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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서의 역사 (이영석, 아카넷, 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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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서의 역사 (이영석, 아카넷, 2017.)

Dog君 2018. 7. 7. 21:18


0. 연구소에서 조교로 일하면서 석사과정을 보냈다. 학술대회가 꽤 잦았는데, 소장이었던 교수님은 늘 이렇게 말했다. “학술대회 발표만 다 챙겨들어도 최신 연구서 몇 권 읽은 거랑 진배 없다.” (참고로 그 소장님, 이 책에 실명이 나온다 ㅎㅎㅎ) 그 때만큼 학술발표를 집중해서 많이 들을 일이 없어진 지금은 독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국내외 1급 연구자들이 오랜 시간을 들인 연구와 고민의 결과물을, 나는 불과 몇십 분만에 읽어낼 수 있으니 아니 이보다 남는 장사가 또 어디 있나. 자, 여기 어느 역사학자가 자신의 연구생활과 문제의식, 그리고 그것의 변화과정을 적어놓은 책이 있다. 나는 오늘 또 독자로서 남는 장사를 한다.


1. 역사학자가 자신의 생애와 연구생활, 문제의식을 적어둔 이런 책, 참 좋아한다. (문제는 이런 책이 많지 않다는 것인데, 지금까지 읽은 책으로는 심재훈의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정도가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이야기도 그렇고, 오래 전의 연구환경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 흥미진진하다.


  1960년대 중엽에 궁벽한 산촌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그 때 수학여행이란 단지 도회지 아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초에 아마 담임선생님이 처음 수학여행 이야기를 꺼내셨던 것 같다. 60명 남짓 되던 우리들 모두는 다 같이 좋아서 날뛰었고, 그 다음날부터 학교생활 자체가 여행 계획을 중심으로 짜여졌다.

  그 계획은 싸리나무 빗자루를 만들어 여행자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학교 수업을 끝낸 후에 곧바로 마을 뒷산에 올라 싸리나무를 베었다. 학교 운동장 빈터에 싸리나무 가지를 널어놓고 햇볕에 말린 후에 한데 묶어 빗자루를 만들었다. 인근 면소재지에 장이 열리면 교대로 나가 빗자루를 팔았다. 수입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시골 5일장이 열리는 날에는 서로 장터에 나가려고 열심이었다.

  드디어 6월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우리는 그 동안 모은 돈을 밑천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말이 수학여행이지 그건 하루 종일 산길을 걷는 도보여행이었다. 산을 넘는 도중에 미리 준비한 도시락 두 개를 까먹기도 했다. 몇 봉우리의 산을 넘었는지도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저녁 무렵에 정읍 칠보 수력발전소에 이르렀으니 무척 많이 걸었던 것 같다. 그곳은 당시 국내 유일의 유역변경식 발전소라 해서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 다음날 버스를 타고 인근 높은 산지에 펼쳐진 인공호수를 구경했다. 마침 이전 댐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새로운 댐을 건설하고 있었다. 공사감독의 배려로 현장에서 시멘트며 골재를 운반하는 케이블카에 올라타고 호수 전경을 한눈에 바라보는 행운도 누렸다. 원래 계획으로는 그날 버스 편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때마침 쏟아진 초여름 장맛비로 도로가 막히면서 공사판을 떠날 수 없었다.

  우리는 공사판 근처의 허름한 여관집에서 길이 다시 뚫릴 때까지 사흘을 더 머물렀다. 식사 때마다 우동과 자장면을 번갈아 시켜 먹는 것이 무척 신이 나기도 했다. 식사가 끝나면 빗발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널따란 방에서 끼리끼리 화투를 치며 놀았다. 비가 그친 후에 마을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예상치 못한 비용 때문에 우리는 얼마씩 돈을 더 걷어야 했다. 일부는 담임선생님이 부담하셨다고 들었다. (pp. 37~39.)


  당시 도서관 체제에서 산업혁명 연구에 필요한 도서의 해외구입은 거의 불가능했다. 국내의 다른 대학도서관을 뒤져서 찾아낸 책은 복사를 했지만, 그렇게 하고서도 찾지 못한 중요한 문헌들이 문제였다. 1980년대 국내에서 외국학을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경험이겠지만, 그런 문헌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여러 노력이 필요했다. 먼저 주요 도서관들을 훑은 다음에는 개인의 힘으로 해외에서 구입해야 했다.

  여기서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고인이 된 김진경 선생에 대한 기억을 적어야겠다. 그분은 고대 그리스사를 전공했고, 정치적인 문제나 또는 삶에 있어서도 보수적이었다. 출신지역에서부터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여러모로 나와 대척점에 있는 분이었다. 그러나 요즘 ‘보수’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달리 별로 명예를 탐하지 않았고, 지식인의 한계와 분수를 누구보다도 잘 아셨다. 학과장 이외에는 보직도 맡지 않았을 뿐더러 항상 연구실에서 책을 보셨다. 한편으로 공부는 부유한 사람이나 할 수 있다는 핀잔을 주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어려운 처지에 기를 쓰고 공부하는 모습을 기특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김진경 선생은 당시 옥스퍼드의 블랙웰출판사에 개인 구좌를 개설하고 있었는데, 도서를 주문한 다음에 그쪽에서 받은 인보이스를 제출해야 외화 결제를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김진경 선생의 계좌를 통해 책들을 구입했다가 나중에 내 개인 구좌를 개설해 해외도서 구입문제를 해결했다.

  1980년대 중엽에는 영국문화원의 도서대출제도에 크게 힘입었다. 다행히 몇 년간 문화원은 영국대학들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화원에서 사료집을 포함한 문헌을 신청하면 몇 달 후 영국 대학도서관 소장 자료를 본국에서 우송해 직접 대출해주었다. 몇 년 후 그 제도는 폐지되었지만, 나는 문화원을 통해 공장법뿐 아니라 산업혁명 전반에 관련된 중요한 편찬사료와 2차 문헌을 입수할 수 있었다. 대출료도 상당히 싼 편이었다. 가난한 동아시아 출신 학생에게는 참으로 엄청난 혜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문화원을 통해 나는 특히 여러 권의 『의회문서Parliamentary Papers』를 입수했는데, 그 중에는 1832년 의회조사위원회보고서, 1833년 공장조사위원회보고서, 19세기 전반 공장감독관 보고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의회문서는 일반도서보다 더 크고 무거웠다. 영국인들이 실태를 알았다면 깜짝 놀랐겠지만, 그 모든 자료를 나는 복사집에서 복사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내 연구실 서가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그 문서들은 후일 19세기 전반 공장개혁운동을 다룬 박사논문에 가장 긴요한 자료가 되었다. (pp. 114~115.)


2-1. 이런 글쓰기는 단지 재미뿐 아니라, ‘글쓰기’ 그 자체에 대해서도 꽤나 유의미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역사학 글쓰기의 다양성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식의 다양한 글쓰기는 역사학을 사랑하는 한 명의 독자 입장에서 너무나도 멋진 선물이라 아니 할 수가 엄따.


2-2.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자면 이런거다. 첫번째는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글쓰기라는 점이다. 나 이런 거 너무 좋다. 예전에 심재훈의 책에 대해서 "‘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재미있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 책 역시도 저자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사실 연구자에게 익숙한 학술적 글은 철저하게 몰개성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학술적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성이니까. 그러다보니 저자의 개성과 밀착된 현실/문제인식을 오롯이 읽어내기가 참 어렵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신의 현실/문제인식을 정리해주면, 독자 입장에서도 저자의 연구사적 위치와 의의를 이해하기가 정말 수월해진다.


2-3. 두번째는 독서의 효율성이 대단히 높다는 점이다. 한 달에도 수백 편의 논문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 시대에, 나와는 한참 먼 세부전공의 연구 흐름을 따라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 현대사 중에서도 경제 분야를 주로 보는 내가, 대체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서 산업혁명기 영국의 노동사 연구를 따라간단 말인가.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전체 연구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정리하고 주요 논점까지 짚어주면 그보다 더 효율적인 독서가 또 어디 있냔 말이다. 특히 나같은 한국사연구자로서는 한국에서 외국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독서를 통해서 각 분과의 문제의식까지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자꾸 심재훈의 책과 비교를 하게 되는데, 그 책도 딱 그랬다.)


(전략) 광주학살 이후 한국사회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기억한다. 그것은 소수 지식인운동 차원이 아니라 사회 각 부문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지식인운동, 문학인 및 예술인운동이 거의 동시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들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커다란 동력을 제공한 것은 학생집단이었다. 대학원에 다니던 젊은 연구자들이 이러한 운동 대열에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은 앞에서 밝혔듯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희생을 치른 수많은 친구와 동료들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후에 나는 비슷한 또래의 연구자들에게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1980년대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주로 전개된 진보적 학술운동은 이러한 부채의식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 자기합리화의 이론적 기반을 내세울 수 있었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변혁기에 처해 있으며, 일찍이 레닌을 비롯한 혁명가들이 그랬듯이 변혁기에 한국사회에 대한 현상분석과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는 당위론이었다. 물론 이 현상분석과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는 당위론이었다. 물론 이 현상분석과 새로운 전망, 그리고 그 전망에 이르기까지의 적절한 전략과 전술을 도출하는 학문 연구는 오로지 마르크스, 레닌을 비롯한 좌파사상가의 사회이론과 철학에 근거해야 했다. (pp. 133~134.)


3. 이 책을 골라든 이유는 역사학 글쓰기의 다양성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물론 문장이 너무 좋다는 지인의 추천도 한 몫 했다.) 2018년 현재, 텍스트를 생산하는 기존의 방식은 거의 완전히 붕괴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학 글쓰기는 어떤 방향으로 진화(=다양화)해야 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고민하면서 저자가 던지는 몇 마디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서사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뭔가 고민해결의 실마리 하나 정도는 붙잡은 듯 하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고민해야겠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나중에 혹시라도 저자를 만나뵙게 되면 손들어 질문하고 싶...은데 그럴 일이 올 것 같지는 않구나. ㅠㅠ


  인문학은 모름지기 전공의 구애를 받지 않는 다양한 독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학술논문 작성하는 기계가 되면서 교양인으로서 독서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역사가들을 다룬 한 사론집에서 나는 역사가들의 독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역사학자들이 박식하다고 생각한다. 책을 많이 읽었으리라고 넘겨짚는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꼭 그런것만은 아닌데, 젊은 시절을 제외하고는 책 읽는 시간을 충분히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논문 자료를 작성하기 위해 연구서나 저술을 읽고 검토하는 것도 책 읽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독서라고 말하기 어렵다. 말 그대로 연구의 일환이다. 적어도 순수한 독서라면 책 읽는 그 순간에는 다른 강박증을 갖지 않아야 한다. 아무런 부담감 없이 그 책의 내용과 논리에 빠져들어 저자와 대화를 나누거나 그의 주장을 다시 음미하는 기회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후략) (p. 56.)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을 바라보는 에번스의 입장은 ‘비판적 선택’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듯하다. 그는 객관성에 대한 회의의 분위기는 철저하게 배척하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실험이 기존의 역사서술과 다른 새로운 서술형식을 만들어나감으로써 역사학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역사학의 정체성을 고수하려는 의도에서 상대주의를 적극 비판하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새로운 표현형식들에서 ‘과학적 역사학’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다. 이를 위해 그는 무엇보다도 문학성의 회복을 주장하며,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역사가의 ‘장인적’ 태도를 강조한다. (후략) (p. 206.)


  나는 잃어버린 서사성을 되찾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임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이 서사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연구자마다 나름의 방법을 모색해야 하겠지만, 사료를 통해 다단계의 진단을 거치는 정교한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서사성은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듯한 스토리 중심의 형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다단계의 추론을 거쳐 얻어낸 것들을 풍경화 그리듯이 묘사하는 데에서도 서사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p. 216.)


  역사 지식은 왜 중요한가. 여기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다고 하자. 주위 사람들은 그의 행위를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어떤 기준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사람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정치인들은 역사지식에서 지금의 현실에 대처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교훈은 역사지식의 일반화와 관련된다. 일반화는 어떤 역사적 사실을 통해 얻어진 패턴을 비슷한 조건이라고 생각되는 사실들이 적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화의 배후에는 아마도 인간의 속성은 통시적이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자리 잡고 있을 법하다. (중략)

  그럼에도 역사가들은 이 같은 일반화에 가능하면 침묵을 지킨다. 영국혁명과 러시아혁명, 히틀러와 나세르는 동일한 조건이 아니므로 비슷한 패턴으로 일반화활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내심으로는 일반화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역사서술에서는 일반화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의 한 연구A Study of History』가 전문역사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그 책이 ‘도전과 응전’이라는 패턴을 통해서 문명의 흥망을 일반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토인비는 어느 역사가도 누리지 못한 대중적 명성을 얻었다. 일반화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과 일반화를 멀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역사가는 일반화의 어려움을 숙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작업을 포기할 수도 없다.

  정치인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상당수가 역사지식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대중을 겨냥한 역사관련 서적이 꾸준하게 팔리는 것은 우리나라는 포함하여 여러 나라에 공통된 현상이다. 정치인이건 일반 사람이건 역사에 관심이 많은 것은 단순히 교훈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러한 관심이 일상생활의 대화 또는 담론의 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언술을 통한 지배를 추구하려는 욕구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중략)

  또한 사람들의 원초적인 호기심도 역사서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중략) 이와 같이 일반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역사서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전문역사가의 역사서술은 그들에게 읽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을 겨냥하지도 않는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역사학이 실용성이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것은 기존의 역사서술이 일반 사람들의 관심을 스스로 멀리한 데서 부분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전문적인 역사서술은 일반 사람들은 고사하고 동료 역사가들마저 읽기 힘든 경우가 많다. 과거에 로런스 스톤은 ‘이야기체 역사’의 부활을 언급한 적이 있다. 물론 나는 역사서술이 객관성을 담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학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서술은 다만 그 형식에서 문학과 구별되지 않을 뿐이다. 원래 역사학은 문학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문학작품의 독자와 역사서술의 독자는 겹쳐 있었다. 그러나 사회사는 인접 학문 분야의 전문 언어를 차용하여 역사서술을 어렵게 만들었다. 전문 언어를 도입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인식의 지평은 넓혔지만, 그 대신에 역사서술의 전통적인 독자층을 잃었다. 사실, 역사서술이 문학과 비슷한 일반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문학적 수사를 내세워야 할 이유는 없다. 언어의 정확성은 역사서술의 의무이다. 역사학은 스스로 그 독자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pp. 318~321.)


ps. 원래는 교정 부분을 아주 막 열심히는 찾지 않는데, 이 책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찾게 됐다;;;


교정.

94쪽 10줄 : 제레미 벤섬

372쪽 벤섬, 제러미 항목 (94쪽과 372쪽의 표기 다름)

106쪽 6줄 : '주권主權' : 작은따옴표의 앞뒤가 바뀜.

224쪽 2줄 : (까지, 1997) -> (까치, 1997)

233쪽 11줄 : 특 전통적인 -> 특히 전통적인

239쪽 12줄 : 마틴 돈튼Ma. Daunton -> 마틴 돈튼M. Daunton

246쪽 12줄 : 복본위제 (금은 양본위제) -> 복본위제(금은 양본위제)

268쪽 18줄 : 존 흄John Home -> 존 흄John Hume (스코틀랜드의 극작가인 존 흄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치는 않음)

276쪽 4줄 : 중심-주변의 관계는는 -> 중심-주변의 관계는

285쪽 9줄 : 레닌-홉슨의 주장과

287쪽 2줄 : 홉슨-레닌 식의 (285쪽과 287쪽의 표기 다름)

301쪽 4줄 : 조지오 리엘로J. Riollo -> 조지오 리엘로G. Riello

319쪽 17줄 : 『역사의 한 연구A Study of Hisotry』 -> 『역사의 한 연구A Study of History』

324쪽 19줄 : 덜하겠지만). -> 덜하겠지만)

371쪽 데이비스, 나탈리 항목 : 134 -> 184

371쪽 도브, 모리스 항목 : 28. 71 -> 28, 71

371쪽 드브리스, 얀 항목 : 드브리스. 얀 -> 드브리스, 얀

371쪽 드브리스, 얀 항목 : 41~43 -> 41~43, 119

371쪽 레닌, 블라디미르 항목 : 212, 285 -> 212, 282, 285

371쪽 마르크스, 칼 항목 : 233~236 -> 233, 234, 236

371쪽 버크, 피터 항목 : 184~187, 199 -> 184~187

372쪽 스미스, 애덤 항목 : 260~264 -> 260~262, 264

372쪽 에번스, 리처드 항목 : 197~207 -> 197~199, 201~207

373쪽 위너, 마틴 항목 : 155~165 -> 155~157, 159~163

373쪽 유어, 앤드류 항목 : 301~306 -> 301~303, 305, 306

373쪽 톰슨, 에드워드 항목 : 227~233 -> 227~229, 232, 233

374쪽 퍼거슨, 애덤 항목 : 260~264 -> 260~262

374쪽 홉킨스 앤드류 항목 : 281~286 -> 281~284, 286

374쪽 흄, 데이비스 항목 : 266~271 -> 266~268, 270, 271


틀린 것은 아니지만 교정하면 좋은 것.

201쪽 15줄 : 이 새로운 경향은 지금까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주류 역사서술을 공격하는 양상을 보여주는데, 일종의 ‘정치적 교정political correctness’에 해당한다 :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특히 'political correctness’를 일반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으로 통용하는 것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물론 비문은 아니기 때문에 딱히 교정대상이라고 말하기 어렵기는 하다. 출처인 『역사학을 위한 변론』을 찾아보고 공부하면 될라나. 아, 그러면 결국 내 지력의 부족이 문제구나 ㅠㅠ


영문인명표기의 원칙 : 영문인명 중에서 명(名, given name)을 1)이니셜만 쓰는 경우와 2)전체 철자를 다 쓰는 경우가 혼재되어 있다. 처음에는 1)이니셜만 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서 2)전체 철자를 다 쓰는 경우만 체크했는데, 막상 체크하고 보니 양쪽의 비율은 대체로 비슷한 것 같다. 표기원칙을 어떻게 하느냐를 두고 독자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어느 쪽으로건 원칙을 통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전체 철자를 다 쓴 경우는 아래와 같다.

에드윈 셀리그만(p. 27.), 모리스 도브(p. 28.), 얀 드브리스(p. 41.), 헨리 헌트, 새뮤얼 뱀퍼드(이상 p. 60.), 에리히 프롬, 허버트 마르쿠제, 게오르그 루카치(이상 p. 62.), 이매뉴얼 월러스틴(p. 65.), 폴 스위지(p. 71.), 테오도르 몸젠(p. 107.), 새뮤얼 존슨(p. 108.), 맥신 버그(p. 117.), 얀 드브리스(p. 119.), 제프리 엘튼(p. 195.), 페르낭 브로델(p. 228.), 패트릭 조이스(p. 235.), 휴 트레버-로퍼(p. 260.),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애덤 퍼거슨, 윌리엄 로버트슨(이상 p. 261.), 존 흄, 제임스 맥퍼슨, 토비아스 스몰렛, 제임스 보스웰(이상 p. 268.), 제임스 후턴, 제임스 와트, 존 밀라(이상 p. 269.), 토머스 제퍼슨(p. 275.), 레오폴드 폰 랑케(p. 311.), 앤서니 이든, 아널드 토인비(이상 p. 319.)


영문인명표기의 위치 : 장절과 무관하게 최초등장한 쪽에만 영문인명을 표기하면 좋겠다 싶다. 1)최초등장시가 아니라 재등장시에 표기가 되었거나 2)재등장시에도 영문이 한 번 더 표기되어 삭제하는 것이 좋아 보이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얀 드브리스(p. 119. -> 삭제), 레닌(p. 282. -> p. 64.), 조지 트리벨리언(p. 207. -> 삭제), 랑케(p. 311 -> p. 228.), 윌리엄 호스킨스(p. 239. -> 삭제), 존 해리슨(p. 240. -> 삭제), 애덤 스미스(p. 261 -> p. 260.), 데이비드 흄(p. 261 -> p. 260.), 애덤 퍼거슨(p. 261 -> p. 260.), 아널드 토인비(p. 319., p. 333. -> 삭제)


영문인명표기 그 외 : 칼 마르크스, 리처드 에번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임마누엘 칸트, 에드워드 톰슨은 영문 표기가 없다. 물론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므로 굳이 표기가 필요없기는 하다(만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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