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홍사익 중장의 처형 (야마모토 시치헤이, 페이퍼로드, 2017.) 본문

잡冊나부랭이

홍사익 중장의 처형 (야마모토 시치헤이, 페이퍼로드, 2017.)

Dog君 2018. 4. 14. 12:26


1-1.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가 뭘까. 숨겨진 사실을 밝혀내고, 과거에 대해 엄정한 평가를 내리고, 과거의 사건과 인물을 소환하여 준엄한 역사의 법정에 세우고, 궁극적으로는 현재의 권력자들에게도 죽빵을 날릴 수 있게 하는 것일까. 그래 뭐, 그거 참 중요하지. 수백 수천년 전부터 여전히 계속/반복되고 있는 ‘씨발스러움’이 있다면 어떻게 그걸 가만 내비두겠나. 그 ‘씨발스러움’의 전말을 정확히 알아야 욕도 하고 후드려 패기도 하고 숨통도 끊고 그러는 거다. 박근혜를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린 촛불집회의 여러 원동력 중 하나가 박정희를 상대화하고 그것을 비판하고 다시 그것을 넘어시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1-2. 그래, 그거 중요하다. 그런데 그게 중요하다고 해서 그게 전부인 건 아니다. 나는, 역사를 통해 내가 아닌 타자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만 집중하면 어느 순간부터 득보다 실이 커지는 특이점이 반드시 오게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역사학이 '타자에 대한 판단'인 동시에 ‘자아에 대한 성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3. 사람이 살면서, 도덕이나 법이나 이성 같은 단어로는 설명 안 되는 경우가 참 많다. 학살이니 전쟁범죄니 하는 것들이 그렇다. 도덕과 법과 이성의 이름으로는 그게 얼마나 나쁜 일인지 너무 자명하지만, 그렇다고 어디 그런 일이 안 일어나든? 평소에는 길바닥에서 꼼지락대는 지렁이 한 마리 못 죽이는 사람이 어떤 순간에는 끔찍한 살인마/학살자가 되더라는 이야기, 역사책에서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한 두 사람만 그랬다면, 아 시발 사이코네...하고 넘어가겠는데, 그런 경우가 많아도 너무 많더라는 거다.


1-4. 선과 악이 대립하고 정의와 부정의가 명확하게 진영을 나누어 대립하는 세상이란 없다. 언제나 그 경계는 흐릿하고 우리 역시도 그 경계 어딘가에서 한 쪽씩 걸쳐 살아간다. 지렁이 한 마리 못 죽이는 심성과 수백수천의 사람도 눈 깜짝 안 하고 죽일 수 있는 마성이 한 인간 속에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거고, 그게 바로 우리 스스로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거다. 아니 그렇다고 그걸 인정하고 체념하자는 게 아니라, 그렇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로부터 이성과 도덕과 법을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된다는 거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 어디 괜히 나왔겠어?


2-1. 그런 점에서 보면 홍사익 중장도 퍽이나 흥미로운 인물이다. 망해버린 조국에 대한 존중심을 잃지 않았고 독립운동가들과도 꽤나 끈끈한 유대를 유지했지만, 일본제국의 충량한 장성급 군인으로 일본군의 최전선에서 제 역할을 다하다가 A급 전범으로 처형당한 조선인 출신 일본군. 무슨 이유에선지 홍사익 중장은 전범재판 내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사익이 정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기도 무척 어렵다. 이러한 모순이 한 인물 속에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독자로서 궁금증이 생기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나라고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는 것 아니니, 나도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이 두꺼운 책을 묵묵히 다 읽었다.


2-2.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허탈하다. 내가 기대하던 것과 많이 달랐다.


3. 책의 전반부는 '홍사익이 실은 좋은 사람이다’라는 주장과, 그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여러 에피소드들로 채워져 있다. 아니, 이런 이야기는 별로 안 궁금하다니까요. 이런 식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고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니까.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나 스스로만 해도 이런 정도 에피소드는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다. 지난 정권에서 나랏돈 받아먹었으니 최순실 부역자라는 타이틀을 붙인 다음에 친구들에게 짜증을 부렸던 일화들과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땡전 한 푼 던져준 적 없다는 통계까지 늘어놓으면 나는 나쁜 놈인가. 그런데 알고 보니 어디어디 단체에 꾸준히 기부를 했다거나 전철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한 일화를 거론하면 나는 다시 좋은 놈이 되는 건가. 이미 수십 년 전에 죽고 없어진 사람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나쁜 사람이었는지 이제 와서 꾸역꾸역 판단하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한가. 그러한 판단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성찰이란 대체 무엇인가.


4. 책의 후반부는 ‘홍사익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라는 주장이다. 전범재판에서 오갔던 증언과 논증을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인용한다. 요약하자면, 시키는대로 했으니(혹은 당시의 일본 법대로 했으니) 그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익숙한 논리다. 아이히만을 비롯한 수많은 전범들이 자기를 변호할 때 썼던 바로 그 논리들이다. 아니 설혹 그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손 치더라도, 법적 책임이 없다고 하면 그걸로 끝일까. 아니 그럴거면 왜 그 일을 역사학이 굳이 수고롭게 하는가. 그건 그냥 법의 논리잖아.


5. 수백 쪽에 달하는 책을 읽는 것은 수고로운 일이다. 그러나 독자가 그러한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은, 그 수고로움을 통해 생각의 폭을 확장할 수 있을 거라는 지적인 기대 때문이다. 두툼한 책을 읽었음에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각의 틀을 재확인하는 것에 그쳤다면, 그 독서가 주는 유익함이란 글쎄...


교정.

370쪽 11줄 : 당했다고 하자, -> 당했다고 하자.

389쪽 2줄, 4줄 : 오오데라 통역 -> 글꼴을 고딕체로 통일

406쪽 1줄 : 남밤방면 -> 남방방면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