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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인의 만주 인식 (이명종, 한양대학교 출판부,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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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인의 만주 인식 (이명종, 한양대학교 출판부, 2018.)

Dog君 2018. 6. 4. 19:02


1. 한국영화에 ‘만주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있다. 다른 나라에는 없고 한국에만 있는 하위장르인데, 풀어 설명하자면 ‘만주를 배경으로 한 서부극’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서부극(웨스턴)이라는 게 워낙에 인기 있는 장르다 보니 이걸 자기 나라 맥락에 맞게 변용한 케이스가 몇몇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만주 웨스턴이라고 보면 된다. (이탈리아의 스파게티 웨스턴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대배우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거, 짝퉁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최근에도 만주 웨스턴으로 분류할만한 영화가 종종 나오는데, 김지운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나 류승완의 ‘다찌마와 리’ 같은 게 있다. 이 영화들이 묘사하는 만주의 모습이, 아마도 현대 한국인이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만주의 모습에 가장 가깝지 않나 싶다. 특별히 어떤 성격이라고 콕 집어서 설명하기에는 애매한 무국적의 공간,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은 미지의 공간, 하지만 광개토대왕이 호쾌하게 질주하셨다는 이야기 정도는 들어본 곳... 뭐 그런 정도의 이미지들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있는 정도랄까.


아, 하나 더 있다. 이런 거 ㅋㅋㅋ


2. ‘만주 인식’이라는 표현에는 ‘만주’가 지금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만주가 지금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의 당연한 일부라면 그것만 뚝 떼어내서 그에 대한 ‘인식’을 따로 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 따라서 ‘만주 인식’이라는 말은, 풀어쓰자면 “(지금 우리의 활동 공간이 아닌 타자로서의) ‘만주’에 대한 인식” 정도의 의미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책의 연구 대상인 ‘만주 인식’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국경선이 획정된 조선시대 이후에 새로이 등장한 것이 된다. (너무 당연한 건가;;;)


3. 이 책에 따르면 ‘만주 인식’이라고 할만한 것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대체로 호란 이후이다. 만주에서 발흥한 청나라의 침략으로 왕조가 위기에 빠지면서 만주에 대한 관심도 함께 고조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의 만주 인식에는 소중화론과 북벌론 등의 맥락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조선시대의 만주 인식은 호란으로 촉발된 위기에 대한 대응이라는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주 인식’이라고 할 때의 ‘만주’란 지리적 실체로서의 ‘만주’라기보다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대응을 논하는 과정에서 인용되는 추상적인 개념에 가깝다.


4. 이런 식으로 ‘만주’를 호출하는 방식은 이후에도 일관되게 이어진다. 특히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왕조의 멸망이 임박했던 19세기 말에는 민족주체성을 시급히 확립해야 하는 필요성의 맥락에서 만주가 호출되었고, 식민지 시기에는 거기에 더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해야 한다는 당면한 과제의 맥락에서 만주가 논의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의 모습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어떤 때는 우리가 과거에 영유했던 고토가 되었다가 또 어떤 때는 단군의 영역이자 민족의 시원이 되기도 했다.


5.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것은 식민지 시기부터다. 만주가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공간으로 우리 생활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의 근거지 마련을 위해 일제를 피해 만주를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고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고향에서 유리되어 만주를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중국 치하에서 겪는 열악한 지위와 처우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가 국내 언론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문제화되었다. 물론 이 재만한인문제 역시 다양한 맥락에서 전유되었지만 대체로 중국인들과의 평화로운 공존방법을 모색하는 정도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정도로 결론이 나곤 했다. 하지만 중일전쟁을 계기로 재만한인문제는 일제의 만주침략이라는 맥락과 연결되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현실의 필요에 따라 호출되는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만주’로.


6. 그렇다면 결국 ‘만주’란 일종의 기표 내지는 맥거핀일지도 모르겠다. 너도 나도 만주를 입에 올리고 목에 핏대를 세우지만, 그때의 만주가 정말로 구체적인 지리공간으로서의 만주일까. 그 이야기들은 단지 ‘만주’를 호출했을 뿐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만주가 아니라 다른 것에 따로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만주를 논하는 작금의 이야기들 역시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그 이야기들이 누구의 입/손에서 나와서 어떤 맥락에 따라 제기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7. 내가 이해하기에, ‘만주 인식’은 ‘만주(에 대한) 인식’이라기보다는 ‘만주(라는 수단을 빌어서 말하는 자신의 세계)인식’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이 책에서 더 재미있게 느낀 것은 ‘근대 한국인의 만주 인식’이 과연 무엇이냐가 아니라 ‘근대 한국인의 만주 인식’에 접근하는 이 책의 방식과 태도였다. 어떤 텍스트의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 그 텍스트가 위치한 맥락을 더듬는 것. 이것은 단지 역사학 연구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만사를 바라볼 때 우리가 견지해야 하는 태도이기도 하니까.


교정.

82쪽 14줄 : 이인회(李寅會)을 권유하여 -> 이인회(李寅會)에게 권유하여

200쪽 2줄 : 조신인이 만주로 -> 조선인이 만주로

218쪽 5줄 : 백두의 □(白頭之□)에 있었음은 -> 백두의[白頭之] □에 있었음은 (꼭 틀린 것은 아닌데, 다른 부분에서는 판독 불능 글자를 괄호 안에 표기하지 않았으므로 편집의 통일성을 위해서는 여기서도 괄호 안에는 판독 불능 글자를 표기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98쪽 2줄 : 목단강(牧丹江) 역 □산둔(□山屯)에서 -> 목단강(牧丹江) 역 □산둔(山屯)에서 (위와 같은 이유)

362쪽 12줄 : (□는 판독 불능 글자, 이하 동일 - 인용자) -> 판독 불능 글자에 설명은 218쪽에 이미 나왔으므로 여기에서는 삭제

390쪽 13줄 : 그러나 이글에서 -> 그러나 이 글에서

392쪽 17줄 : 잡단부락 정책은 -> 집단부락 정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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