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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학의 기원 (신주백, 휴머니스트, 20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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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학의 기원 (신주백, 휴머니스트, 2016.)

Dog君 2018. 7. 10. 21:08


1. 한국 사회에서 역사학이 차지하는 위치란 어떤 것일까. 요새 그 고민이 부쩍 커졌는데, 그러다가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의 궤적을 밟아보는 것이 먼저가 아니겠나 싶어서 골라든 책. 학문적인 성실함으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저자이므로 믿고 읽었습니다.


2. 저자는 한국의 근대역사학을 제도, 주체, 인식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여기서 제도라 함은 역사를 담당하는 국가기관 혹은 각 대학의 사학과를 지칭하고, 주체라 함은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역사학자들의 면면과 그들 사이의 연결망을 지칭하며, 인식이라 함은 그들이 수행했던 역사학의 연구성과 내지는 사관史觀을 지칭한다. 그러니까 한국의 역사학은 그냥 그 자체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제도와 연줄 같은 물리적인 조건들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라는 말일텐데, 이 말은 조금 더 확장하면 역사학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가 역사학이라는 담론체계를 규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전략) 원래 38도선은 일본군의 패전 이후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처리하기 위해 설정한 항복 접수 경계선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처리하는 과정이 한반도의 분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좌우 세력 또는 남북한 사이에 대결이 격화되고, 미국과 소련의 세력 경쟁이 치열해지는 과정에서 경계선은 분단선으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그 와중에 한국에서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정치적 목표와 개인의 운명을 일치시켰던 사람들이 주류세력으로 부상했다. 이후 분단은 서로 다른 이념을 우선시하는 체제 사이의 갈등을 압축하는 말이 되었고, 이념이란 잣대가 ‘역사적 사실’과 인식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분단체제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보호장치 역할을 하고, 동시에 식민주의 역사학은 분단체제의 촉진제로 작용해왔다. 더 나아가 식민주의 역사학은 냉전세력에 영합하여 베트남, 중국과 대만, 그리고 한반도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지역의 분단체제를 주목하지 못하도록 작용했다. (pp. 19~20.)


3. 제도, 주체, 인식의 세 측면을 모두 살폈을 때, 한국 근대역사학의 가장 먼 계기는 식민지 시기(혹은 일본)의 역사학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라는 분과체제는 당장 일본의 근대역사학에서 비롯한 것이고, (근대 일본에서 '동양학/사'라는 분과가 성립하는 과정은 스테판 다나카의 『일본 동양학의 구조』를 참고) 이것이 별다른 저항 없이 이식된 결과가 지금 한국 역사학의 기본 프레임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본에서 역사학 연구와 교육이 3분과체제로 귀결되는 과정은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전쟁, 1910년의 한국병합까지 일본의 대외침략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특히 동양사학은 일본사회의 정치적 요구를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독립한 학문이었다. 즉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 맹주인 청을 이기면서 자신감을 가졌다. 이어 서양과 구별되면서도 그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일본이 주도하는 동양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후략) (p. 105.)


  세 대학(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옮겨쓴이)의 역사학 관련 학과의 교수진 사이에는 역사를 연구하는 목적과 역사관에서 학과의 주류와 다른 입장이 분명히 있었다. 당시 역사학 관련 학과 교수들의 경향을 크게 나누어보면 문헌고증사학과 민족주의사학, 신민족주의사학, 유물사학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에서 식민지 시기의 민족주의사학을 계승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유물사관에 입각한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을 주장하는 교수진은 확인할 수 있는 선에서 이능식과 김석형이 있다. 신민족주의사학이라고 한다면 이인영 등을 들 수 있겠다. 유물사관론자든, 신민족주의사학자든, 역사학 관련 학과에서 그들은 소수였다. 반면에 사람 수로도 대부분이었고, 역학관계로도 연희대를 제외하고 각 대학의 사학과를 주도한 인사가 많았다고 말할 수 있는 역사학은, 문헌고증사학이다. 

  결국 학과를 기본 단위로 하는 본부-단과대학-학과라는 미국식 대학시스템을 도입했지만, 사학과의 제도, 주체, 인식에는 일본 잔재가 짙게 남아 있었다.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앞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역사학 관련 학과들은 식민지 시기 대학에서의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에 대한 반성과 성찰없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대학의 역사학 관련 학과는 처음부터 제도와 인식에서 식민성과 분절성을 내재한 채 출발한 것이다. (pp. 294~295.)


  이렇게 국사, 동양사, 서양사라는 구색에 맞추어 전임교수진을 충원할 수 있었던 것은 경성제국대학 출신자, 그리고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과 와세다대학 같은 사립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현대 한국 역사학의 주도권은 제도라는 형식뿐 아니라 그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까지 사학과의 태동 단계에서부터 일본이 소화한 근대 지식으로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이 장악했던 것이다. 달리 짚어보면, 조선학운동이나 여타의 민족운동에 관여한 역사학자는 극소수였다. 이는 새로운 민족국가 수립에 부응할 수 있는 역사상을 마련하려는 상상력과 연구기획을 애초부터 기대하기 쉽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학연의 힘도 학과 결성에 또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다. 경성대학 사학과 설립 당시 교수진 4명 가운데 3명이 와세다대학 출신이었고, 연희대 사학과는 연희전문학교 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고려대 사학과는 신석호를 중심으로 경성제국대학 출신자들이 만들었다. 특히 연희대 사학과와 서울대 사학과 및 사회생활과에서 학연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이 뚜렷이 나타났는데, 이는 폐쇄성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자신만의 학풍을 발빠르고 확실하게 수립하는 데 유리했을 것이다. (pp. 342~343.)


4. 또 하나의 계기는 한국전쟁과 분단이다. 한국전쟁으로 그나마 남한의 역사학계에 남아있던 (문헌고증사학이 아닌) 소수의 목소리까지 거의 송두리째 사라져버렸고, 그 결과는 현실문제, 즉 분단과 독재에 대해 철저히 침묵한 문헌고증사학의 독무대였다. 아니, 침묵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정치권력이 요구하는 딱 그만큼의 인식을 ‘맞춤생산’해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후진성, 침체성, 정체성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용한 당대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후진성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연구가 경제개발계획을 더욱 치밀하게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후진성의 극복이란 바로 근대화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정체성론이 후진성담론과 뒤섞여 학문의 연구주제로 당당히 복귀한 것이다. 1960년대 들어 월트 W. 로스토(Walt W Rostow)류의 근대화론이 한국에서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던 내적 토양의 하나도 여기에 있었다. (p. 379.)


5. 이런 분석을 기초로 저자가 결론 내리는 한국 역사학의 초창기 모습은, 인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식민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데(식민성), 특히 3분과 체제로 나뉘어 있다는 체제 자체가 식민지와의 연속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었고(분절성), 거기에 더해 분단상황은 학문의 자유와 다양성을 위한 최소한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은(분단성), 기괴한 것이다. 결론이 왜케 우울하냐.


6. 제도의 측면에서 한 가지 보태고 싶은 것이 있다. 순수하게 개인적인 것이기는 한데... 제도의 측면에서 볼 때 조선사편수회를 직접 이었다고 할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 대한 분석을 보태는 것은 어떨까 하는 작은 아이디어. (식민지 시기에는 조선사편수회를 다루다가 해방 후에는 대학 사학과를 다루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신석호가 나서(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 조선사편수회의 자료를 고스란히 인수한 ‘국사관’을 만든 것이 1946년 3월 말이다. 해방되고 불과 반 년 만이니, 꽤나 발빠르게 움직였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 이후로 (조선왕조실록 영인본을 간행한 것을 제외하면) 몇십 년간 국편의 활동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국편에서 직접 간행한 국편 몇십년사...하는 책을 봐도 그렇다. 해외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국사편찬위원회라는 조직이 해방 뒤 불과 반년만에 만들어진 것도 그렇고, 그 이후로 한참동안 무슨 활동을 했는지 베일에 싸여 있는 것도 그렇고... 국편이라는 조직에 반영된 정치권력(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의 역사관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알아보는 것, 꽤 재미있지 않을까.


7. 궁금증도 하나 있다. 저자는 제도, 주체, 인식의 측면에서 역사학을 분석했는데, 천관우와 김용섭의 등장을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주체와 인식의 측면에서 설명을 하고는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좀 더 알고 싶은 느낌이 있다. 그러니까 저자에 따르면 해방 이후의 한국 역사학은 문헌고증사학이 거의 완전히 독식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문헌고증사학이 제도와 주체와 인식을 완전히 독점한 상태에서 천관우와 김용섭이 등장하게 된 것은 뭔가 좀 더 크고 다른 맥락이 따로 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무런 근거 없는) 느낌적인 느낌이 자꾸 든다 말이다. 그리고 이 궁금증은 70년대와 80년대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문헌고증사학이 완전히 쪼그라든 것 역시 이 질문의 연장선 위에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ps. 에잇. 독후감이랍시고 뭐라뭐라 쓰긴 했는데, 내 이해력이 짧으니 독후감도 괴발개발이구만. 아, 내 부족한 내공이 오늘도 또 원망스럽습니다.


교정.

375쪽 10줄 : 엮임했지만 -> 역임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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