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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 한국사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편, 푸른역사,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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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 한국사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편, 푸른역사, 2018.)

Dog君 2018. 11. 23. 15:50



“이 책은 다른 학술서적과 달리 광장의 한복판에서 출발했습니다.” 


1. 이 책의 첫 문장은 위와 같다.(앞에 붙은 간단한 자기소개는 빼고...) 이 책이 세상에 던지는 이 일성一聲이, 아마도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소설만 첫 문장이 중요한게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광장’이란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그 일련의 행동들을 말하는 것일테고,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젊은 역사연구자들의 실천을 지칭할테다. 당장 이 책을 기획한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를 가장 중요한 구심으로 삼기도 했고 말이지... 그런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의 탄생을 바라보면서 나는 심정적으로... (삐-) 여기서부터 자체삭제 


2-1. 역사학계는 왜 한 목소리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했을까. 국가가 알아서 돈 펑펑 뿌려가며 역사교과서 만들어주겠다는데, 청와대도 역사에 관심 많다는데, 안그래도 인문학이 위기라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적극적으로 편승해서 교과시수도 확충하고 연구비도 따내고 그러면 그게 더 개이득 아닌가.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역사라는 게 애초부터 국가권력이 자기 필요에 따라 주물럭거리고 막 그런건데, 뭐...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쌍심지를 켜고 덤벼드냐 이거지. 


2-2. 일견 맞는 지적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어떤 식으로든 역사(혹은 역사를 담은 기록)에 손을 댔으니까. 근대 이전에는 자기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역사에 손을 댔고, 근대 이후에는 동원이데올로기를 만들기 위해서 역사를 이용했다. 특히 근대 이후의 권력에게 ‘역사’란 너무나도 매력적인 수단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경험과 기억들을 ‘역사’(혹은 ‘국사’)를 통해 하나로 통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일한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단일한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것과 같다. (인간의 정체성이 어디에서 오냐. 기억에서 오잖냐.) 그리고 기억과 정체성을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은 또 권력이 원하는 대로 기억과 정체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정희의 독재가 유독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거, 그게 그냥 그런게 아니야.)  


2-3. 나는 거기에 저항하는 것이 역사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학계가 한목소리로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했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억과 경험을 단일하게 통합시키는 과정에서 사라졌던 많은 파편들을 애써 찾아내어 들춰내는 것, 대문자 역사(History)가 아닌 소문자 역사들(histories)을 더 많이 발견하는 것, 지금의 조건과 권력관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무덤덤하고 무기력하게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조건과 권력관계를 넘어서기 위한 가능성을 찾아내기 위해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글쓰는 것... 나는 그것이 바로 역사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역사학은 태생적으로 불온하다고 생각한다. 애초부터 현실의 권력관계와 불화하기 위한 공부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 책의 필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문제의식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3-1.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을 보면, 이 책에 실린 13편의 글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이 책 스스로 나눈 분류와는 다르다.) 첫 번째는 단일화된 공식 서사의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결들을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최보민의 「‘을’들의 전쟁, 1925년 예천사건」, 권혁은의 「월남에서 온 그는 왜 ‘김 병장’이 아니었을까」, 윤성준의 「미군 포로심문보고서가 남긴 한국전쟁기 한 포로의 삶」, 문미라의 「연변 조선인들의 ‘조국’을 되돌아보다」, 조용철의 「세종‘대왕’과 북방 ‘영토’」가 여기에 해당할 것 같다. 이들이 다루는 형평운동, 베트남전 파병, 한국전쟁, 세종 시대 등은 교과서와 여러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이미 친숙해진 소재이다. 하지만 그 친숙한 소재를 좀 더 파고들어가면 그 내부에도 시각과 경험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이 글들은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마치 당구공처럼 균질할 것 같은 서사를 쪼개고 부수어 그 조각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거랄까. 예컨대 형평운동 내부의 갈등과 사회적 저항을 주목한 최보민의 글은 한국 사회의 신분제 해체가 생각만큼 말끔하고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베트남전 파병군인의 사회적 경험과 경제적 수익이 계급과 근무형태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 주목한 권혁은의 글은 베트남전 파병 그 자체를 균질한 경험으로 전제하는 일반의 인식에 던지는 근본적인 물음이 될 수 있으며, 북한과 남한을 오간 전쟁포로의 궤적을 추적한 윤성준의 글은 흔해빠진 개인의 삶조차 국가 혹은 국경 단위와는 무관할 수 있음을 밝히며, 한국전쟁을 전후한 연변 조선인들의 '조국관' 변화를 다룬 문미라의 글은 한국전쟁의 여파를 논할 때 연변 조선인의 관점을 더할 때 좀 더 풍부한 맥락을 더해줄 수 있음을 이야기하며, 세종 연간 북방 영토 개척의 이면에 주목한 조용철의 글은 왕조 중심의 정치사에만 주목하고 있던 세간의 관심을 좀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할 것을 주문한다. 


3-2. 두 번째는 애초에 그 존재 자체가 지워졌던 것들을 가시화可視化시키려는 시도이다. 김대현의 「1950~60년대 한국의 여장남자」, 장원아의 「‘미신’이 된 무속」, 이성호의 「금기를 깨다! 신라왕실의 근친혼」, 임동민의 「한국 고대사에서 사라진 낙랑군·대방군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겠다. 이들이 다루는 주제는 근대 권력에 의해 비정상 혹은 금기로 간주된 탓에 애초에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것처럼 숨겨진 것들이다. 역사학 연구의 기본 전제는 기록을 남기는 것이지만, 이들 존재는 기록을 남길만한 권력조차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불가능했던 존재들이다. 아니, 자기 목소리는커녕 비정상 혹은 금기로 간주된 탓에 2018년 현재에까지도 그 존재를 부정당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김대현이 다룬 ‘성소수자’나 장원아가 다룬 무속신앙이 딱 그러하다. 이성호가 다룬 근친혼과 임동민이 다룬 낙랑·대방 유민 역시 현재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서술하는 한국사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기가 어렵다. 찬란한 문화로 빛나야 할 신라왕실에 근친혼을 어떻게 녹여넣을 것이며, 유구한 전통으로 빛나야 할 한국민족의 역사에 중국의 ‘식민지’인 낙랑·대방의 존재를 어떻게 집어넣느냐 말이다. 


3-3. 세 번째는 역사 속 보통 사람들의 전유appropriate와 주체성을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편소리의 「조선시대 사람들의 이름 짓기와 부르기」, 김재원의 「육남매 아빠(1915~1994)의 중산층 가족 도전기」, 임광순의 「공장새마을운동의 두 얼굴」, 전영욱의 「식민지기의 ‘옥바라지’와 현재의 우리」가 여기에 해당하겠다. 이들 글은 이름모를 장삼이사라 하더라도 주어진 조건과 환경 속에서 저 나름대로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때로운 주어진 조건을 저 나름대로 전유하기도 하는 행위자임을 집중적으로 부각한다. 그러니까 권력과 구조만으로 결정되는 세상이란 없고, 권력의 공백과 구조의 균열이 만들어내는 어떤 ‘공간’이 있다는 뜻이다. 편소리가 이름 짓기를 통해 조선시대 신분제의 일상에 접근한 것이나, 김재원이 '중산층'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개발독재를 살아간 보통의 가부장의 욕망과 실천그린 궤적을 추적한 것, 임광순이 공장새마을운동의 애초 목적이 노동자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규율화하기 위한 것에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자아실현의 장으로 활용했던 노동자들이 있었음을 밝혀낸 것, 전영욱이 ‘옥바라지’의 탄생과 유지가 당시 사람들이 일제 식민권력에 대응하는 전략의 산물이었음을 지적한 것은, 일상과 그 일상 속에서 나타나는 비틀림과 전유의 양상에 주목하고 있다. 


4. 주절주절 길게도 썼는데, (내가 봐도 내 글은 너무 난잡하다...) 결국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1)역사란 다양한 가능성의 집합이라는 것, 2)그리고 그 가능성이란 곧 지금 나의 삶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 3)따라서 역사란 지금 나의 삶을 설명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첫걸음이 된다는 것,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낯간지럽더라도 꾹 참고 좀 더 비행기를 태우자면, 인도사의 경험을 통해 역사학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던 서벌턴 연구(subaltern studies)라든지,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알프 뤼트케의 일상사(alltagsgeschichte) 연구와 ‘eigensinn’ 개념 같은 것들이 대체로 이러한 문제의식과 궤를 같이 한다고도 할 수 있다. 


5-1. 여기까지 쓰고 다시 책 제목을 보면, '한뼘 한국사'라는 제목도 범상치 않게 느껴진다. 관련된 인터뷰나 다른 글들을 보면 이 책을 통해 한국사에 대한 이해를 한 뼘 더 늘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의미를 소박하게 담은 것 같기는 한데, 독자인 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소박하게만 느껴지는 제목이 아니다. 왜, '센티미터'도 아니고 '인치'도 아니고, '뼘'일까.


5-2. 나는 그 사소한 표현에 저자와 기획자의 무의식적인 지향이 숨어 있다고 믿는다. 엄지손가락부터 가운데손가락까지를 펼친 길이를 말하는 '뼘'이란, 사람의 손의 크기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따라서, 이 '뼘'이라는 단위는 우리 모두 각각이 판단과 측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가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 각각의 독자에게도 필요하다고 이 책의 저자와 기획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6-1. 독자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에 좀 더 밀착하고자 하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반가운 것은, 현재 한국의 역사학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그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옛날 얘기 좀 해보자. 한국사학계에서 가장 큰 학술단체인 한국역사연구회가 1988년 설립될 때 내걸었던 ‘과학적, 실천적 역사학’이라는 구호에는, 역사학이야말로 세상을 설명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전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꼭 30년이 지난 지금, 한국 역사학의 지향은 어떠한가. 세상을 바꾸는... 것까지는 바라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의 삶을 온전히 설명하고는 있는가. 그저 현학적인 연구논문 생산에만 급급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더 많이 드러내는 것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역사학의 연구성과를 사회화시키는 작업에는 소홀하지는 않았는지, 뭐 그런 등등의 생각을 나만 하고 있는건 아닐거다. 그 질문들에 대한 젊은 연구자들의 답이 이 책이라고 하면... 그게 꼭 나만의 과도한 생각은 아닐걸.


6-2. 약간 훈수꾼처럼 말하자면(따라서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좀 재수없게 말하자면), 이 책의 미덕은 현재 역사학계에서 가장 젊은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 하겠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설명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겠다는 이 책의 문제의식은 과연 어떤 결실로 열매를 맺을까. 쉬이 낙관할 수야 없겠지만, 나는 이들의 작업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2018년 한국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나 역시 꼭같이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의 다음 책을 기대한다. 


교정. 

34쪽 3줄 : 박원옥의 집에서 -> 박원옥朴元玉의 집에서 

38쪽 2줄 : 박원옥朴元玉의 집으로 -> 박원옥의 집으로 (한자표기를 처음 나왔을 때로 이동)

71쪽 12줄 : 金一 -디스트로이어 -> 金一 - 디스트로이어 (하이픈 앞뒤 띄어쓰기)

79쪽 5줄 : 혼현인 -> 혼혈인 

102쪽 1줄 : 김상사 -> 김 상사 

102쪽 5줄 : 돌아 온 -> 돌아온 

102쪽 6줄 : 돌아 온 -> 돌아온 

102쪽 17줄 : 김병장 -> 김 병장 

102쪽 19줄 : 1966년  해외근무수당과 -> 1966년 해외근무수당과 (띄어쓰기가 2칸) 

122쪽 15줄 : 노종조합 -> 노동조합 

124쪽 19줄 : 새벽별 보기운동으로 -> 새벽별보기운동으로 

182쪽 1줄 : ‘올바른 믿음’를 자처하고 -> ‘올바른 믿음’을 자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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