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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시대 (권보드래, 현실문화연구, 200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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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시대 (권보드래, 현실문화연구, 2003.)

Dog君 2018. 6. 2. 19:04


0. 읽은지 시간이 상당히 지났기 때문에 간단하게 정리하기로.


1. 이 책은 ‘연애’라는 것(현상?)이 3·1 운동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1920년대 초중반에 사그라든 것으로 이해한다. 3·1 운동으로 촉발된 사회적 욕구가 처절하게 짓밟힌 후 그 열정이 문화통치가 허용한 공간에서 꽃핀 것이 곧 ‘연애’의 등장이라는 것이고, 1920년대 초중반 이후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본격적ㅇ로 열리면서 ‘연애’가 설 자리도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2. 이렇게 설명하자면 ‘연애’가 단지 ‘정치’에서 후퇴했을 때 도착하는 배후지 같은 느낌인데... 어딘지 모르게 좀 소극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연애’가 속해있는 ‘일상’이나 ‘문화’의 영역이 ‘정치’에 비해 부차적이거나 덜 중요한 것처럼 느껴져서 그렇다. (내가 알기로는 저자의 평소 문제의식이 결코 그렇지 않을텐데... 좀 의외다.) 이렇게 되면 혹시나 ‘연애’라는 것이 3·1 운동 이후에 등장했던 ‘일시적 일탈’처럼만 이해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좀 거시기하다는 거지. 하지만 누구나 인정하듯이 ‘연애’를 단지 3·1 운동 이후의 일시적인 문화 트렌드 정도만으로 한정짓기는 어렵다. 젠더니 가부장제니 해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겠냐 말이지. ‘연애’ 이전의 상황에 대해서는 비교적 친절하게 설명하는데, ‘연애’로 시작된 젠더 이슈가 ‘신여성’이나 ‘현모양처’로 이어지는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좀 의외다.


ps. 본문에서는 1923년 정도에 이미 연애의 시대가 끝물로 접어든다고 보는데, 보론에서는 다시 그 시기를 1926년까지 여전히 연애의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뭐지, 내가 잘못 읽은 건가.


ps2. 다른 '연애의 시대'보다는 이게 훨씬 낫다.


(전략) 1910년대 중반까지는 ‘연애’는 물론이고 ‘사랑’이라는 단어도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중략) 연애의 필요충분조건인 사회의 구조 변동이 완성되지 않았던데다 모든 열정을 국가에 헌납하도록 요구했던 1900년대의 정신이 여진餘震을 남기고 있었고, 새로운 시대의 윤곽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1 운동 이후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보통학교 취학을 기피하던 1910년대와는 달리 3·1 운동 후로는 취학열이 크게 높아져 1923년에는 보통학교 학생수가 서당 학생수를 앞지르기에 이르렀고 1919년 최초의 한국 영화로 일컬어지는 〈의리적 구토仇討〉가 제적되는 등 새로운 문화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동시에 “남녀간의 새로운 연애도 삼일운동의 덕택”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문화정치라는 총독부 노선의 영향 때문이든 3·1 운동 당시 신교육을 받은 학생들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비쳤던 때문이든 1919년 이후 한국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냈으니, ‘연애’란 이때 등장한 상품 중 하나이다. 사랑의 오래된 계보에 속하면서도 1920년대에 비로소 본격화된 ‘연애’라는 신상품은 등장하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팔려 나갔다. (후략) (pp. 92~93.)


  3·1 운동은 정치적 각성을 불러일으켰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에 대한 절망을 낳았다. 이광수가 『재생』에서 묘파했던바 “독립 운동이 지나가고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식어서 나라나 백성을 위하여 인생을 바친다는 생각이 적어지고 저마다 저 한 몸 편안히 살아갈 도리만 하게 된” 것이 3·1 운동 이후의 일면이었다. (중략) 정치적 열정이 꺾인 경험을 근저에 두고 있는 이상 1920년대의 연애가 문화 취향에, 그리고 절망과 비극의 정서에 가까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터이다. 정치적 사상·결사·행동의 자유가 엄격하게 제한되었던 반면 문화의 흡인력은 날로 새롭게 개발되는 속에서 연애는 탄생하였다. (p. 113.)


(전략) 차례차례 밟아 가야 할 이런 번거로운 절차란 운영이나 춘향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런 절차를 밟아 갈 만한 정절한 장場도 없었거니와, 만남 자체가 추문인 상황에서 그렇게 공들여 거리를 두고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아는 한 그런 지연의 가능성은 근대 이후에야 개발된 것이다. 남녀가 “어디까지나 자유스”럽게 교제할 수 있고 입소문에 오르내리지 않고 버젓이 한곳에 있을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육체는 ‘저 멀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남녀 공동의 공간이 확대되면서 만남 자체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사건으로 점차 밀려났고, 대신 만남에서 최종적인 결합에 이르는 다양한 단계가 고안되었다. 만남 자체가 모든 것을 의미했던 상황에서는 정신과 육체를 따로 생각해야 할 필요도 없었지만 새로 펼쳐진 상황은 전연 달랐다. 만남·교제·결혼이 분리되면서 정신과 육체는 이 각각의 단계에 세심하게 배분되었다. 육체는 일종의 최종심급,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확정하는 기호가 되었다.

(중략)

  영靈의 일방적 우위는 전대의 남녀 결합과 새로운 결합이 판이하다는 사실을 역설하기 위해서도 유리했다. 육적 요구를 부정할 수야 없겠지만 문명 사회라면 영적 욕구를 훨씬 근본적으로 취급해야 하며, 이 점에서 과거의 결혼 제도는 야만적이라는 것이 이광수의 주장이었다. (중략) 육체는 동물과 야만에 할당되고 영혼은 인간과 문명에 할당되었다. 남녀 사이의 새로운 관계, 즉 자유연애는 인간의 특권과 문명의 가치에 의해 지지될 수 있었다. 새 시대의 연애는 이처럼 낡은 시대의 결혼과 이항대립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후략) (pp. 153~155.)


(전략) 연애 이후의 ‘생활’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연애에 대한 추상적 열정은 반성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략) 이 위에 계급 운동의 열기가 날로 확대되면서, 결정적으로 기존의 연애관은 부르주아적인 태도로 비판을 받게 되었다. (p. 195.)


  급전急轉이 이루어진 것은 3·1 운동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절망적이었기에 더욱 절실했던 개혁의 과제는 3·1운동 이후 낙관적 전망 속에 재배치되었다. 세계적으로도 이미 세계대전 전에 문명 비판을 개진했던 카펜터·러셀 등의 사상가가 새삼 주목을 받던 때였다. 근대 산업 사회는 파산을 선고받았고, 생활과 산업의 예술화가 주창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戰場 대신 따스한 사랑의 터전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사회주의 운동이 급성장하고 있엇지만, 일반적으로는 신생新生 소비에트를 막연한 동경으로 바라볼 때였다. 한국의 연애는 이 짧은 시기, 인류의 태반이 ‘사랑’과 ‘평화’를 믿었던 기이한 시대에 탄생하였다. (pp. 20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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