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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문학과지성사, 200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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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문학과지성사, 2004.)

Dog君 2018. 8. 1. 20:33


1. 이런 걸 골계미라고 한다던가. 아직 소설 읽는 재미를 잘 몰라서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하지만 적어도 이런 식의 비틂에서 문학의 힘이 발휘된다는 사실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팔대이는 우리에게 자기 소개서에 빠져서는 안 될 사항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알고 보니 자기 소개서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고난도의 글재주가 필요한 서류였다. 우선 꼭 들어가야 할 내용으로, 성장 배경과 성격, 생활 태도와 학창 생활, 그리고 지원 동기 및 앞으로의 포부가 있어야 했고, 그 외에 첨가해야 할 사항으로 대인 관계와 조직에 대한 적응력, 경력, 그리고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신체적 결함이나 성겫아의 단점, 그리고 장애 정도까지. 그 많은 것들을 일정한 분량에 모자람이나 넘침 없이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 팔대이의 설명이었다. 세상에...... 기가 막힐 법도 한데, 시봉은 의외로 한결 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본 저 고백은」, p. 83.)


  순간, 머리핀의 걸쇠가 풀렸다. 들썩거린 걸쇠 틈으로 머리칼 한 올이 흘러내렸다. 그 한 올을 타고 다른 한 올이 흘러내려왔고, 또 다른 한 올, 또 다른 한 올, 댐이 무너지듯 그렇게. 그러곤 끝이었다. 걸쇠는 힘없이 자신의 몸을 풀었고, 무쇠 머리핀은 남자의 발등으로 떨어졌다. 그제야 여자의 고개가 남자를 향해 돌려졌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여자의 머리칼이 쑤아, 남자의 얼굴 쪽으로 덮쳐왔다. 순간적으로 남자는 무춤해졌다. 여자의 얼굴은 머리칼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분명 남자가 서 있는 곳에서 여자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파란 방수천도 그쪽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의 머리칼은 그 바람을 거슬러 남자를 향해 계속 육박해들어왔다. 여자의 머리칼이 이토록 길었던가.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한 손으로 계속 여자의 머리칼을 헤집었으나 그럴수록 더더욱 여자의 머리칼은 남자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어왔다. 까칠하고 기름때 잔뜩 낀 머리칼이 아니었다. 날렵하게 세상을 덮치는 별똥별 같은, 손바닥을 간질이는 ㄱ아아지풀 같은, 그런 몸부림.

  여자의 머리칼 촉수는 남자의 얼굴, 그중 이마 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남자의 머리칼이 있었던 곳, 이제는 하나 둘 빠져버려 자잘한 모공으로 그 흔적만 남아 있는 곳. 달려들어온 머리칼은 그 흔적 위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뭉툭한 촉수로 두들겨보기도, 제 몸을 말아 비벼보기도 하였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여자의 머리칼이 이맛살을 뚫고 들어와 뇌수 깊이 박히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또 한편 남자는, 여자의 길고도 풍성한 머리칼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듯한, 새로운 모종을 이양 받은 듯한 뻑뻑함에 몸을 떨었다. 머리를 휘두르면 기다란 머리칼이 함께 흐느적거릴 것 같은, 그 출렁임의 무게가 주는 풍성함, 혹은 은밀한 불량기, 여자와 온전히 하나가 된. (「머리칼 傳言」, pp. 118~119.)


  그의 뒤통수에 박 대통령이 들어앉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도 그는 지금보다 더 많은 한글 단어를 읽고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몰라도 도시 근방 농업 고등학교나 공업 고등학교는 충분히 제 실력으로 입학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각고의 노력 끝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뒤통수에 박 대통령의 눈이 생기고 난 뒤부터 모든 학문들과 그를 익히기 위한 노력들에 아쉬운 작별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고 학문적 고민을 하려 해도 뒤통수 한가운데 자리잡은 박 대통령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겸허한 마음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내 부족한 머리를 안타까이 여긴 박 대통령이 눈을 감지 못하고 직접 왕림한 것이라고, 박 대통령에 이승에 학문적 여한이 남은 것이라고, 다른 분야에만 욕심 내지 않는다면(그러니까 예를 들어 노름판 같은 곳)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백미러 사나이」, pp. 161~162.)


  또다시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그 와중에 여러 차례 투옥과 구금과 도피 생활을 일삼던 총학생회장은, 여당의 구청장 후보로 변신하여 자신의 전과기록을 자랑스럽게 선거 홍보물에 삽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관할 구청 내로 유치하여 막대한 수익 창출을 이루겠다는 공약을 내놓아 야당 후보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으로 인해 임대 수입이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대 앞 건물주는, 지인들에게 열심히 전화를 돌려 총학생회장 지지를 부탁했고, 통화 간간이 새삼 박 대통령의 치적을 떠올리곤 감회에 젖기도 했다.

  한편, 졸업 후 비영리 여성단체를 조직, 진보적인 페미니스트 이론가로 여러 여성 잡지에 얼굴을 내민 심수봉은, 박 대통령의 딸을 단체에 초청하는 문제로 회원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는데, 회원들은 그녀에게 대놓고 ‘여성 해방만을 위하는 거냐, 인간 해방을 원하는 거냐’하고 큰 소리로 항의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런 회원ㄷ르의 이름을 하나하나 수첩에 적은 후, 이름 상단 위에 ‘조만간 정리해야 할 대상’이라고 더 큰 글자로 적어놓았다.

  그는 그런 사람들 앞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중략)

  그렇게 해서 한 명 두 명 그의 뒤를 따라 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처음 그를 따라 뛴 사람들이 건강엔 아주 그만이라고, 옆집 사람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다음 날부터 옆집 사람들도 그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옆집 사람들도 자신의 체력단련 비법을 친척들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뒤를 따라 뛰는 사람들이 수십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각종 매스컴이 몰려들어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계속 뒷걸음질칠 뿐이었다. 그의 그런 태도에 할 말을 잃은 리포터는 건강엔 아주 그만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멘트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웅얼거렸다. 그때부터 전국 공원이나 약수터에서 뒷걸음질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늘어났고,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부딪혀 넘어지는 아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갓다. (pp. 192~194.)


23 순덕이 사준 담배를 물고 한 걸음 앞서가던 아담이 돌아 보지 않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어 가로되

24 교회에 나가면 누구나 다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25 이에 순덕이 놀란 얼굴로 아담의 앞으로 다가가 단호히 그렇다 하는지라 순덕은 이제 아담의 영혼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여기더라 진작에 담배를 사주지 않은 걸 후회하였더라

26 아담은 순덕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담배 연기만 내뿜다가 이어 가로되 구원을 받으면 정말 천국으로 가는 거요

27 이에 순덕이 좀더 큰 목소리로 그렇다 하나님께서 능히 구원해주신다 하고 말하니 아담이 씁쓸히 웃는지라 순덕이 적이 의아해하더라

28 아담이 다시 가로되 그럼 한 번 지옥에 빠진 사람들은 영원히 그 지옥 안에서만 머물게 되는 건가요

29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하고 물으니 순덕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더라

30 이에 아담이 다시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가로되 어쩌면 난 말이에요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이 지옥이라는 생각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중략)

33 아담은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서다 말고 뒤돌아 순덕에게 가로되

34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무엇을 하면서 견뎌야 할까요 (「최순덕 성령충만기」, pp. 256~257.)


  그러던 어느날 아침, 토방에서 상한 씨감자들을 골라 부엌으로 힘겹게 걸어 나오던 순녀는, 마당 한가운데 마치 큰절하듯 엎드려 있는 우석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무춤,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엎드려 있는 우석이의 어깨엔 예전 누렁이의 등 위에 있던 쟁깃줄이, 굵고 거칫한 짚으로 얼기설기 엮은 쟁깃줄이,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뒤로 겨우내 쓰지 않아 녹이 슨, 그러나 여전히 날카롭고 묵직해 보이는 보습과 한마루가 어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누렁이가 다시 살아 돌아온 듯, 순녀의 마음속 저편에서 쨍, 하며 돌부리에 보습 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녀는 한동안 말없이 우석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우석이에게 다가갔다. 우석이는 예전 누렁이가 그랬던 것처럼 한 손을 땅에 디딘 채 연신 흙을 파헤쳤다 다시 덮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네가 할 작정이니……?”

  순녀의 말에 우석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눈을 끔벅였다.

  “누렁이도 다 큰 다음에야 쟁기질을 한 거란다......”

  사립문 옆 상수리나무 위에선 까치가 시끄럽게 울어냈고, 군부대에선 오전 일과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우석이는 순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순녀는 그런 우석이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감자밭 너무 군부대 망루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망루 위에선 초병 두 명이 부동자세를 취한 채 순녀의 감자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가, 난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단다. 넌, 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으니까...... 하지만 이건 좀 빠르구나......”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pp. 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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