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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 중국을 거닐다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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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 중국을 거닐다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7.)

Dog君 2018. 8. 4. 20:45


1. 두껍지 않은 책인데, 의외의 사실을 많이 알았다. 이전까지는, 연행사절을 통해 제한적으로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였다거나 유리창을 통해 다양한 서적을 들여왔다...는 정도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서양의 문화를 수입한 것은 강화도조약 이후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조선은 이미 그 전에 서양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영향도 꽤 크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중반에 이미 사진의 존재를 알았고, 서양화의 기법이 한국의 미술에 끼친 영향도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2. 물론 강화도조약 전과 후를 단순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양으로나 질로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조선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개방적인 국가였던 것 같다. (비록 청나라라는 필터를 거친 것이기는 하지만) 서양 문화를 주체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정도의 유연성은 있었다고 하겠다. 지나간 일을 두고 왈왈하는 것이 생산적인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와서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안타깝고 막 글타. 물론 뭐, 망할 이유가 있어서 망한 거겠지만...


  1645년(인조 23) 청나라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뒤 조선 사절의 사행 노정은 크게 두 차례 바뀌었다. 천도 후에는 의주에서 책문·봉황성·연산관·요동·우가장을 거쳐 광녕으로 가는 지름길을 태하여 북경에 이르는 노정으로 사행했다. 이후 1678년(숙종 4)부터 청나라가 심양을 거치도록 사행로를 바꾼 후에는 책문에서 요동까지는 동일하지만 성경을 거쳐 우가장·광녕·산해관·영평부·풍윤현·옥전현·계주·통주·북경에 이르는 노정이 되었다.

  그러나 1679년(숙종 5) 바다를 방어하기 위해 우가장에 관방시설을 설치하여 기존 통로가 막히자 책문에서 성경까지 도착한 후 백기보·소흑산을 돌아 광녕까지 가서 이전 육로를 따라 북경으로 가는 길이 조선 말기까지 사행 노정으로 이용되었다. 이때 요동에서 성경을 거쳐 광녕으로 가는 노정은 총 2,049리(804.7킬로미터)로 편도 28일 정도가 소요되었으며, 조선의 관서 지역을 통과하는 노정까지 합치면 총 3,100리(1,217킬로미터)로 약 40일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북경 관소에서 체류 기간까지 합치면 연행의 총 일정은 약 5개월이 소요되었다. (p. 20.)


  중국에는 조선 사절단을 상대로 서적·서화 등의 고급 품목만을 전문적으로 중개하는 서반序班이라는 하급관리가 있었다. 서반은 청조의 예부 홍려시 또는 회동관 소속 종9품 문관직으로, 궁중에서 조회와 연해향 등에서 관리의 서열별 좌석을 주관하거나 조선 사절이 북경에 도착하면 예부에서 서반을 뽑아 순번대로 관소를 숙직하는 관리로 충당했다. 서반은 대개 북경 이외의 출신 중에서 선발하고 녹봉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조선 사절이 관소 내에서 구입하는 북경의 물건 중 서적, 서화, 필묵, 차 같은 품목의 무역을 주관하여 그 이윤을 독점했다. (p. 55.)


  1765년 홍대용은 북경 관소에 머문 62일 중 33일을 돌아다니며 구경할 수 있었고, 18세기 후반이 되면 문금이 거의 사라져 1798년에 연행했던 서유문의 경우는 관소에 도착하여 출발할 때까지 문금 제재를 전혀 받지 않았다. 이렇듯 명대와 청초에 엄격했던 문금은 청의 정세가 안정되는 강희연간 후반부터 점차 완화되었고, 18세기 후반이 되면 거의 해제되다시피 했다. 따라서 18세기 후반에는 그 이전 시기보다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서화를 구입하는 사례가 점차 줄고, 유리창이나 융복사 내에 서는 시장과 같이 서화가 매매되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구입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에 들어오는 중국 서화의 양적인 증가는 물론, 기호에 따른 서화 구매와 수집의 폭이 넓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세기 후반 문금 완화로 조선 사절과 교유하려는 청 문인들이 조선 관소를 활발하게 왕래했다. 한중 지식인 사이 교유의 결과물로 서화를 제작하거나 이별을 즈음하여 전별 선물로 서화를 증여하는 사례가 늘면서 당시 조선 사절들과 교유한 청인들의 작품이 조선으로 유입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pp. 69~71.)


  18세기 후반 조선 관소의 문금이 완화되고 북경의 유리창이 서적 및 서화 시장으로 활성화되면서 조선인들의 중국 서화 구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리창은 송나라 연수사 옛터로 그 규모가 정양문 밖 남쪽 성 밑으로 가로 뻗어 선무문 밖까지 이르렀다. 박지원이 연행하던 때에도 유리창에는 궁정 건축에 쓸 유약 입힌 기와와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으며, 공장 바깥에는 재화가 넘치는 점포가 즐비했다. 그중 유리창에 서점이 번성하게 된 것은 건륭연간이었다. 명대 후기 이래 강남을 중심으로 민간 인쇄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출간된 서적들이 북경의 유리창으로 집적되면서 18세기에 이르면 거대 서적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유리창의 존재는 조선인들에게 대량 구입을 자극하고 비교적 용이하게 서화를 구입할 수 있는 유통로가 되었다.

  청나라 장서가 이문조(1730~1778)의 「유리창서사기」에 의하면, 유리창의 동문에서 서문에 이르는 큰길 좌우에 서점이 즐비했다. 그중 가장 큰 서점은 문수당, 오류거五柳居, 선월루, 명성당, 문회당 등이었다. 유리창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사람들은 대개 강남과 강서 지역 출신이었다. 이들이 수집한 장서를 보기 위해 조선 사절뿐만 아니라 청 지식인들과 유리창에 숙소를 정하고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들이 몰려들었다. 이에 따라 유리창의 서점은 조선 사절과 중국 지식인이 만나 비공식적으로 양국의 정보를 교환하고 학문과 문화를 교유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박제가와 이덕무도 이곳 유리창에서 편수관 축덕린과 이정원, 사고전서 등교관 소신 등을 만나 필담을 나누었다. (pp. 72~73.)


  조선 후기 연행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북경 천주당에서 접한 서양화였다. 18세기 조선 사절 대부분은 천주당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벽화뿐만 아니라 서양의 천문 관련 기구를 구경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선교사들이 서양 물건을 선물로 주었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특히 천주당 서양화는 17세기 말 이후 조선 사절에게 빼놓을 수 없는 기이한 장관[奇觀]으로 꼽힐 정도로 큰 관심 거리였고, 천주당을 통해 조선에 들여온 서양화는 조선 후기 회화 구도나 채색에서 입체적이고 사실적 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익(1681~1763)은 북경에 다녀온 사람들이 서양화를 구입하여 대청에 걸어놓는 것이 유행이라 했을 만큼 당시 사절단을 통해 대량의 서양화가 조선으로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서양화는 대부분 유화보다 제작이 용이한 동판화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pp. 115~116.)


  중국에 사진이 전래된 것은 1840년대이며, 1860년대 초에는 북경에 중국인과 외국공관 소속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영상관影像館’, ‘조상관照像館’ 등 소위 사진관이 등장하여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중국을 왕래하던 조선 사절도 자신의 사진을 찍어 국내로 들여오기도 했다.

  런던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 전문대학(이하 소아즈)에 소장된 조선 사절의 사진은 1861년에서 1864년 사이에 조선 사람들이 북경에 머물 때 익명의 러시아 사진가에게서 찍은 사진이다. 따라서 소아즈에서 공개한 사진들은 적어도 1861년부터 1864년 사이 조선 사절을 촬영한 사진이자 조선인을 찍은 사진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p.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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