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서울 선언 (김시덕, 열린책들, 2018.) 본문

잡冊나부랭이

서울 선언 (김시덕, 열린책들, 2018.)

Dog君 2018. 7. 31. 09:47


1-1. 수원화성의 장안문(북문)에서 행궁 쪽으로 내려오는 길의 장안사거리에 있는 건물, 자세히 뜯어보면 약간 이상해 보인다. 옆에 있는 다른 건물들에 비해서 뒤로 한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 있기 때문이다. 아니, 무슨 건물이건 코딱지만큼이라도 더 넓게 지으려고 애쓰는 것이 당연지사인데 유독 이 건물은 뒤로 한 걸음 이상 성큼 물러선 것처럼 보인다. (그것 말고도 이상한 것은 더 있다. 뒤쪽 블럭의 이면도로가 유독 이 지점에서 앞으로 툭 튀어 나와있다든지 하는 것... 하지만 글로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이 정도로 그냥 패스...) 이에 대한 내 나름의 조사 결과는 이렇다.


원래 도로폭은 빨간색 사각형이다. 그런데 유독 오른쪽 건물 앞에서만 파란색 사각형만큼 노폭이 늘어난다.


위 사진을 오른쪽 측면에서 바라보면 이렇다. 빨간색 동그라미가 위 사진의 파란색 사각형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승용차 1대 정도를 주차할 수 있는 정도니까 공간이 꽤 큰 편이다.


이 부분을 평면지도에서 보면 이렇다. 빨갛게 표시한 부분이다.


1-2.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먼저 조선시대의 화성 내 도로를 보아야 한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화성전도'를 보면 장안문에서 행궁으로 이어지는 Y자 형의 도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Y자 도로는 1911년에 작성된 지적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화성전도. 오른쪽의 장안문(북쪽)에서 왼쪽의 팔달문(남쪽)에 이르는 Y자 형태의 도로를 확인할 수 있다.


1911년 지적도. 도로 부분을 주황색으로 표시했다.


1-3. 1944년에 촬영된 항공사진에서 Y자 도로 서쪽의 곧은 도로가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식민지 시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신작로일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1944년까지는 조선시대의 Y자 도로와 식민지 시기의 신작로가 함께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944년 항공사진. 주황색의 도로 서쪽으로 곧게 뻗은 신작로가 보인다.


1-4. 22년 뒤인 1966년에 촬영된 항공사진에서는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신작로가 점차 노폭을 넓혀가면서 기존의 Y자 도로까지 잠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6년 항공사진. 파란색으로 표시한 신작로가 노폭을 넓혀가면서 기존의 도로를 잠식하고 있다.


1-5. 이 사진들을 모아 본 내 결론은 이렇다. 장안사거리 건물이 뒤로 물러선 듯 보이는 것은, 건물이 뒤로 물러선 것이 아니라 실은 그 부분이 옛 Y자 도로의 흔적이라는 거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비전문가의 게으른 추측에 불과하다. 좀 더 치밀한 논증을 위해서는 몇 가지 증거(지번이나 지적, 지목 같은 것)를 더 확인해야겠지만, 아니 뭐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생각은 없고...)


신작로는 파란색으로, 조선시대의 길은 노란색으로 표시하면 이렇다.


1-6. 그러니까 장안사거리 건물 앞의 이상한 모습은 조선시대의 화성 축성과 식민지 시기의 신작로 건설과 해방 이후의 도로 확장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인 결과인 셈이다. 우리는 이 하나의 공간에서 수백 년에 걸쳐 덧칠에 덧칠을 거듭한 삶의 흔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장안사거리 건물에서, 조선시대와 식민지 시기와 해방 이후가 함께 보인다고나 할까. 얼마 되지 않는 물리학적 지식을 쥐어짜서 비유하자면, 역사를 아는 자의 눈에는 X, Y, Z라는 3차원에 더하여 ‘시간(혹은 역사)’이라는 네 번째 차원도 함께 보인다고도 설명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나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윌리엄 조지 호스킨스라는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호스킨스의 책(W. G. Hoskins가 1954년에 펴낸 The Making of the English Landscape. 국내에는 이영석이 번역한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으로 출판되었다-옮겨쓴이)은 농촌 풍경에 남아 있는 ‘역사적 지층’의 의미와 비밀을 해독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하나의 풍경이 역사적 시간을 중층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이다. 비유하면 풍경은 ‘거듭 새긴 양피지palimpsest’와 같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역사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와 그들이 그린 흔적이 남아 있다. 후대 사람들은 그들 선대의 자취를 반쯤 지우고 그 위에 자신들의 삶의 흔적을 덧칠한다. 호스킨스는 바로 이 거듭 새긴 양피지에서 과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뒤쫓는다. 현재의 촌락과 발굴된 촌락 터를 답사하면서 그곳에서 옛날 켈트인들의 정착과 후대 앵글로색슨인들의 이동과 중세농민의 생활과 상승하는 부농의 새로운 모습을 그림처럼 되살린다. 말하자면 낯익은 풍경에 대한 해독을 넘어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영석, 『삶으로서의 역사』, 아카넷, 2017, pp. 241~242.)


2-1. 영국의 호스킨스에 이어 한국의 한 문헌학자도 비슷한 생각을 했고, 자신이 오랫동안 살았던 서울을 구석구석 발로 꾹꾹 밟아다니며 기록한 것들을 모으고 정리하여 『서울 선언』이라는 책을 냈다. 제목만 봐서는 야심 넘치는 정치인의 서울시장 출마 선언 같지만 내용은 저언혀 그렇지 않다. 그보다는 서울이라는 3차원 공간에 ‘시간(혹은 역사)’이라는 네 번째 차원을 적용한 결과라고나 할까. 시간에 우열이 없는 것처럼, 저자 역시 ‘시간(혹은 역사)’라는 네 번째 차원의 모든 시점이 다 제각기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저자가 보기에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특권을 부여하는 인위적인 시도, 우리가 흔히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일들이란 결국 ‘시간(혹은 역사)’라는 축을 없애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러한 행위는 어떤 공간이 가진 '시간(혹은 역사)’의 폭을 애써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니 이 얼마나 멍청한 짓거리인지!


  안중근 기념관 광장에서 남산 타워 쪽을 보면 식민지 시대에 조선 신궁이 서 있던 자리가 있습니다. 광복 뒤인 1968년에는 이 자리에 남산 식물원이 세워졌고, 2006년에 이를 철거한 뒤에는 옛 한양 성곽을 발굴·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조선 신궁은 헐릴 만합니다만, 현대 한국 시기에 세워져서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들른 남산 식물원을 헐어 버리고, 조선 왕조 시대의 성곽을 복원하는 데에 저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저는 조선 왕조라는 왕국의 신민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의 시민입니다. 대한민국 시기에 만들어진 건물과 공간들이 귀히 여겨지지 않아서 툭하면 헐려 버리고, 그 자리에 조선 왕조의 유적이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창작되는 최근 움직임이 한탄스럽습니다. (p. 177.)


2-2. 여기서 특권을 부여받는 특정한 시대와 문화란, 대체로 조선시대와 그 지배층의 문화인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와 양반 문화에게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할 때, 조선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의 경험이 들어설 자리는 사라지고, 양반이 아닌 사람들의 문화가 들어설 자리도 사라진다. 그러면 당장, 조선시대 이후에 우리가 경험했던 것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식민지 잔재라서 없애고 독재의 흔적이라서 지우고 나면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남는 게 뭔가. 역사란 그런 것인가. 지금의 내 삶과 무관한, 수백 년도 더 전에 있었던, 극소수 지배층의 일들을 모아둔 것만을 역사라고 하는가. 봉건왕조의 신민이 아닌 공화국의 시민이 가져야 하는 역사의식도 과연 그러해야 하는가.


  서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시대에 산수화에 그려져서 그 유래를 전하고 있는 사대문 안 관청과 대갓집들, 지배층이 한강가에 세운 정자들만 서울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의 모든 동네, 모든 건물은 그 모습 그대로 전부 뜻깊고, 전부 읽어 낼 거리가 무궁무진합니다. 이제까지 서울을 말해 온 사람들이 조선 시대 궁궐과 왕릉, 양반과의 저택과 정자들을 주로 거론해 온 것은 대단히 편협한 귀족주의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든 옛 책이 동일하게 귀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 속의 모든 공간과 사람도 동일하게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p. 33.)


  은평 역사 한옥 박물관, 북촌, 서대문 형무소, 선감 학원.

  이 네 곳의 공간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정비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 한 것은, 자기 주장을 펼칠 만한 돈과 권력을 갖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불교 승려와 같이 주자학적 사회에서 배척받은 존재들, 일본군 성 노예 희생자와 같은 소수자 여성들, 그리고 현대 한국의 정부와 권력 기관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된 피해자들이었습니다.

  이들 소수자들을 시민들의 기억에서 지워 버리면서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은, 〈선비〉니 〈양반〉이니 〈사대부〉니 자칭하는 소수의 남성 지배자들이 조선 시대부터 현대 한국에 이르는 시기까지 한반도의 역사를 주도했고, 이들이 주축이 되어 일본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지금도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권리가 있다는 세계관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해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선 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주자학적 세계관의 양반 집단이 누렸던 문화가 가장 고상하고, 그 밖의 누추하거나 비참하거나 부끄러웠던 과거는 현대 한국 시민들이 잊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지를 이들 장소에서 읽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pp. 388~389.)


3. 저자가 굳이 공화국 어쩌고 시민 저쩌고 하는 것은 단지 역사의 ‘민주화’(일베 때문에 이 단어, 정말 쓰기 어려워졌다) 같은 철지난 구호를 끌어오려고 하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저자는 아마도 역사의 변화를 추동하는 진짜 힘의 원천이 그런 주변부(라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들)에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내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무슨 역사적 가치가 있겠냐 싶지만, 그 일상 속에서 발휘하는 인간애와 연대의 정신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진짜 힘이라는 믿음 말이다.


  박정희 정권은 1971년에 광주대단지에서 봉기한 시민들의 요구를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1978년 대서울 서쪽 끝인 서부 인천에서 봉기한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과 1979년 대서울 동쪽 끝 면목에서 봉기한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은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1983년 대서울 서쪽 끝 목동에서 봉기한 철거민들과 1985년 대서울 서남쪽 끝 가리봉에서 봉기한 노동자들은 전두환 정권을 위협했고, 그들의 항쟁은 1987년의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서울특별시는 빈민과 공장 노동자들을 서울의 끝으로 밀어내서 그들과 그 밖의 서울 시민들을 분리하려 했지만, 서울의 끝에서 봉기한 그들의 용기와 희생은 현대 한국의 역사를 크게 진전시켰습니다. 현대 한국의 변화는 언제나 서울의 〈땅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pp. 312~313.)


(전략) 노동자들은 인간다웠습니다. YH무역 노동자들이 신민당사로 찾아갔을 당시의 신민당 총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당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노동자들을 당사 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신민당사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배고파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당사 안에서 다시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이 플래카드를 본 신민당 당원들이 그들에게 빵과 우유를 주었지만, 그들은 면목동에 고립되어 있는 동료 노동자들도 굶고 있다면서 이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작은 음식이라도 공평하게 나눠먹겠다는 그들을, 박정희 정권은 경찰 1,000명을 파견해 체포하고, 김경숙 선생을 살해했습니다. (p. 331.)


4. 아까 『서울 선언』이라는 제목이 야심 넘치는 정치인의 서울시장 출마 선언 같다고 타박했지만, 사실 이 책은 정치인의 선언문 이상으로 강력한 호소를 품은 듯 하다. 이 두툼한 책을 통해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아마도, 크고 거대하며 권력가진 자들의 것만이 역사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작고 사소하며 평범한 일상 역시도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상 속에서 의미를 건져올리는 작업이 지금 당장 각자의 위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 아닐까.


5-1. ...라고 주례사 같은 말만 쓰고 끝낼 수도 있겠으나, 그러면 재미가 없으니 책을 읽으면서 든 궁금증 하나 덧붙여 본다.


5-2. 아까 위에서 하나의 공간에 여러 시간대가 덧칠되어 있고, 이것을 읽어내는 것이 역사를 아는 자의 힘이라고 썼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현실에서, 그 여러 시간대 중에서 단 하나의 시간대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문화재 보존이냐 건물 신축이냐를 사이에 둔 고민일 수도 있고, 혹은 여러 역사들이 겹쳐 있는 공간에서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문화재를 복원할 것이냐를 고민해야 할 때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드물기는 하지만 있기는 있다. 예컨대 수원 화성 복원 과정에서 옛 행궁 공간의 일부를 점하고 있던 신풍초등학교의 존치 여부가 문제가 되었다.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라.) 화성과 신풍초등학교 모두 역사적으로 의미가 작지 않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손을 들 것이냐를 두고 오랜 시간 동안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결국 결론은 신풍초등학교를 이전하는 것으로 정리되었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느 쪽이 더 옳으냐가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어느 한 쪽으로 판단하는 것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기호일보] ‘화성행궁 복원 사업’ 중에 맞닥뜨린 옛 신풍초 강당 철거냐 존치냐 기로


5-3. 저자는 책에서 '공화국의 시민'의 관점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조선시대 이후의 역사도 무조건 그대로 보존해야/두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저자가 남산의 풍경을 논하는 와중에 조선 신궁에 대해서는 "헐릴 만하다"(p. 177.)라고 한 것이나, 무작정 아파트부터 올리고 도로부터 뚫고보는 요즘 세태에 대해 탄식하는 것을 보면, 저자 역시도 어느 정도의 선은 가지고 있는 듯하다.


5-4. 그렇다면 그 '선'은 과연 어디인가 하는 것. 나의 궁금증은 바로 그것이다. '공화국의 시민'으로서의 역사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주장이 미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자면, 조선 신궁이 헐려도 괜찮은 이유는 무엇인지, 아파트를 올리는 것은 왜 안 되는지, 그것들 역시 당대를 살아가는 뭇사람들의 삶의 흔적이고 욕망의 자취라고 누군가 강변한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하실 것인지, 기회가 닿는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는 거다. (페이스북에다 물어볼까 싶지만, 아는 사이도 아닌데, 그건 좀 부끄럽잖아잉... 난 그저 흔하디 흔한 페이스북 팔로워일 뿐인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물어본다면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렇다. (나는 저자의 입장에 적극 동의한다고.)


6. 나도 답사 다니는 것 좋아하고, 걸어다니는 것 좋아한다. 한 때 역사지리학 근처에서 먹고 살았던 적도 있다. 갑자기 막 답사를 다니고 싶어졌다. 나도 내가 살았던 공간을 기록하고 싶다는 욕망이 마구마구 솟아오르는 독서였다. 그 전에, 어디 보자, 내가 카메라를 어디에 뒀더라...


ps. 208쪽 상단의 집은 체크. 어쩐지 이런 모양의 집을 짓고 싶어졌다.


교정.

140쪽 4줄 : 간주했습니다.2013년 9월. -> 간주했습니다. 2013년 9월.

281쪽 1줄 : 왠만큼 -> 웬만큼

365쪽 7줄 : 6·25  전쟁으로부터 -> 6·25 전쟁으로부터

365쪽 13줄 : 휑뎅그레  서 있는 -> 휑뎅그레 서 있는

365쪽 20줄 : 우뚝  서 있는 -> 우뚝 서 있는 (확실치는 않은데, 이상의 3개는 어쩐지 띄어쓰기가 두 칸 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365쪽 13줄 : 휑뎅그레 -> 휑뎅그렁하게

373쪽 9줄 : 계량 한옥은 -> 개량 한옥은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