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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를 말하다 (우치다 다쓰루 외, 이마, 2016.)

Dog君 2018. 7. 23. 17:51


1. 나는 지금이 반지성주의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골치아프게 깊은 생각 안 하려 하고, 다른 이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으며, 시장가치로만 모든 것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 곧 반지성주의 아닌가. 지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곧 반지성주의 아닌가.


2. 인문학(역사학)의 위기의 여러 원인 중 하나도 분명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지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니 좀 더 나아가 지성에 대해 적대적이기까지 한 시대적 분위기가 인문학이라는 지적 행위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 아닐까. 


3. 제목은 '반지성주의'라고 달려 있지만, 기실은 '지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다. 이 역시도 요즘 준비하는 글을 위해 잘 녹여봐야겠다.


  ‘일본의 반지성주의’라는 (원서의) 제목은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명저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가져왔다. (중략) 부언하자면, 그의 발언은 단순한 ‘지식인 대 대중’이라는 이원론이 아니다. 경험적으로 깨달은 바에 따르면 지식인 자신이 종종 최악의 반지성주의자로서 행동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중략) 반지성주의를 움직이는 힘은 단순한 게으름이나 무지가 아니라 대개 ‘외곬의 지적 정열’이기 때문이다. (중략)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무지란 지식의 결여가 아니라 지식의 포화 상태로 인해 미지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중략)

  ‘반지성주의’라는 말 반대쪽에 있는 것부터 상상해 보자. 반지성주의자는 종종 소름 끼칠 만큼 박식하다. 자기가 들고 온 보따리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데이터나 증거, 통계 수치를 한없이 얼마든 지 꺼낼 수 있다. (중략)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 이상 사물의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나한테 맡길 생각이 없다. ‘네가 동의를 하건 말건 내 말의 진리성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반지성주의자들의 기본적인 태도인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 「반지성주의자들의 초상」, pp. 14~16.)


  반유대주의에 나타난 ‘음모 사관’은 반지성주의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나는 그것을 ‘반지성’이라고 판정한다. (중략)

  이러한 무력감, 무능하다는 의식에서 음모 사관은 싹튼다. 음모 사관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장본인’이 어딘가에 있다는 가설이다. 얼핏 보면 지리멸렬하고, 어떤 법칙성도 따르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며, 실로 ‘예상 밖’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의 배후에는 타인의 고통을 통해 온전히 수익을 올리는 음모 집단이 존재한다는 가설 말이다. 이런 서사에 매달리는 역사적 관점을 음모 사관이라고 부른다.

(중략)

  음모 사관의 본질은 이러한 추론 형식으로 나타난다. 우선은 ‘거대한 정치적 주체가 아무도 눈치 못 채게 활동하는 것’을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그다음에야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를 묻는다. 중요한 점은 ‘음모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누구인가 하는 점에는 부차적인 중요성밖에 두지 않는다. (중략)

  숱한 음모 사관론자는 이랬다저랬다 ‘범인’의 지목을 번복하면서도 그런 짓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략) 이 사건의 과정을 죄다 통제하는 단일한 범인이 존재한다는 신념만 강하게 부여해 주기만 한다면, 누가 범인이든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략)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서사의 맨 첫 계기가 강렬한 ‘지적 갈망’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이 책을 환영한 독자들의 지배적인 반응이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을 일거에 풀어 주어 고맙다는 커다란 해방감과 감사였다는 점도.

  역사적 변동(중략)에 맞닥뜨린 사람들이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며 당면한 사태를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은 인간 지성의 자연스러운 발로다. 온전한 지성의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적 갈망이 어디에선가 반지성으로 전락했다. 대체 어디에서 고꾸라졌을까?

  약간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한마디로 반지성의 원인은 그들이 자기들 수준의 지적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우치다 다쓰루, 「반지성주의자들의 초상」, pp. 20~25.)


(전략) 대중 민주주의의 시대를 맞이하여 반지성주의는 대중의 항상적인 에토스가 될 가능성이 생겼다. 이 세상에는 ‘지성의 불평등’이 늘 존재하고, 이 불평등은 실제적인 부와 권력의 불평등과 연관된다. (중략) 만인에게 동등한 권리가 있고, 그러기에 동등한 발언권이 있다는 전제 위에 성립한 민주제에서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지성의 불평등’과 그와 연관된 ‘현실적 불평등’은 언제나 납득할 수 없는 부정(不正)으로 나타나 불만의 씨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현실에 존재하는 차이를 부인함으로써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악당으로 몰아붙인다. 이러한 사고 회로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라는 근대성 원리의 그늘이며, 일찍이 니체나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가 경종을 울린 대중 사회의 악몽이다.

(중략) 나아가 객관적 사실에 의해 ‘○○’의 지적 우위를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라도,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일 전반이 실은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발상이 나온다. 실로 이것이야말로 반지성주의의 테제인 것이다.

(중략) 대중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그 과정이 진화하면 진화할수록 반지성주의의 위험성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중대한 난제를 껴안고 있다. (시라이 사토시, 「반지성주의, 그 세계적 문맥과 일본적 특징」, pp. 60~61.)


  대학의 변질, 학문의 변질이라는 주제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은 대단히 방대하다. (중략) 학문이 공공연하게 계몽주의를 방기했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말해 학문의 소명인 ‘인간성의 완성’ 이념을 아카데미에서 추방했음을 뜻한다. (중략)

  이러한 변화는 예컨대 인문주의적 학문 전통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난다. 인간성의 완성 따위를 지향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인간성을 주제로 삼는 학문 분야는 대학 운영에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여겨질 뿐이다. 따라서 규모의 축소, 연구와 교육 담당자 감원, 결국에는 부문의 폐지가 이루어진다. (시라이 사토시, 「반지성주의, 그 세계적 문맥과 일본적 특징」, pp. 72~73.)


  지성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보통은 ‘사물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딱히 이 대답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그것이 영원에 관한 문제 같은 것이라면 그런 대답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중략) 그렇지만 이 세계에는 깊이보다 빠름을 요구하는 문제도 있다. (다카하시 겐이치로, 「’반지성주의’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어쩐지 ‘반지성주의’ 같아서 꺼림칙했기 때문에 ‘자, 그럼 무엇에 대해 글을 쓸까’를 생각하고 써 본 글」, p. 116.)


(전략) 분명히 지식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사용하면 거대한 외부 기억 장치를 사유물로 삼을 수 있으니까요. 예컨대 위키피디아의 정보는 죄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을 강화하거나 늘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기 머릿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추리나 직관의 틀 자체를 정보 입력이나 환경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재조직하여 고도화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앎의 시스템이 지닌 가능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 이것이 지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술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나코시 야스후미·우치다 다쓰루 대담, 「신체를 통한 직감지」, pp. 204~205.)


(전략) 과학의 진보에 비례하여 더 잘 이해한다거나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파고 들어감에 따라 이웃한 연구 영역 사이의 벽, 전문화의 장벽이 더 높아진다. 아까 서술했듯 연구 내용은 전문가 이외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간다.

  “충분히 발달한 과학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은 SF작가 아서 클라크(Arthur Clarke)의 합당한 발언이다. 엄밀한 증명을 거쳤어도 논거가 지극히 고차적이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근거 있는 미신과 비슷할 뿐이다. 지나치게 전문화가 이루어지면 어떤 점에서는 지성을 막아 버리는 상태, 아니 막지 않을 수 없는 상태와 맞닥뜨린다. (나카노 도오루, 「과학의 진보에 따른 반지성주의」, p.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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