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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자들 (주승현, 생각의힘,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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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자들 (주승현, 생각의힘, 2018.)

Dog君 2018. 7. 14. 12:43


1-1. 김학재는 『판문점 체제의 기원』에서 현재 한반도의 분단체제(저자가 ‘판문점 체제’로 명명한)가 정치적·군사적으로만 미봉된, 불완전한 평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평화상태를 논하기 위해 에밀 뒤르켐을 빌어와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를 제시한다. 결론이 본문만큼 구체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저자가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라는 말을 통해 정확히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전쟁이 없는 정도의 소극적인 평화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전반적인 결속력과 이해력이 필요하다는 의미 정도가 아닐까 싶다. 평화니 통일이니 하는 것이 양측의 정치리더가 마주 앉아서 도장 찍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 구성원 전체가 평화와 통일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절한 제안이다.


1-2. 남한과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각각 마주 앉았고, 그 덕에 상황의 진전이 매우 빠르며, 거기에 우리 모두 열광하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테레비 속에 있는 정치인들이 손잡고 악수한 다음에, 그들이 이야기했던 것들이 현실 속의 내 삶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과연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2. 어쩌다가 우연히 주승현의 『조난자들』을 『판문점 체제의 기원』에 이어서 읽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내용이 무척 매끈하게 이어지는 느낌이다. 뭐랄까, 마치 김학재의 질문에 대해 주승현이 답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에 대한 주승현의 답변이 무척이나 우울하다. 남한 사회는 당장 제 의지에 따른 탈북민들조차 온전히 품어안을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승현은 북에도 남에도 속하지 못하고 탈북과 탈남을 반복하거나 사회 적응에 끝내 실패하곤 하는 탈북민을 두고 ‘조난자’라는 표현을 쓴다.


  1961년 8월 13일, 위기의식을 느낀 동독 공산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동~서 베를린을 연결하는 13개의 주요 도로와 80여 개의 거리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베를린장벽을 건설하며 봉쇄에 들어갔다. 베를린 시민들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경악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 후인 8월 15일, 동독의 군인이었던 한스 콘라드 슈만Hans Conrad Schumann이 분단선을 뛰어넘어 맨 처음 탈출했고, 28년 후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2,000명이 넘는 장교와 병사들이 서독으로 목숨을 걸고 건너왔다.

  콘라드 슈만은 냉전시대에 자유의 아이콘으로 상징되었으나, 그는 서독으로 건너간 후 오랫동안 우울증과 외로움에 시달렸고 독일이 통일된 후인 1998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그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죽음의 이유를 알고 있다. (후략) (p. 24.)


  2017년 11월 13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는 영화와 같은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다. 북한군 병사 한 명이 지프를 타고 공동경비구역으로 돌진한 후 수 발의 총탄을 맞으며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것이다.

(중략)

  가장 큰 문제는 사경을 헤매는 탈북 병사를 바라보는 천박한 관음증과 이념적 프레임에 있다. 의료진은 치료 중인 병사의 상태를 브리핑하면서 그의 몸속에 있는 수십 마리 기생충의 크기와 내장의 분변, 위장에 들어 있는 옥수수 알갱이 사진까지 적나라하게 공개했고, 그로 인해 탈북 병사의 인격과 존엄은 보호받지 못했다. 만약 그가 탈북 병사가 아니라 한국 국민이라도 그러했을까.

  국민의 알 권리를 고려하더라도 그의 상태를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혼수상태였던 탈북 병사의 동의나 의지는 애당초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의료진은 국방부와의 협의만을 통해 공개했다고 해명했을 뿐 그 어떤 자성이나 반성은 없었다.

(중략)

  의료진의 브리핑 이후 정의당 김종대 국회의원이 환자의 개인정보를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은 “인격 테러’ “의료법 위반”이라고 지적하자, 곧바로 종북 프레임이 가동되었다. ‘종북 몰이’가 시작된 것이다. 탈북 병사의 몸 상태를 공개한 것은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여론이 김종대 의원과 정의당을 몰아쳤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사과해야 했다. 어쩌면 평소 북한 인권이나 탈북민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진보 진영 스스로 초래한 업보일지도 모른다. 왜 우리나라의 진보 진영은 북한 주민과 탈북민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침묵하는가. 인권 문제에 관해 침묵하는 진보는 결코 진보가 아니다.

(중략) 탈북 병사의 키와 몸무게, 영양 상태까지 다루며 상업주의를 되풀이하던 언론은 급기야 “근육질의 몸매와 현빈을 닮은 병사”라는 새로운 신변잡기로 선정적 보도를 이어갔다. 결국 국방부와 의료진은 공로를, 언론은 시청률을 챙겼지만, 탈북 병사는 인격을 잃었다. 이 사건 이후 어떤 이들은 탈북민과 함께 식사하는 것조차 꺼리기도 했다.

  한국정부와 의료진은 총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는 탈북 병사를 신속하게 치료했고 적절하게 보살폈다. 다만 그 다음이 문제다. 그의 이름과 신상, 건강 상태가 과도할 정도로 언론에 노출되는 과정에서 그의 인격과 존엄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의도적으로 방기되었고, 언론은 이를 이용하여 장사를 했다. 탈북 병사의 삶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사회라는 새로운 사선 앞에 놓이게 될 것이다. 개인정보가 공개된 그는 온갖 혐오와 편견에 맞서 위태로운 싸움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분단의 슬픔은 이 지점에서부터 거듭 시작된다. (pp. 103~105.)


3-1. 내가 이 책에 흡족했던 이유는, 당위적으로 결론을 내는 안이함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탈북민들의 부적응문제가 단지 남한 사람이 속좁고 거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소외와 배제가 일상화된 남한 사회에서 탈북민에 대한 포용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여전히 탈북민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라기보다는, 북에 대한 체제의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한 ‘소재’일 때만 존재를 긍정받을 수 있다.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남한 사회에가 그들에게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하게 될까. 얼핏 생각해도 낙관적인 결론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3-2.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김학재가 말한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의 의미가 아마 이 근처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퍼뜩 들었다.


  마침내 종로에 있는 일식당에 취직했다. 하나원에서는 “한국은 북한과 달라서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라고 교육했고 나는 그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남들이 여덟 시간 일할 때 나는 열두 시간 일했다. 배달과 주방일 외에도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드디어 첫 월급봉투를 받은 날, 나는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동료들보다 더 일했음에도 월급은 그들보다 수십만 원이나 적었던 것이다. ‘노력과 대가는 비례한다’는 상식적인 논리조차 탈북민에게는 예외였다.

  내가 입국했던 십여 년 전과 비교하면 현재 사정은 나아졌을까. 2014년 통일부와 하나재단에서 발표한 「탈북자·탈북 청소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탈북민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에 비해 3시간 더 많지만 월 평균 소득은 76만 원 정도 더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탈북민의 평균 소득은 146만 원으로 노동자 평균소득의 절반도 안 되며, 탈북민 실업률도 평균 실업률보다 네 배 넘게 높다. (중략)

  뿐만 아니다. 2007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표한 「북한이탈주민의 범죄 피해 실태 연구」에 따르면, 탈북민의 범죄피해율은 24.3퍼센트에 달한다. 이는 평균 범죄피해율 4.3퍼센트의 5배가 넘는 수치다. 사기피해율도 탈북민 5명 중 1명꼴로 평균 사기피해율의 43배에 달한다. 2016년 기준 한국인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4.6명으로 OECD 회원국 중 13년 연속 1위였다. 그런데 탈북민의 자살률은 그의 3배에 달한다. (중략) 이처럼 자살자가 급증하는 것은 ‘따뜻한 남쪽 나라’인 줄 알고 넘어왔던 한국에서의 삶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고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탈북민의 한국사회 적응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대체적으로 탈북민 스스로의 의지, 탈북민 정책, 탈북민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라는 삼박자가 고루 갖춰져야 한다고 말한다. 대체로 동의한다. 무엇보다 한국사회에 적응하려는 탈북민의 의지는 과거에 비해 높게 나타나고 있다. 2010년 이전까지는 주로 정치·경제적 이유로 생존 그 자체를 위해 탈북했다면, 최근에는 보다 나은 사회에서 살겠다는 의지로 한국에 입국하는 이민형·목적형 탈북민이 들어나는 추세다. 이런 탈북민의 특성을 고려해 정부정책도 지원형에서 자립형 정책으로 전환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중략)

  탈북민이 가장 문제로 꼽는 것은 경제적 빈곤이나 정착 관련 정책보다 탈북민을 대하는 한국사회의 편견과 차별, 배제가 압도적이다. 이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배태하고 있는데, 첫 번째가 오랜 분단 시대가 만든 적대와 대립의 아비투스habitus로, 관습의 차원에서 유래한 것이다. 반공·반북 의식의 오랜 관습은 북한 정부뿐만 아니라 탈북민에게까지 그대로 투영된다. (중략)

  두 번째는 남북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였다는 우월적 인식에 기인한 태도다. 못나고 가난한 아우를 바라보는 묘한 승자적 감정이다. 탈북민은 일상의 자리에서부터 끊임없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생존과 생계의 기회를 얻는다. 이를 강요하고 탈북민을 하대하며 카타르시스를 얻는 사람들을 직면하는 것은 언제나 불편한 일이다.

  세 번째는 무한경쟁사회가 초래한 소외와 배제다. 탈북민은 한국이라는 처음 맞이하는 막막한 환경에서 홀로 서야 한다. 무한경쟁사회에서 탈북민은 애초부터 포용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경쟁에서 배제된 채 과연 홀로 선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무엇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한국사회에 실재하고 있는 탈북민에 대한 편견과 차별, 배제가 북한 주민들에게 전해질까 하는 우려다. 사실 오래전부터 북한 주민들은 당국의 선전을 통해서든 탈북민을 통해서든 한국이 무한경쟁사회라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탈북민은 한국이 북한보다 나을 거라는 희망과 우리는 결국 한 동포라는 믿음으로 탈북을 감행한다. 하지만 탈북에 성공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직면하는 지독한 편견과 차별, 배제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이런 사실을 북한 주민들이 알게 된다면 한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남한이 주도하는 통일을 더욱 강력하게 거부할 것이며, 통일 그 자체에 대한 열망도 사그라들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것이 두렵다. (pp. 41~44.)


4. 나는 작금의 예멘난민 문제가 향후 탈북민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예측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될 수 있다 생각한다. 물론 예멘난민 문제가 단지 당위적인 원칙을 확인하는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나도 알고 있다. 당위를 떠드는 것이야 쉽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서는 몇 배의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당장 몇백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저 난민을 두고도 이렇게들 말이 많은데, 북한 사람들한테는 어떻겠는가. 지금이야 체제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라도 탈북민들을 써먹지, 내 몫의 경제가치를 염치없이 가져가는 존재로 인식되는 때가 언젠가 틀림없이 올텐데 그 때부터는 또 어쩔 것인가.


교정.

44쪽 4줄 : 포용이 대상이 -> 포용의 대상이

58쪽 6줄 : 멘토-맨티의 -> 멘토-멘티의

147쪽 1줄 : 남아프라카공화국 -> 남아프리카공화국

193쪽 20줄 : 친입(?)해오는 -> 침입(?)해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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