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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히스토리쿠스 (오항녕, 개마고원, 2016.)

Dog君 2018. 7. 14. 13:17


0. 역사학의 사회적 의미를 고민하는 독서 중입니다. 오늘은 오항녕의 『호모 히스토리쿠스』입니다.


1. 역사학이 세상에 호출될 때는 언제인가. 대체로 사극 보면서 "이거 이거, 역사적으로도 이런 거야?”라는 질문에 대해서, “네, (엣헴-) 이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데, 저건 극적인 상상력이고, 그건 고증이 틀렸네요.”하는 정도 아닌가. 이건 좀 이상하다. 역사학이라는 학문이, 왼쪽에 사료 놓고 오른쪽에 사극 놓고, 다른그림찾기 하는 건 아니잖은가.


2. 물론 과거에 있었던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역사학에서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내 말은, 그게 다가 아니고 다른 것도 더 있어야 한다는 거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역사학이 단지 호고주의자의 전국지식자랑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위한 학문이라면, ‘역사학’이라는 수단만이 줄 수 있는 통찰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못할 때, 설 뭐시기니 최 뭐시기니 하는 약장수들이 역사학으로 매명買名하며 그것을 퍼포먼스의 수단으로나 써먹는 지적 게으름의 토양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역사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살던 인간과, 역사를 배우는 인간 사이의 괴리가 크다.

  이 괴리를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운 역사를 돌아보면 분명해집니다. 한국에서 역사학과는 서양사학과/동양사학과/(한)국사학과로 나누어져 있거나 ‘사학과’로 존재합니다. 중등교육의 역사과목은 (한)국사입니다. 이 과정에서 외국의 경우든 한국사회에 대한 역사든 역사=국사로 생각하도록 배웠습니다. (중략)

  기록의 생산, 전달, 이야기라는 ‘인간이 하는 역사 활동 영역’이 고려되지 않은 것은 물론입니다. 그 활동이 만들어낸 나의 일기, 가족사, 기업이나 종교단체 등 사회사, 각 지방의 지역사, 동아시아 연계사 등을 다루지 않습니다. 그것을 전달하고 이야기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중략)

  우리가 살핀 역사의 세 범주 중에서 ‘이야기’ 부분만, 그것도 ‘논문’의 형태로만 생산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현재 한국의 역사학계입니다. 나머지 역사 영역은? 방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100인데, 정규 중등·고등 교육에서 가르치거나 접하는 역사는 10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면 역사가 재미있겠습니까? 그만큼 내 삶과 거리가 있고, 내 삶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말입니다. (pp. 102~104.)


  언젠가 ‘모든 역사는’이라는 검색어로 포털에서 검색을 하니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표제어가 제일 먼저 검색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만큼 많이 쓰는 말이라는 뜻이겠지요. (중략) 이 말은 역사 또는 역사기록의 한계를 언명하는 가장 소박한 형태의 냉소冷笑이기도 합니다.

(중략)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승패가 그리 많지 않듯, 사회나 나라에서도 승패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승패가 갈리는 선거가 이어지지만, 매년 예산을 짜고 그에 따라 세입과 지출이 이루어지고, 시민들은 그 틀에서 경제활동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중략) 이렇게 보면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말은 세상의 수많은 일 가운데 해당되는 경우가 별로 없는 명제입니다.

  또한 승패가 나뉘는 경우에라도 그 사건 자체의 세팅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 사건에 대한 관찰이나 기록이 승자에 의해 왜곡된다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승패가 나뉘는 사안 또는 사건이라는 사실과, 그 승패가 승자의 손에 왜곡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승패가 갈리는 그 사실을 승자만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견해가 옳다면, 우리가 역사의 패자에게 보내는 그 많은 관심은 어디서 왔을까요? (중략) 그렇습니다. 승패가 나뉘고 그것이 기록될지라도 역사가 승자의 눈으로만 기록되지 않습니다. (중략)

  이 관점에는 무엇보다도 일부에 대한 진실로 전체를 덮어버리는 지적 게으름이 숨어 있습니다. 원래 게으름은 모든 냉소의 공통된 속성이며, 냉소만큼 비생산적인 감정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냉소는 신이 없거나 신이 인간을 미워한다는 증거라고. (pp. 213~216.)


  늘 기초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공부의 기초는 사실의 확인입니다. 사실과의 관계에서 추론이나 허구가 사실에 기초한다면 상상력이지만, 추론이나 허구가 사실을 부정하거나 파괴한다면 왜곡이 됩니다. 뒤의 경우라면, 추론은 학문적 정당성을 잃고, 허구는 역사와 결별합니다.

  그 사실 또는 사건에는 세 가지 요소, 즉 객관적 조건, 자유의지, 우연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종종 그중 하나만 가져와 마치 그것이 그 사태의 원인인 듯 설명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안이함입니다. 권력욕, 묵은 감정, 원한 등과 같은 인간의 의지에 속한 것만 강조하면 역사속의 인간을 쉽게 미워하고 비난합니다. 그 사건이 누군가의 의지나 욕망 때문에 생겼다고 이해하면 사태의 결과에 대해서도 도덕적 잣대가 작동하게 마련입니다. 패싸움론=당쟁론은 식민사관의 결과만이 아니라 불성실한 역사탐구, 안일한 역사이해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생길 수 있고 누구든지 빠질 수 있는 역사의 신이 만든 함정입니다.

  그러나 구조와 조건만 절대화하는 안이함에 빠지면 이번엔 무기력해집니다. ‘탓’만 하다 끝나고 정작 인간이 상황을 타개하려는 힘도 극복하려는 의지도 한켠으로 제쳐놓습니다. 결과는 다르겠지만 이 역시 역사를 탐구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pp. 23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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