌거든? 근데 막상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보니까 그치들이 그렇게 늙은 사람들이 아니었더라고.”

  “그래요?”

  “응,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하나도 안 늙은 거 같아.”

  “아……”

  “심지어 우리 아버지는 내가 아직도 자라고 있는 거 같다고 하는 걸.” (pp. 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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